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Ⅰ. 전시과 체제
  • 1. 전시과 제도
  • 6) 전시과의 운영과 그 성격
  • (1) 전시과 토지의 실체

(1) 전시과 토지의 실체

전시과의 규정에 의해 지급된 토지(과전)는 그 지급대상에 따라 여러가지 이름(地目)으로 불리었다. 즉 문무관료에게 주어진 것은 양반전(兩班科田), 군인에게 분급된 것은 군인전, 閑人에게 지급된 것은 한인전이라 칭하였다. 이 밖에도 전시과 규정에는 빠져 있지만 궁원전·사원전·향리전 등으로 불리는 매우 다양한 지목의 토지가 분급되고 있었다. 이처럼 여러가지 지목의 토지가 지급되고 있었지만 전시과 토지의 대표적인 존재는 역시 양반과전과 군인전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문무의 양반관료와 군인이 전시과 지급대상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이들 토지가 전시과에서 차지하는 비중 또한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시과 운영의 실상과 그 성격을 논의함에 있어 양반과전과 군인전이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은 물론이다. 이하 이 두 지목의 토지에 관련된 기록과 내용을 토대로 전시과 토지의 실체·운영·성격 등의 문제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본장의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나말려초에서 고려 말에 이르는 시기의 토지지배가 지니는 내용은 기본적으로 소유권적 지배와 수조권적 지배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고 할 수 있겠는데, 각종의 지목으로 분급된 전시과 토지가 수조권적 지배를 기초로 하고 있었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러한 수조권적 지배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현재 서로 다른 의견이 나와 있어 실상을 파악하는 데 적지 않은 혼란이 빚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선 이와 관련하여 그 동안에 제시된 견해들을 간단히 소개해 둘 필요가 있다.

먼저 같은 전시과 규정에 따라 분급된 토지인 양반전과 군인전의 실상을 달리 이해한 견해가 있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전시과 체제 하의 양반전을 과전법의 과전과 같은 실체, 즉 일반 民田 위에 설정된 토지로 보기는 어렵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조선의 경우와 달리 고려에서는 공전과 사전의 수조율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공전의 수조율은 1/4이었고 사전은 1/2이었는데, 만일 양반전이 민전 위에 설정되었다고 한다면 양반전(사전)으로 편입된 민전은 국가수조지(공전)로 편성된 민전보다 갑절이나 많은 田租를 내야 하는 매우 불합리한 경우가 상정되어야 한다. 둘째, 현종 14년의 ‘義倉米收租規定’에 양반전은 일반 민전과는 전혀 무관한 토지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이다.0122)≪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常平義倉. 즉 위 규정에 따르면 양반전은 궁원·사원전 등의 그 밖의 사전과 함께 1결에 租 2斗의 의창미를 부담토록 되어 있는 반면 국가수조지인 민전은 3科公田으로 분류되어 조 1두를 내도록 되어 있는데, 만일 양반전이 일반 민전 위에 설정된, 곧 민전과 등질적인 토지였다면 양반전으로 된 민전은 국가수조지로 남은 민전이 부담하는 의창미의 2배를 내야 한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반전은 민전과는 실체가 다른 토지였다고 해야 하며, 아마도 나말려초의 변동기에 국가에 몰수된 호족들의 田莊에 설치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호족들은 자신의 전장을 몰수당하는 대신 관료 내지 관계 소유자의 자격으로 양반전이라는 이름의 전시과를 지급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말려초 호족들의 전장이 주로 소작제에 의해 경영되었던 만큼 이를 모태로 출현할 양반전 또한 소작제로 경영되었을 것이며, 그 수조율은 소작제에 의한 分半收益의 관례가 그대로 적용되어 1/2로 정해졌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양반전의 지급이 분급된 토지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즉 소유권의 지급이라고는 할 수 없으며, 재직하는 동안 전조를 수취할 수 있는 권리(수조권)를 부여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매매는 물론이고 증여 및 상속의 대상이 될 수 없었으며, 수급자가 범죄를 저지르거나 사망하면 국가에 몰수 내지 회수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 경작을 감독하고, 전조를 수취하여 중앙으로 수송하는 것 등은 모두 지방의 수령에게 위임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수급자인 양반관료는 양반전의 경영과 관리를 책임지는 지주는 아니었다. 요컨대 양반관료의 양반전에 대한 지배는 수조권을 매개로 하는 토지지배에 불과할 뿐이었던 것이다.

