•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Ⅰ. 전시과 체제
  • 1. 전시과 제도
  • 2) 경종 원년의 전시과-시정전시과-
  • (2) 시정전시과의 내용

(2) 시정전시과의 내용

시정전시과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의 설치 기사를 분석해 볼 필요가 있는데, 이에 대하여≪高麗史≫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경종 원년 11월에 처음으로 職散官 各品의 전시과를 정하니, 官品의 高低를 논하지 않고 다만 인품으로써 이를 정하였다. 紫衫 이상은 18품으로 나누고, 문반의 丹衫 이상은 10품, 緋衫은 8품, 綠衫 이상은 10품으로 나누었다. 殿中·司天·延壽·尙膳院 등 잡업의 丹衫 이상은 10품, 緋衫 이상은 8품, 綠衫 이상은 10품으로 나누었으며, 무반의 丹衫 이상은 5품으로 나누었다. 그 이하의 雜吏도 인품으로써 정하였는데 지급한 것이 동일하지는 않았으며, 이 해의 科等에 미치지 못하는 자에게는 한결같이 田 15결을 지급하였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田柴科).

이처럼 시정전시과의 내용은 크게 보아 田柴의 지급대상, 지급기준, 그리고 지급내역(수급액)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지급대상과 관련하여 우선적으로 주목되는 사실은 ‘職散官’, 즉 職官과 散官이 모두 전시과의 수급대상이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직관은 職事가 있는 실직을 말하고, 산관은 관계만 있고 관직이 없는 산계를 의미하였다.0051)李成茂,≪朝鮮初期 兩班硏究≫(一潮閣, 1980), 116∼117쪽.
朴龍雲,<高麗時代의 文散階>(≪震檀學報≫52, 1981).
그러므로 일단 당시 관계를 가진 모든 인물은 관직의 유무에 관계없이 전시를 지급받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정전시과의 분급기준이 되기도 한 공복제 내용을 분석해 보면 반드시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광종 11년에 제정된 공복제 규정에 의하면 “元尹 이상은 자삼, 中壇卿 이상은 단삼, 都航卿 이상은 비삼, 小主簿 이상은 녹삼”의 공복을 착용하도록 되어 있었는데,0052)≪高麗史≫권 72, 志 26, 輿服 1, 官服 公服. 자삼의 기준인 원윤과 단·비·녹삼의 기준인 중단경·도항경·소주부는 성격을 달리하는 실체로 파악하고 있다. 즉 원윤은 국초 이래 사용된 16등급의 관계 중에서 10위에 속하는 관계명이었음에 비하여 중단경 이하는 관직명이었다고 한다.0053)末松保和,<高麗初期の兩班について>(≪東洋學報≫36-2, 1953). 따라서 前文의 산관은 곧 원윤 이상의 자삼층을 말하고, 직관은 중단경·도항경·소주부 등이 포함된 단삼·비삼·녹삼층을 가리킨다 하겠다. 아울러 단삼층 이하 직관은 원윤보다 낮은, 즉 佐尹 이하의 관계를 지녔을 것으로 믿어진다. 결국 원윤보다 낮은 관계에 있으면서 관직이 없는 인물은 전시과의 혜택을 받지 못하였다고 여겨진다.0054)金塘澤,<崔承老의 上書文에 보이는 光宗代의 ‘後生’과 景宗 元年 田柴科>(≪高麗光宗硏究≫, 一潮閣, 1981).

