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Ⅰ. 전시과 체제
  • 1. 전시과 제도
  • 5) 별정전시과
  • (1) 무산계전시

(1) 무산계전시

무산계전시는 문자 그대로 무산계를 소유한 인물들에게 지급된 토지였다.

따라서 무산계전시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무산계의 실체부터 살펴 보아야 하는데, 이에 앞서 잠시 그 지급 내역을 소개해 둘 필요가 있다. 여기서 갱정전시과 규정의 말미에 붙어 있는 지급내역을 정리하면 다음<표 1>과 같다.

支 給 額 數 受 給 者
田 35결, 柴 8결 冠軍大將軍 雲麾將軍
田 30결 掌武將軍 宣威將軍 明威將軍
田 25결 寧遠將軍 定遠將軍 遊騎將軍 遊擊將軍
田 22결 耀武校尉 耀武副尉 振威校尉 振威副尉 致果校尉 致果副尉 翊麾(威?)校尉 翊麾(威?)副尉
田 20결 宣折校尉 宣折副尉 禦侮校尉 禦侮副尉 仁勇校尉 仁勇副尉 陪戎校尉 陪戎副尉
田 17결 大匠 副匠 雜匠人 御前部樂件樂人 地理業 僧人

<표 1>

위의 표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무산계전시 규정은 지급되는 전지의 다과에 따라 6개의 등급으로 나뉘어 있다. 제1등급에서 제5등급까지는 冠軍大將軍 이하 여러 장군과 교위·부위 등의 무산계가 배치되어 있는데, 무산계 29계 중 제1계에서 제3계에 이르는 驃騎大將軍·輔國大將軍·鎭國大將軍과 제6계인 中武將軍은 빠져 있다. 아마도 기록의 누락이 있었던 것으로 믿어진다.0099)驃騎·輔國·鎭國大將軍의 누락을, 위계는 원칙적으로 존재하였지만 실제로 수여되는 예가 없었기 때문으로 추정한 견해도 있으나(姜晋哲,≪高麗土地制度史硏究≫, 高麗大出版部, 1980, 55쪽), 현종 연간에 표기·보국대장군의 위계를 가진 老兵士의 존재가 보이고 있어(≪高麗史≫권 4, 世家 4, 현종 4년 9월 경술) 단순한 기록의 누락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한편 무산계 29계의 내용에 대해서는 朴龍雲,<향직과 무산계>(≪한국사≫13, 국사편찬위원회, 1993) 참조. 그리고 제6등급에는 大匠·副匠·雜匠人·御前部樂件樂人 및 地理業·僧人 등 무산계와는 직접 관련이 없는 부류의 인물들이 들어 있어 주목된다. 역시 기록의 착오일 가능성도 있으나, 꼭 그렇게만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고려시대 무산계의 특성을 이해하면 이러한 의문은 그리 어렵지 않게 풀린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고려 관인사회의 질서체계는 문산계에 의해 유지되었다. 그러나 고려 초부터 문산계가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국초에는 摩震의 관계를 기초로 하여 16등급으로 형성된 재래의 관계가 사용되다가, 광종 연간에 중국으로부터 문산계가 수용되면서 양자를 병용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성종 14년에 이르러 官階制의 일대 개편이 단행되면서 문산계가 관인사회의 유일한 공적 질서체계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종래의 관계는 향직화하여 향리·군인·양반·서리 및 無官의 노인, 무산계 소유자, 여진의 추장등에게 수여되었다.0100)武田幸男,<高麗初期の官階>(≪朝鮮學報≫41, 1966).