양반전과는 달리 군인전은 민전 위에 설정되었으며, 이 때의 민전은 주로 군인 자신의 소유지였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자신의 민전을 제쳐 두고 타인의 민전 위에 군인전을 설정한다는 것, 즉 군인의 민전에서는 국가가 전조를 수취하고 군인으로 하여금 타인의 민전에 대해 수조권을 행사케 한다는 것은 행정적으로도 확실히 부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군인전의 지급은 ‘지급’이라는 의제적인 형식을 취했을 뿐, 실제로는 군인 자신의 민전이 국가에 부담해야 할 전조를 면제해 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군인전의 지급은 형식상 수조권의 분급이지만, 사실은 자기 소유지에 대한 免租權의 인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군인전은 주로 군인 가족이나 養戶의 노동력에 의해 경작되었다. 물론 모든 군인전이 이러한 내용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수급자인 군인의 민전이 정액에 미치지 못할 경우에는 타인의 민전을 그의 수조지로 加給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가급은 일시적이고 예외적인 경우에 한정되었다. 그리하여 양반에 비해 정치·경제적으로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던 군인들의 군인전은 항상 부족한 상태였다.0123)姜晋哲,≪高麗土地制度史硏究≫(高麗大, 1980), 68∼83·109∼134·414∼415쪽.