그러면 이처럼 전시과의 지급대상인 자삼층의 산관과 단삼층 이하 직관의 구체적인 실체는 무엇이었는가. 여기서 잠시 당시 관계의 사용 실태를 살펴 둘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고려 조의 관계는 摩震의 官號를 기초로 하여 태조 초기에 형성되었는데, 그 말년에 이르러 원윤에서 三重大匡까지의 상위 10階와 좌윤 이하 中尹까지의 하위 6階로 구성되는 16등급의 체제를 갖추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광종 연간에 이르러 중국식 문산계가 수용되면서 중앙의 관인층은 재래의 관계와 함께 문산계를 병용하였으나 중앙의 관료기구에 조직되지 않은 비관인층, 즉 지방의 호족들은 재래의 관계만을 單稱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무렵에 좌윤 이하의 하부 관계층에서는 재래의 관계 자체가 지니는 의미가 희박하게 되어 관직을 갖는 순수한 관인이 이에 대신하여 새로 등장하였다는 것이다.0055)武田幸男,<高麗初期の官階>(≪朝鮮學報≫41, 1966). 이렇게 볼 때 원윤 이상의 자삼층에는 재래의 관계만을 쓰게 된 지방호족과0056)태조 때 귀순해 온 지방의 대호족에게는 주로 元尹 이상의 官階를 수여하였다(武田幸男, 위의 글 참조). 문산계를 병용하는 중앙의 고위 관료가 함께 포함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자삼층을 설정함에 있어 관직이 아닌 관계를 기준으로 한 것은 관계만을 소유한 지방의 호족들을 공복 또는 전시과에 포함시켜 그들을 회유하고 대우하는 데 그 일차적인 목적이 있었다고 믿어진다. 반면 단삼층 이하의 경우는 복색을 결정하는 기준이 관직이었던 만큼 관직을 중시할 수밖에 없는 부류의 인물들이 주류를 이루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광종대 이후 새로운 관인으로 등장한 과거 출신자와 시위군 출신들이 주목된다. 특별한 정치적·경제적 기반 없이 유학적 소양만으로 과거를 통해 관계에 진출하거나 무사적 재질로 시위군에 뽑힌 이들은 광종의 특별한 보호 아래 성장을 거듭하여 전시과를 제정할 무렵에는 이미 관인사회의 주역으로 부상하였는 바, 바로 이들이 단삼층 이하의 문·무반 및 잡업의 중심을 이루었을 것으로 판단된다.0057)金塘澤, 앞의 글. 이들 외에도 국초 이래 관직에 종사해 온 인물의 일부가 여기에 포함되었을 것은 물론이지만, 그 중심은 역시 과거 및 시위군 출신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와 같이 관계나 관직을 소유한 인물만이 시정전시과의 수급대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위 규정의 말미에 밝혀져 있듯이 잡리, 즉 胥吏·人吏 등의 여러 吏屬과 ‘이 해의 科等에 미치지 못하는 자’로 분류된 소위 限外科 해당자들에게도 전시가 지급되었다. 이속들에게 주어진 전시액의 규모는 잘 알 수 없으나, 대체로 녹삼의 하한인 ‘田 21결 및 柴 10결’을 상한으로 하고 한외과의 전 13결을 하한으로 하는 수준이었다고 믿어진다. 그러나 한외과의 수급대상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계층이었는가는 잘 알 수 없다. 다만 개정 및 갱정전시과에 정식 수급대상자로 올라 있는 군인이 이 시정전시과에 누락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이를 군인층으로 비정한 견해가0058)千寬宇,<閑人考-高麗初期 地方統制에 관한 一考察->(≪社會科學≫2, 1958).
李基白,<高麗 軍役考>(≪高麗兵制史硏究≫, 一潮閣, 1968).
있는가 하면, 이와는 달리 당시는 고려의 군제가 아직 정비되기 이전이었으므로 이를 군인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잡직 계통의 吏 가운데 未入仕職으로 파악되는 잡류로 간주하는 것이 옳다는 견해도0059)姜晋哲,≪高麗土地制度史硏究≫(1980), 109∼110쪽. 있다.

여기서 시정전시과의 규정 중 세주 부분, 즉 토지분급의 내역(수급액)을 정리하면 다음의<표 1>과 같다.

職 散 官 雜 吏 限外科
紫 衫 文 班 雜 業 武 班   田15결
丹 衫 緋 衫 綠 衫 丹 衫 緋 衫 綠 衫 丹 衫
品位 額 數
額數
額數
額數
額數
額數
額數
額數
1 110 110                                          
2 105 105                                          
3 100 100                                          
4 95 95                                          
5 90 90                                          
6 85 85                                          
7 80 80                                          
8 75 75                                          
9 70 70                                          
10 65 65 1 65 55             1 60 55             1 65 55
11 60 60 2 60 50             2             2 60 50
12 55 55 3 55 45             3 55 45             3 55 45
13 50 50 4 50 42 1 50 40       4 50 42 1       4 50 42
14 45 45 5 45 39 2 45 35 1 45 35 5 45 39 2 45 35 1 5 45 39
15 42 40 6 42 30 3 42 30 2 42 33 6 42 30 3 42 30 2 42 32      
16 39 35 7 39 27 4 39 27 3 39 31 7 39 27 4 39 27 3 39 31      
17 36 30 8 36 24 5 36 20 4 36 28 8 36 24 5 36 20 4 36 28      
18 32 25 9 33 21 6 33 18 5 32 25 9 33 21 6 33 18 5 33 25      
      10 30 18 7 30 15 6 30 22 10 30 18 7 30 15 6 30 22      
            8 27 14 7 27 19       8 27 14 7 27 19      
                  8 25 16             8 25 16      
                  9 23 13             9 22 13      
                  10 21 10             10 21 10      

<표 1>始定田柴科 (단위:결)

*≪高麗史≫食貨志 기록에 약간의 오류가 있는 듯하나 원문대로 표기하였음.