――――,<高麗時代の鄕職>(≪東洋學報≫47-2, 1964).
고려에서 무산계를 사용하게 된 것은 바로 이 때의 일이다. 즉 문산계를 중심으로 관인사회의 질서를 재편하면서 이와 짝을 이루는 무산계를 함께 받아 들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때부터 문관과 무관은 각각 문산계와 무산계를 썼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무산계를 무관의 산계로 사용하지 않았다. 즉 고려에서는 무관에 대해서도 문관과 같이 문산계가 수여되었고, 무산계는 문무의 관인층과는 성격이 다른 부류에게 주어졌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고려의 무산계는 매우 다양한 부류의 인물들에게 주어졌다고 한다. 우선 노령의 병사가 그 수여의 대상이었다. 목종이 서경에 행차하여 祭를 올리고 兩京의 수비를 담당하던 군사 중에서 80세 이상의 무직자에게 무산계의 제28계인 陪戎校尉를 수여한 일이0101)≪高麗史節要≫권 2, 목종 2년 10월. 그 일례라 하겠다. 무산계는 향리에게도 수여되었다. 通州의 戶長 金巨가 무산계 제17계인 振威副尉에 올랐던 일과,0102)≪高麗史≫권 5, 世家 5, 덕종 원년 2월 임인. 權適의 증조부 均漢이 호장으로서 배융교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0103)<權適墓誌>(≪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 등은 그러한 사례의 하나이다. 사실 고려에서는 京役의 복무를 마친 주현의 進奉長吏에게 무산계를 수여하는 관례가 있었다.0104)≪高麗史≫권 12, 世家 12, 예종 3년 2월 신묘. 따라서 향리가 무산계를 소유하는 사례는 적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탐라의 왕족과 여진의 추장도 무산계를 수여받았다. 일례로 현종 15년에 탐라의 추장 周物과 그의 아들 高沒은 雲麾大將軍을 받았고,0105)≪高麗史≫권 5, 世家 5, 현종 15년 7월 임자. 문종 37년에 말을 헌상하기 위해 온 여진인 方眞은 寧遠將軍의 위계를 띠고 있었다.0106)≪高麗史≫권 9, 世家 9, 문종 37년 2월 신미. 이 밖에도≪高麗史≫에는 이러한 사례가 적지 않게 보이고 있다. 이들 뿐 아니라 각종의 工匠에게도 무산계가 수여되었는데, 이러한 사례는≪高麗史≫食貨志 祿俸條의 諸衙門 工匠別賜 항목에서 우선 찾아 볼 수 있다. 군기감에 소속되어 米 7석을 녹봉으로 받은 牟匠은 行首宣節(折)校尉였고, 長刀匠은 行首陪戎副尉였으며, 角弓匠은 陪戎校尉였던 것이다. 그리고 碑의 刻造盖 및 刻字에 秘書省 소속의 遊擊將軍과 배융교위가 大匠과 함께 참여한 사례도0107)<玄化寺碑>(≪朝鮮金石總覽≫上).
<七長寺慧炤國師塔碑>(위의 책).
<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碑>(위의 책).
그러한 예의 하나라 하겠다. 왜냐하면 석공의 일인 비의 각조개 및 각자를 맡은 유격장군·배융교위라면 그 실체는 石匠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반 공장과 마찬가지로 樂人(樂工)도 무산계를 받을 수 있었다. “악공은 배융부위에서 시작하여 耀武校尉까지 승급할 수 있다”고 규정한 문종 7년의 판문이0108)≪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限職 문종 7년 10월. 이를 잘 말해 준다.