전시과 토지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크게 보아 앞으로 설명할「收租權分給說」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지만, 양반전의 실체를 민전이 아닌 호족으로부터 몰수한 田莊, 즉 국유지 위에 설정된 分給收租地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公田租 1/4, 私田租 1/2’이라는 관점에 초점을 맞추면 이와 같은 이해는 일견 매우 타당한 듯하며, 사실 군인전에 대한 설명은 실상에 매우 근접한 것이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양반전에 대한 설명에는 적지 않은 의문이 든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 똑같은 전시과 규정에 따라 분급된 두 토지의 실체가 본질적으로 이렇게 다를 수 있겠는가. 즉 양반전은 국유지이고 군인전은 사유지(민전)일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고 있지 않다. 둘째, 양반전이 설정된 토지가 호족들이 소유했던 전장으로서 국가에 몰수된 국유지였다는 근거 사료는 물론, 나아가 나말려초의 정치적인 변동기에 양반전을 설정할 수 있을 정도로 대규모(10여만 결)의 전장이 호족들에게서 몰수되었다는 증거 또한 전혀 결여되어 있다. 오히려 고려의 건국은 호족세력의 연합이라는 성격을 짙게 띠고 있었던 만큼, 호족의 전장에 대한 대규모의 몰수는 생각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사실 후삼국 통일이 완성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많은 귀순 호족들에게는 지역적 지배의 개념을 지닌 녹읍이 주어지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자신의 본거지는 물론 그 밖의 지역이 포함되기도 하였다.0124)이 편 1장 1절<건국 직후의 토지지배 관계와 역분전의 설치>참조. 셋째, 또 이 같은 주장의 입론적 근거가 된 ‘공전조 1/4, 사전조 1/2’ 또한 수정되어야 한다고 이해되고 있는 이상,0125)이에 대해서는 이 책 Ⅱ편 1장<조세>참조. 양반전이 민전 위에 설정되었다고 해도 수조율과 관련한 논리상의 모순은 생기지 않는다. 넷째, 만일 양반전을 민전과 등질적인 토지로 보면 ‘의창미수조규정’의 해석에 있어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한다고 지적하였지만, 이것 또한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그리 우려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즉 위 규정은 수조율 규정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의창미 규정이었는 바, 여기에 나오는 여러 토지의 부담에 차이가 생긴 것은 해당 토지의 성격보다는 그 수급자의 신분 내지 경제적 우열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양반전·궁원전·사원전 등은 경제적으로 우세한 양반이나 궁원·사원이 지급받은 토지(수조지)였으므로0126)이 義倉米收租規定에 나오는 兩班田과 宮院·寺院田이 동일한 성격을 지닌 收租地였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朴鐘進,<高麗初 公田·私田의 性格에 대한 再檢討>(≪韓國學報≫37, 1984) 참조. 경제적으로 열악한 군인과 기인의 수조지인 軍人戶丁·其人戶丁의 배에 해당하는 의창미를 부담하였다고 생각된다.0127)義倉米를 내는 주체가 누구였는가는 아직 불명이라 하겠는데, 해당 토지의 소유자가 아닌 수조권자로 보면 兩班田의 부담이 軍人田이나 其人田보다 많은 사실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문무 양반전과 여러 궁원전을 30결 이상 받으면 예에 따라 1결당 5升의 세를 거둔다”고 한 현종 4년의 判文도0128)≪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이와 유사한 차원의 조처라 하겠다. 이 경우 군인전과 기인전을 받은 자는 세를 부담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볼 때 양반전을 국유지 위에 설정된 수조지로 파악한 견해는 ‘공전조 1/4, 사전조 1/2’이라는 수조율을 불변의 사실로 확인하는 데 너무 집착한 인상이 짙고, 이로 인해 첫번째와 같이 매우 납득하기 어려운 의문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여기서 양반전 또한 군인전과 마찬가지로 일반 민전 -그것이 자기 소유의 토지이든 남의 토지이든 간에- 위에 설정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상정하게 된다. 양반전과 군인전이 본질적으로 같은 성격을 지닌 토지였을 것이라는 이 같은 사실은 “아버지의 軍人永業田을 물려 받기 위해 胥吏가 되려다가 결국은 登科하여 品官이 되었다”는 李永의 사례에서0129)≪高麗史≫권 97, 列傳 102, 李永. 실제로 확인된다. 이영이 서리가 되었다면 받았을 과전은 다름 아닌 아버지의 군인영업전(군인전)이므로 서리에게 주어지는 田柴와 군인전은 성격상 차이가 없다 하겠으며, 또 서리는 품관으로 진출할 수 있는 존재였으므로0130)金光洙,<高麗時代의 胥吏職>(≪韓國史硏究≫4, 1969). 胥吏田과 품관의 양반전은 그 성격이 구별된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결국 양반전과 서리전·군인전은 모두 동일한 성격의 토지였다고 하겠다.

다음으로는 이 수조권의 본질을 면조권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는 견해가 있는데, 이를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양반전이든 군인전이든 간에 전시과 토지(과전)의 지급은 모두 토지 그 자체의 지급이며, 거기에는 25%의 田租가 면제되는 특권이 부수되어 있다. 그리고 전시과에 규정된 지급액은 지급의 상한을 의미할 뿐이며, 지급되는 토지는 국가가 아닌 수급자 자신이 마련해야 했다. 즉 과전의 수급자가 父祖 또는 친족으로부터 상속받을 전지를 준비하여 국가에 신청하면 국가는 지급상한액의 범위에서 이를 인정해 주는 방식을 취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수급자에게 있어 과전의 지급은 영업전인 과전의 상속을 의미할 뿐이었다. 한편 이와 같은 과전은 원칙적으로 전주가 자가경영하는 토지로서 주로 소작제에 의해 경영되었는데, 농민의 경작지인 민전의 불안정성이 그러한 경영을 성립할 수 있도록 하였다. 즉 전시과 단계의 경지는 토지생산성이 낮았을 뿐 아니라 陳田化될 위험성을 항상 안고 있었기 때문에 농민은 자립이 어려웠고 불가피하게 과전을 소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지급받을 전지를 수급자 자신이 마련하고 수급자(전주)에 의해 주로 소작제로 자가경영된 과전에서의 전주의 분반수익권을, 민전 경작자로서의 자작농으로부터 정액의 전조를 거두는 수조권과 성격이 같은 것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따라서 전시과 단계에서 농민의 민전을 기반으로 하는 수조권 분급제 및 이와 깊은 관계가 있는 科田 전조의 官收官給制가 실시되었다고는 하기 어렵다.0131)濱中昇,<高麗田柴科の一考察>(≪東洋學報≫63-1·2, 1981).
―――,<高麗前期の小作制とその條件>(≪歷史學硏究≫507, 1982).