다음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수급액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사항의 하나로 단삼·비삼·녹삼의 각 품이 받는 전시의 액수가 문반·무반·잡업에 관계없이 완전히 동일하다는 점이다.0060)雜業 丹衫 1품의 田地 支給額 60결은 65결의 착오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전시과의 일차적인 지급 기준이 班보다는 복색의 구분에 두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다음으로는 단·비·녹삼의 각 품이 받는 전지의 수급액이 자삼 및 상급 복색의 일정 품위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는 점도 관심을 끈다. 즉 단삼이 받는 전지는 자삼의 10품 이하가, 비삼은 자삼의 13품 및 단삼의 4품 이하가, 녹삼은 자삼의 14품과 단삼의 5품 및 비삼의 2품 이하가 받는 것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자삼에 있어서는 대체로 전지와 시급의 수급액이 동일하였음에 비하여, 다른 복색의 경우는 전지가 시지보다 많았다는 특징도 보인다. 아울러 전체적으로 보아 전지와 시지의 수급량이 후대의 전시과에서보다 후한 편이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시지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여, 그 최고액과 최저액이 갱정전시과의 거의 두 배를 넘는 수준이었다. 이 밖에도 자삼층의 전시 수급액이 대체로 다른 복색층의 그것보다 우월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앞서 설명한 대로 자삼층이 고위 관계를 가진 특수집단이었다는 점에 기인한다.

시정전시과의 지급대상 및 수급액과 관련된 이러한 내용들은 이의 지급기준과 적지 않은 관계를 지니고 있는데, 그 특징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이해된다. 먼저 人品과 官品이 함께 전시과 지급의 기준으로 활용되었다는 점이다. 비록 前文에서 관품의 고하는 따지지 않고 인품만으로 정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신분적 귀천 내지 세력의 대소를 뜻하는 인품과, 관등의 차이를 표시하는 관품이 아울러 고려되었다. 4색공복제를 지급기준으로 설정한 것 자체가 관품을 중시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면서도 인품을 참작하여 각 복색층을 18품(자삼), 10품(문반 및 잡업의 단삼·녹삼), 8품(문반 및 잡업의 비삼), 5품(무반의 단삼) 등으로 세분하였던 것이다. 앞의 표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대개 하급 복색의 최고품이 상급 복색의 최하품 밑에 바로 연결되지 않고 적당한 위치에 서로 중첩해 있는 것은 각 복색 내의 품위가 주로 인품에 기준을 두어 설정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0061)姜晋哲, 앞의 책, 36∼37쪽. 물론 여기서의「品」을 인품이 아닌 관품으로 볼 수도 있다.0062)全基雄,<高麗 景宗代의 政治構造와 始定田柴科의 성립기반>(≪震檀學報≫59, 1985). 이에 의하면 人品은 官品으로 구별할 수 없는 雜吏에게만 적용된 기준이라고 한다. 그러나 자삼층의 품위가 18등급으로 구분되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된다. 만일 이「품」이 관품이라면 자삼층에 있어서 그것의 실체는 당연히 관계였다고 해야 하는데,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자삼층에는 10개의 관계만 있었을 뿐이며, 이 10개의 관계를 18등급으로 나눈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볼 때 자삼층의 18품은 관품으로서의 官階가 아니라 다른 기준에 의해 나누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인품 이외에 달리 찾아 볼만한 기준은 없다.

다음으로 지적할 수 있는 특징은 문반·무반·잡업 등으로 구별되는 관직 반열과 자삼·단삼·비삼·녹삼의 네 복색을 두 틀로 하여 전시가 지급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관직 반열보다는 복색이 기본적인 틀이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왜냐하면 단삼 무반의 경우를 제외하고 같은 복색 내의 품위수가 관직 반열에 관계없이 완전히 같을 뿐 아니라, 같은 복색 내의 동일 품위에 속하는 각 관직 반열의 전시 수급액 또한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자삼에서와 같이 단삼·비삼·녹삼의 경우에도 관직 반열에 따른 구별은 필요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구별을 하게 된 것은 무반 때문이었다고 여겨진다. 즉 문반이나 잡업과는 달리 단삼에만 해당하고 품위 또한 5품으로만 되어 있는 무반의 실정을0063)이는 당시 무반직이 문반이나 잡업에 비해 미분화되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金塘澤, 앞의 글). 나타내기 위해서였다고 하겠다. 그리고 후대의 전시과와는 달리 여기에서는 관직 뿐 아니라 관계도 전시 분급의 기준이 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즉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특수계층인 자삼층은 관계를 기준으로 설정되었고, 그 이하의 단·비·녹삼층은 관직을 기준으로 구분되었던 것이다. 사실 이는 4색 공복제의 특징인 바, 공복제를 기본 틀로 하여 짜여진 시정전시과 규정이 이러한 특성을 지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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