이처럼 고려시대의 무산계는 노병사·향리·공장·악인 및 탐라의 왕족과 여진의 추장에게 수여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류에 속하는 모든 사람이 무산계를 받았던 것은 아니다. 일례로 향리의 경우 이를 갖지 못한 자가 보다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바로≪三國遺事≫권 4, 義解 5, 寶壤梨木條이다. 여기에는 예종 때를 전후한 시기에 淸道郡의 戶長과 其人을 지낸 6명의 향리가 보이는데, 그 중에서 무산계를 지닌 자는 ‘前副戶長禦侮副尉’였던 李則禎 1인 뿐인 것이다. 사실 향리에 대한 무산계 수여는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즉 모든 향리에게 일률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특별한 공로가 있다거나, 京役을 끝마치는 등의 일정한 조건을 갖춘 자에게 수여되었던 것이다. 통주 호장 김거가 진위부위에 오른 것도 국방에 대한 공로 때문으로 이해되고 있다.0109)旗田巍,<高麗の武散階>(≪朝鮮學報≫21·22, 1961). 그리고 그들이 받은 무산계의 위계도 일률적인 것은 아니었다. 활동상에 따라 주어지는 위계에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장과 악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된다. 위 제아문공장별사록 항목에 무산계를 갖지 않은 대장·부장 및 잡장인과 여타 악인들의 존재가 훨씬 많이 보이고 있으며, 앞서 언급하였듯이 비문의 각자를 맡은 석장에도 무산계가 없는 대장이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의 경우는 오히려 기술이 뛰어나거나 근무 기간이 오래된 소수의 인물들에게만 무산계가 수여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여하튼 이렇게 볼 때 공장과 악인에는 일단 무산계를 가진 인물과 그렇지 못하고 나름대로의 위계를 소유한 인물의 두 부류가 있었다고 하겠다.

이렇게 무산계가 관인인 무관이 아니라 그보다 신분이 낮은 노병·향리·공장·악인 및 탐라의 왕족과 여진의 추장 등에게 수여되었다면, 그것은 곧 무산계가 양반관료층과 그 범주에 해당하지 않는 다른 계층의 인간들, 특히 향리층을 명확히 구별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활용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무산계를 받았다고 해서 특별한 신분 또는 계층상의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하겠다. 사실 무산계의 수여는 恩典·褒賞·慰勞의 의미를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0110)이와 같은 무산계의 내용과 성격에 대해서는 旗田巍, 위의 글 참조.