이러한 주장을 현재 흔히「免租說」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에 의하면 일견 전시과 토지가 수조권적인 지배와는 무관한 것처럼 이해될 수도 있다. 과전 지급의 실체를「토지 그 자체의 지급」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설명되겠지만 이 면조설이 기본적으로「전시과 토지의 수조권적 지배」라는 범주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면조권과 수조권이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면조권이란 수급자 자신의 민전에 대한 수조권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한편 앞서 소개한 견해와는 달리 여기에서 양반전을 군인전과 성격이 같은 토지로 파악한 것은 타당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면조설에는 몇 가지 논리상의 문제가 있다.

첫째, 과전의 지급을「토지 그 자체의 지급」이라고 하면서도 과전을 지급받기 위해서 수급자 자신이 전지를 준비해야 했다고 하는 것은 논리적인 모순이다. 토지 그 자체의 지급은 본래 소유권의 이전, 결국 국유지의 사유지화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과전으로 지급할 전지를 마련해야 할 주체는 당연히 국가이어야 한다. 역으로 수급자 자신이 과전의 수급, 즉 면조권의 인정을 위해 전지를 준비했다면 그것을 결코「토지 그 자체의 지급」으로 표현할 수는 없다.

논지를 미루어 보건대 수급자 자신의 소유지(민전)에 면조권이 추가로 부여되어 소유권과 수조권을 모두 갖게 됨으로써 그 토지를 완전히 배타적으로 지배하게 된 것을「토지 그 자체의 지급」이라고 표현한 듯한데, 전시과 토지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오해의 소지가 크다고 생각된다.

둘째, 과전으로 인정해 준 수급자의 전지가 본질적으로 민전이라는 사실을 간과하였고, 그 결과 과전과 민전의 관계, 나아가 과전 전주로서의 권리와 民田主로서의 권리를 혼돈하고 있다. 과전의 소작제 경영을 운위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과전의 지급이 소유권의 이전까지를 인정한 국유지의 분급, 그야말로「토지 그 자체의 지급」이 아닌 이상, 과전이 소작제로 경영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소작제로 경영된 것의 실체는 과전이 아니라 그 과전이 설정된 토대로서의 민전(소유지)이라고 보아야 한다. 소작제는 원칙적으로 소유권을 기초로 성립될 수 있다고 하겠는데, 과전이 수급자의 민전에 설정되었다고 할 경우 그 토지가 소작제로 경영된 것은 과전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유지인 민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작제 경영을 통해 얻어지는 분반수익은 어디까지나 민전주로서의 수입이며, 과전 수급자로서의 권리는 그가 민전주로서 국가에 전조로 내야 할 분반수익의 일부(1/2, 수학량의 1/4)를0132)일반적으로 민전에서의 수조율은 수확량의 1/10이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데(이 책 Ⅱ편 1장<조세>참조), 濱中昇은 그것을 1/4로 보는 姜晋哲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 면제받은 것 뿐이라 하겠다. 이렇게 볼 때, 과전은 주로 소작제로 경영되었고, 이를 통해 얻어지는 분반수익의 성격이 민전에서의 전조 수취와 다르기 때문에 과전의 지급은 수조권 분급의 차원이 아닌「토지 그 자체의 지급」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논리는 수긍하기 어렵다.

그런데 최근 전시과 단계의 농업경제적 수준으로는 과전법에서와 같은 수조권 분급제가 실시될 수 없고, 따라서 전시과 토지는 수급자 자신의 민전에 대한 면조권을 부여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가0133)金琪燮,<高麗前期 農民의 土地所有와 田柴科의 性格>(≪韓國史論≫17, 서울大 國史學科, 1987). 제기되어 위의 면조설을 강력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즉 고려 전기에는 自小作農의 존재가 보편적이었고, 休閑農法의 제한으로 인해 농민층은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어려운 상태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자립농을 기반으로 한 전면적인 수조권 분급제의 실시는 어려웠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과전이 수급자의 본관 지역에 있었음을 말해 주는 명종 때의 廉信若의 사례와,0134)≪高麗史節要≫권 12, 명종 7년 7월. 집안이 가난하여 名田(軍人田)이 부족한 군인에게 공전을 가급해 주라고 하는 정종 2년의 制文,0135)≪高麗史≫권 81, 志 35, 兵 1, 五軍. 그리고 전시과 단계에서는 田品이 전혀 문제되지 않았던 사실 등은 모두 전시과 토지가 수급자 자신의 소유지(민전)에 설치되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라는 주장도 나와 있다.0136)朴國相,<高麗時代의 土地分給과 田品>(≪韓國史論≫18, 서울大 國史學科, 1988). 이러한 견해들이 면조설의 범주에 속하는 것임은 물론인데, 과전이 설정된 수급자 자신의 토지 또한 그의 민전이었음을 인식함으로써 앞서 소개한 면조설의 문제점을 어느 정도는 보완하고 있다. 그러나 면조설로 통칭될 수 있는 이러한 여러 주장들이 전시과 토지의 실체를 올바르게 설명했다고 하기에는 문제점이 적지 않다.

첫째, 면조설로써는 이미 분급된 전시과 토지(田丁)를 회수하여 타인에게 지급하였음을 말해 주는 법제나 구체적인 사례들을 결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만일 과전(전정)이 수급자의 소유지 위에 설정되었다고 한다면 범죄인의 전정을 회수하여 타인에게 주도록 규정한 判文과,0137)≪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職制. 그러한 법규가 실제로 시행되었음을 시사하는 기사,0138)李 穡,≪牧隱文藁≫권 15, 碑銘 高麗國大匡完山君諡文眞崔公墓誌銘. 軍役을 피하여 도망한 자들의 전정을 빼앗아 從軍者에게 준 조처0139)≪高麗史≫권 81, 志 35, 兵 1, 五軍 충렬왕 9년 3월. 등은 합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0140)면조설 중에도 타인의 民田에 대한 收租權의 지급을 예외적이고 일시적인 경우로 인정하는 견해가 있기는 하다(金琪燮, 앞의 글). 그러나 법제적인 규정까지를 예외적인 경우로 이해할 수는 없다고 하겠다. 이러한 법규와 사례들은 오히려 과전의 지급을 수조권의 분급으로 볼 때에만 이해가 가능하다.

둘째, 면조설의 근거로 제시된 사료들 또한 해석에 따라서는 면조설이 아닌 수조권 분급설을 뒷받침해 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면조설의 가장 중요한 사료적 근거가 되고 있는 靖宗 2년의 制文에 대한 해석이 그 일례라 하겠다. 즉 이 제문 가운데 “家貧而名田不足者”를 면조설은 ‘집안이 가난해서 명전이 부족한 자’로 해석하여 ‘집안이 가난해서 소유 토지가 부족하기 때문에 전액에 차지 않은 자’의 뜻으로 이해하고 있으나,0141)金璂燮, 위의 글.
朴國相, 앞의 글.
이 구절이 꼭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집안이 가난한 데다가 또 명전까지 부족한 자’로 해석할 수도 있으며, 문리상으로는 오히려 이러한 해석이 보다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군인전 부족에 대한 해결책이 결국 국가 수조지로서의 공전, 즉 타인의 민전을 가급하는 것이었다는 사실 또한 후자의 해석이 타당함을 반증한다고 하겠다. 물론 이러한 해결책을 일시적인 것으로 치부할 수도 있으나,0142)金璂燮, 위의 글. 오히려 타인의 민전에 대한 수조권의 지급이 군인전의 본질이었기 때문에 여기에서도 그러한 조처를 취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결국 위의 구절은 “소유 토지가 적은 데다가(家貧) 국가에서 분급해 주는명전(군인전)까지 부족한 자”의 뜻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따라서 이를 근거로 군인전을 비롯한 전시과 토지가 반드시 수급자 자신의 민전에만 설치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아직까지는 면조설의 실증적 토대가 마련되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한다.