고려시대 무산계의 실체는 대체로 이상과 같은 것이었다. 이를 기초로 할때 무산계전시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겠다. 첫째, 무산계전시의 지급대상으로는 우선 무산계 소유자를 들 수 있는데, 이에는 노병·향리·공장·악인 및 탐라의 왕족과 여진의 추장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무산계를 소유했다고 해서 모두 무산계전시를 받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 중 일부는 향직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이기도 하였는데,0111)武田幸男, 앞의 글(1964) 참조. 무산계를 갖고 있으면서 또 향직을 받은 경우는 일반전시과 규정에 따라 鄕職田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무산계와 향직을 모두 소유한 경우 어느 쪽이든 지급액수가 큰 쪽의 적용을 받았다고 판단되는데, 대체로 향직전의 규모가 무산계전보다 컸던 것이다.0112)일반전시과에 보이는 향직전 중 최하등급(田 30결, 柴 5결)만이 무산계전시의 제1등급보다 적고 여타의 향직전은 이와 같거나 많다. 하나의 예로 현종 4년에 보국대장군인 宋能과 표기대장군인 庾孫이 100세가 되어 향직인 大匡을 추가로 받았는데,0113)≪高麗史≫권 4, 世家 4, 현종 4년 9월 경술. 이 경우 송능과 유손은 당연히 일반전시과 규정에 따라 향직전을 지급받았을 것이다. 만일 이들이 무산계의 제1계와 제2계인 표기·보국대장군에 따라 무산계전시를 받는다면 그 액수는 田 35결과 柴 8결(제1등급)을 넘을 수 없는 데 반해, 향직의 제3계인 대광을 기준으로 일반전시를 받으면 향직의 제6계인 佐丞의 수급액 전 40결과 시 10결(제12과)보다는 많은 수준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0114)更定田柴科 규정에 佐丞 위의 향직이 빠져 있는 것은 기록의 누락이며, 실제로는 大丞 이상의 향직에 대해서도 田柴가 지급되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앞의<문종 30년의 전시과-갱정전시과->참조). 그리고 이국인인 탐라의 왕족과 여진의 추장에게는 실제로 무산계전시가 지급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둘째, 무산계가 없는 공장과 악인도 무산계전시의 제6등급에 편입되어 전 17결을 지급받았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이것은 일견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공장·악인과 무산계의 관계를 고려하면 전혀 이해될 수 없는 것만은 아니다. 공장과 악인이 무산계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이들 중의 일부가 무산계를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짐작되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좀 더 분명하게 시사하는 기록이 있어 주목된다. 앞에서 소개한 바 있지만 “악공은 배융부위에서 시작하여 요무교위까지만 승급할 수 있다”고 한 문종 7년의 판문이 그것이다. 여기서 악공의 승진이 무산계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밖에 공장의 경우도 아마 이와 비슷하였을 것이다.0115)다만 玄化寺碑의 刻造盖를 맡은 石匠이 遊擊將軍이란 무산계를 갖고 있었던 점으로(<玄化寺碑>,≪朝鮮金石總覽≫上) 미루어 볼 때 일반 공장의 경우는 耀武校尉 이상까지 승급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장·악인이 무산계전시를 받을 수 있었던 것, 다시 말해 무산계전시 규정에 제6등급을 설정하여 일견 무산계와는 직접 관련이 없는 듯한 공장과 악인을 편입시킨 것은 이처럼 그들의 위계가 무산계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0116)洪承基,<高麗時代의 工匠>(≪震檀學報≫40, 1975). 좀 더 부연한다면 공장과 악인에게 무산계가 주어지고 있었으므로 그들을 무산계전시의 대상에 포함시키기는 하였는데, 아직 무산계를 받지 못하고 이에 준하는 나름대로의 위계를 가진 자들도 많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전시를 주기 위해서는 제6등급과 같은 별도의 등급을 설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결국 무산계를 지닌 공장과 악인은 그 위계에 해당하는 무산계전시를 받고, 나머지는 제6등급의 무산계전시를 받았다고 믿어진다. 그렇다고 모든 공장·악인이 무산계전시의 지급대상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고려의 공장은 크게 官屬工匠과 非官屬工匠으로 나누어진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중에서 군기감을 비롯한 중앙의 여러 관서에 전속되어 있던 관속공장만이 그 대상이었을 것이다. 공장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비관속공장의 경우는 주로 잉여제품의 판매나 타인에의 고용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므로,0117)洪承基, 위의 글 참조. 이들이 국가로부터 토지를 비롯한 일정한 반대급부를 받았다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악인의 경우도 아마 일반 공장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공장이 비록 무산계전시의 대상이었다고는 하지만, 그 수가 그리 많은 것은 아니었다고 하겠다. 대체로 제아문공장별사록의 지급대상과 일치하는 수준, 즉 100여 명 정도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한다.

셋째, 그러나 제6등급의 말미에 들어 있는 地理業·僧人은 공장과 악인의 경우와는 달리 무산계전시와 관련이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다시 말해 기록의 착오로 여기에 포함된 것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무산계가 주어진 어떠한 흔적도 찾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뒤에 나오는 別賜田柴의 지급대상이 승인과 지리업 관계자였음을 고려할 때, 이들은 오히려 별사전시에 관련된 존재였던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산계전시 제6등급의 지급대상란에 세주로 표기된 ‘지리업·승인’은 세주가 아니라 큰 글자로 刻字되어 곧 이어 나오는 별사전시를 수식하는 용어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0118)旗田巍, 앞의 글.
이와는 달리 ‘地理業僧人’의 실체는 地理業 출신의 僧人 또는 ‘業中僧’과 같은 것으로, 이것이 무산계전시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高麗史≫의 誤記로 간주할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許興植,≪高麗科擧制度史硏究≫, 一潮閣, 1981, 193쪽 및 文喆永,<高麗時代의 閑人과 閑人田>,≪韓國史論≫18, 서울大 國史學科, 1988).
이렇게 볼 때 별사전시의 명칭 또한 원래는 ‘지리업·승인별사’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 볼 때 무산계만을 소유한 인물, 즉 관직은 물론 향직을 겸대하지 않은 인물과 중앙의 각 관서에 분속된 관속공장 및 악인만이 실제로 무산계전시를 받았다고 판단된다. 오히려 무산계전시는 주로 관속공장과 악인을 위해 제정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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