셋째, 면조설은 전시과 단계의 농업경제적 수준이 전면적인 수조권 분급제를 실시하기 어려운 상태였다고 지적하고 있으나, 이것 또한 의문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고려 전기의 지배적인 농법 단계에 대해서는 현재 常耕說과 休閑說이 대립되고 있는데,0143)이에 대해서는 이 책 Ⅰ편 5장 4절<농업 생산력의 발전>참조. 휴한농법의 제한으로 인해 토지 생산성이 낮아 농민 가호의 경제적 자립이 어려웠다고 전제하는 것도 성급하려니와,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가호당 또는 노동력당 생산성까지 농민층을 상대로 수조권을 행사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낮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사실 이보다 더 큰 의문은 농민층의 자립을 수조권 분급제 실시의 전제로 보는 논리 그 자체이다. 전시과 단계의 농민이 주로 자소작농이었다고 하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들 자소작농의 민전이 국가 수조지일 수는 있으되 개인 수조지일 수는 없다는 식의 이해 방식은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넷째, 전시과 토지의 운영 원리로 이해되고 있는 田丁連立의 자료와 면조설은 정면으로 모순되어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면조설에 따르면 전시과 체제에서의 전정 분급이란 수급자 자신의 소유지에 부과될 전조에서 그 지급액 만큼 면제해 주는 것이고, 만일 자신의 소유 토지가 그 액수보다 적거나 없으면 그 만큼 혜택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 즉 전정(과전)의 분급은 타인 소유지(민전)에 대한 지배의 의미를 갖지 못하고, 자기 소유지(민전)의 존재를 전제로 한 부가적인 혜택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면조설이 옳다면 퇴임 등으로 職役의 변동이 있더라도 면조 혜택이 소멸되는 정도에 그치고, 면조권 그 자체가 전수되거나, 면조권 그 자체에 의한 소유권의 변동이 이루어질 수는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많은 전정연립 관계의 자료들은 분급된 전정이 직역과 연계되어 친족에게 전수되었음을 보여 준다. 예컨대 직역이 승계되지 않을 경우에는 전정이 연립되지 않고, 대신 구분전이 지급되고 있었음을 알려 주는 기록들은0144)≪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田柴科 현종 15년 5월 判·문종 원년 2월 判. 전정연립이 직역과 연계된 토지에 대한 권리의 전수임을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그 전수의 순위는 嫡長子-嫡孫-同母弟-庶孫-女孫의 차례로 되어 있었다.0145)≪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戶婚 정종 12년 判. 그런데 만일 면조설이 이러한 전정연립에 부합되려면 그것은 우선 면조권의 승계가 되어야 하며, 단순한 면조권의 승계란 생각할 수 없으므로, 다음으로는 이의 승계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토지의 소유권 자체도 승계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면조설에서 설정하는 바와 같이 단지 자신의 소유지에 대한 면조권을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면조권을 받은 후에는 소유권도 그에 제약을 받으며 직역담당 상태에 따라 옮겨져야 한다. 더구나 늙고 병든 군인의 경우 자손이나 친족이 있으면 전정연립은 의무적으로 강제되고 있거니와,0146)≪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田柴科 문종 23년 10월. 그럴 경우 군인은 퇴역을 계기로 면조권은 물론 자신의 소유지에 대한 소유권까지도 강제로 이양해야 했다고 하겠다. 이는 앞서 말한 면조설의 함축적인 전제, 즉 ‘면조권 그 자체에 의한 소유권의 변동은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에 비추어 볼 때 명백한 모순이다. 뿐만 아니라 면조설에 의하면 결국 수조권의 일종인 면조권이 소유권을 제약하는, 즉 면조권이 소유보다도 강력한 토지지배의 권리였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토지사유제를 인정하는 한 이러한 결론에 동의할 수는 없다. 물론 전정연립이 사유지의 상속에 관한 규정이라면 면조설이 성립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정은 사유지가 아니며, 전정연립 또한 사유지의 상속과는 무관한 것이었다.0147)이에 대해서는<재산과 상속>(≪한국사≫15, 국사편찬위원회, 1994 간행예정) 참조. 이상의 반론을0148)면조설에 대한 이상의 비판에 대해서는 盧明鎬,<田柴科體制下 白丁 農民層의 土地所有>(≪韓國史論≫23, 서울大 國史學科, 1990) 참조. 종합해 볼 때, 전시과 토지(과전)는 반드시 수급자 자신의 소유지(민전) 위에 설정되었으며, 따라서 전시과 규정의 지급액은 면조의 상한액에 불과하다고 하는 면조설은 설득력이 부족하지 않은가 한다.

끝으로 토지사유제를 토대로 한 수조권의 분급이 전시과 토지의 본질이었다고 하는 견해가 제기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고려시대에는 개인의 토지사유가 인정되고 있었다. 따라서 일차적인 토지지배는 매매·상속·증여 등의 권리가 주어진 소유권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소유권만이 토지지배에 있어 유일한 권리는 아니었다. 당시의 토지에는 이와는 별도로 국가 권력에 의해 설정된 수조권이 작용하고 있었다. 전시과는 바로 이러한 수조권을 관직이나 각종의 직역에 종사함으로써 국가에 봉사와 충성을 행하는 자에게 그 대가로 분급하는 제도였다. 그리고 이들에게 분급하는 수조권은 타인의 사유지(민전) 위에 설정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자신의 민전 위에 설정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전시과 토지는 국가에 의해 개인의 민전에 설정된 수조권을 수급자에게 분급하는 분급수조지였다. 따라서 양반전을 비롯하여 전시과 규정에 의해 분급된 개인수조지에 대한 수급자(전주)의 권리는 민전에 대한 국가의 지배권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었다. 즉 수확량의 1/10을 전조로 수취할 수 있는 권리만이 인정될 뿐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주의 권리는 文券 또는 契券의 작성을 통해 보장되었다. 그러나 전주에 의한 전조의 직접 수취를 원칙으로 함으로써 수조권을 가진 田主와 民田主인 佃客 사이에는 적지 않은 대립과 갈등이 빚어졌으며, 전시과 제도가 문란해진 고려 중·후기에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심화되었다. 한편 이러한 분급 수조지는 직역의 승계에 따라 영업전의 이름으로 후손에게 전수되었으며(田丁連立),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구분전의 명목으로 그 일부가 遞受되었다. 그러나 사유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따라서 매매될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0149)金容燮,≪高麗時期의 量田制≫(≪東方學志≫16, 1975).
李成茂,≪朝鮮初期兩班硏究≫(一潮閣, 1980), 290∼294쪽.
李景植,≪朝鮮前期土地制度硏究≫(一潮閣, 1986), 97∼168쪽.

전시과 토지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흔히「收租權分給說」로 불리우고 있는데 그 실체를「분급수조지」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日人 官學者들의 그것과 일면 상통하는 바가 있다. 그러나 일인들의 주장이 토지국유제를 전제로 한 것임에0150)이에 대해서는 이 책 I편 5장 1절<토지국유제설>참조. 비해 이 견해는 광범위한 민전의 존재, 즉 토지사유제를 기초로 하여 제기된 것이었다는 점에 기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리고 이 수조권 분급설은 양반전을 비롯한 전시과 토지를 ‘일반 민전 위에 설정된 수조지’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앞서 소개한 두 견해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수조지인 양반전을 국유지가 아닌 민전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첫번째 견해와 다르며, 그러한 민전의 범주를 과전 수급자 자신의 민전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있는 점, 다시 말해 과전은 그 전주의 민전에 설정되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타인의 민전에 설정되었다고 보고 있다는 점에서 두번째의 면조설과도 다르다.

사실, 전시과 규정에 따라 지급된 각종의 과전이 일반 민전에 설정된 수조지였음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 사료는 찾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몇몇 기록을 분석해 보면 이러한 사실은 그리 어렵지 않게 확인된다. 먼저 앞서 소개한 바도 있지만 명전(군인전)이 부족한 군인들에게 지급되어 결국 군인전이 되었을「공전」의 실체는 국가수조자로서의 민전으로 이해되는 바,0151)姜晋哲, 앞의 책, 113∼114·127쪽. 여기서 타인의 민전에 설치된 군인전의 존재를 일차 확인할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은 “군인의 증액으로 인해 부족해진 백관의 녹봉을 보충하기 위해 京軍의 영업전을 빼앗아 무관들의 불평을 샀다”는 皇甫兪義의 사례에서0152)≪高麗史≫권 94, 列傳 7, 皇甫兪義.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군액이 늘어남으로써 녹봉이 부족해졌고, 또 부족해진 녹봉을 보충하기 위해 경군의 영업전을 빼앗았다는 것은 곧 경군영업전(군인전)이 녹봉의 재원인 국가수조지로서의 민전으로 편성되었음을 말한다. 그리고 그 민전은 영업전(군인전)의 수급자인 경군 자신의 소유지가 아니라 타인의 민전이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만일 여기서의 경군 영업전이 수급자의 민전에 설치된 것, 즉 면조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군인의 민전에 대해 면조권을 인정한 것이라면 지급된 군인전을 빼앗아 녹봉에 충당시키려는 시도 자체가 용이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법제적으로 면조의 권리를 갖고 있는 민전주로서의 군인이 군인전의 회수가 부당한데도 자기의 민전에 대한 전조의 수취에 쉽게 응하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이와 같이 군인전은 토지 그 자체, 즉 소유권을 지급한 것이 아니라 수조권만을 인정해 준 분급수조지였으며, 타인의 민전 위에 설정되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믿어진다. 그러나 모든 군인전이 그러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앞서 소개한 첫번째 견해가 주장한 것처럼 군인 자신의 민전은 제쳐 두고 타인의 민전에만 군인전을 설정하는 것은 행정적으로도 불합리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인전의 분급은 우선 군인 자신의 민전을 그의 수조지로 인정함으로써 결국 민전주로서의 군인이 내야 할 전조를 면제시켜 주고(면조), 그의 민전이 자신의 군인전 액수에 미달할 때에는 타인의 민전에 대한 수조권을 추가로 지급해 주는 절차를 취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자신의 민전이 받아야 할 군인전의 액수를 초과하는 경우에는 지급액 만큼만 면조되고 나머지는 국가수조지 또는 타인의 과전으로 편성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일면 면조권의 지급이라는 의미를 띠고 있기는 하지만 꼭 그러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군인전의 분급은 ‘자타의 민전을 막론한 일반 민전 위에 설정된 수조지의 지급’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군인전이 이러한 이상 양반전 또한 이와 같았을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아버지의 군인전을 승계하기 위해 서리가 되고자 했던 이영의 사례를 통해 군인전과 서리전·양반전은 본질적으로 성격이 같은 토지임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똑같이 전시과의 규정에 따라 분급된 군인전과 양반전의 실체 내지 성격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리고 앞으로 설명되겠지만 兩班과 軍·閑人에게 지급된 과전의 일부가 兩班口分田이란 이름으로 외방이 아닌 京畿에 설치되었는데, 그렇다면 적어도 양반구분전만은 수급자의 민전이 아닌 타인의 민전에 설치된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 볼 때 전시과 토지에 대한 여러 가지 설명 중「수조권 분급설」이 가장 사실에 가까운 이해가 아니었을까 한다. 그러므로 전시과 토지의 실체는 ‘일반 민전 위에 설정된 수조지’, 즉「분급수조지」로 이해해야하겠으며, 전시과의 운영과 성격 또한 이러한 이해를 전제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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