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Ⅰ. 전시과 체제
  • 1. 전시과 제도
  • 6) 전시과의 운영과 그 성격
  • (2) 전시과의 운영

(2) 전시과의 운영

과전법의 과전과는 달리 전시과의 각종 토지(과전)는 외방의 여러 주현에 설치되었다. 이는 “토지를 수급한 자가 또한 1만 4천여 명인데, 그 토지는 모두 外州에 있다”고 한 徐兢의 설명에서0153)≪高麗圖經≫권 16, 官府 倉廩. 우선 확인된다. 그리고 “모든 州縣에는 각각 京外 양반 및 군인의 家田과 永業田이 있다”고 한 명종 18년의 制文에서도0154)≪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田柴科. 재차 확인된다. 양반·군인의 영업전이란 다름 아닌 그들의 과전, 즉 전시과 토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외방에는 양계 지역이 포함되지 않는다. 양계에는 원래부터 과전, 즉 개인수조지로서의 사전이 없었기 때문이다.0155)≪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신우 14년 6월 창왕 敎·권 82, 志 36, 兵 2, 屯田 신우 원년 10월. 결국 전시과의 각종 과전은 경기와 양계를 제외한 그 밖의 외방 주현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경기의 토지는 주로 공전, 즉 국가수조지로 편입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반드시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경기에도 양반전을 비롯한 각종 과전의 일부가 설치되었던 것이다. 충목왕 원년의 都評議使司 上言에 의하면 녹과전이 실시되기 시작한 원종 12년 이전에도 경기 8현에는 御分·宮司田과 鄕吏·津尺·驛子의 雜口分田 및 양반·군인·한인의 구분전 등이 있었다고 하는데,0156)≪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충목왕 원년 8월. 이「양반·군인·한인의 구분전」이 바로 전시과 규정에 따라 지급된 과전의 일부인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고려의 田制에서 사대부의 구분전을 제외한 경기의 토지는 모두 공전이며, 사전은 모두 下道에 설치되었다”든지,0157)≪太宗實錄≫권 5, 태종 3년 6월 임자 司諫院進時務. “고려의 사전은 모두 하도에 있었으며, 경기에는 비록 고위 관원(達官)이라도 단지 구분전 십수 결만이 있었을 뿐이나 이것만으로도 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고0158)≪太宗實錄≫권 5, 태종 3년 6월 을해 司諫院上疏. 한 司諫院의 설명에서도 다시 확인된다. 경기에 있었다고 하는 사대부나 달관의 구분전은 앞서 말한 양반·군인·한인의 구분전(이하「양반구분전」으로 칭함)과 같은 것이다. 물론 양반구분전의 존재를 알려 주는 이상의 기록은 모두 고려 후기 이후의 것들이며, 이와 관련된 고려 전기의 기록은 전혀 찾아지지 않는다. 따라서 양반구분전을 고려 후기에만 존재하였던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며, 실제로 이를 녹과전의 창설과 함께 고려 전기의 전시과 토지를 계승하여 출현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나와 있다.0159)武田幸男,<高麗時代の口分田と永業田>(≪社會經濟史學≫33-5, 1967).

그러나 앞서 소개한 세 자료를 면밀히 검토하면 고려 전기에도 양반구분전이 존재하였음을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 우선 경기 8현의 토지에 대해 새로운 經理를 건의하고 있다. 충목왕 원년의 도평의사사 상언에는 양반구분전의 경우 녹과전이 실시된 “원종 12년 이전의 公文을 考覈하여 折給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원종 12년 이전에도 이미 양반구분전이 존재하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고려의 전제에서 약간의 사대부 구분전을 제외하고 경기의 토지는 모두 공전이었다”고 한 조선 초 사간원의 설명 또한 고려 전기의 전제를 언급한 것이었다고 믿어진다. 이 같은 사간원의 주장은 과전의 下三道 移給의 명분을 전조(고려)의 전제에서 찾고자 했던 것인데, 그러한 주장의 근거를 제도가 매우 문란해진 고려 후기의 전제에 두었다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0160)실제로 조선의 관료들은 田制 운영에 관한 한 고려 후기를 혹평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따라서 충목왕 원년의 도평의사사 상언에서 말하는「원종 12년 이전」또한 전시과 제도가 제대로 운영되고 있던 고려 전기 이래 원종 12년 이전까지를 뜻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결국 양반구분전은 고려 전기의 전시과 체제에서도 존재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양반전을 비롯한 전시과의 과전은 주로 외방의 주현에 설치되었지만, 그 일부는 구분전이란 이름으로 경기에 설치되었다. 즉 한 개인이 받는 과전은 경기의 구분전(양반구분전)과 외방에 설치된 것의 두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고려가 과전을 분급함에 있어 이러한 방식을 채택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첫째, 조운의 미비로 인한 전조 수납의 어려움 때문이었다. 즉 가능한 한 경기에 국가 수조지로서의 공전을 많이 확보하고 과전을 비롯한 사전을 외방에 두면 국가로서도 조운을 통한 전조 수납의 어려움을 덜 수 있을 뿐 아니라, 사전의 전주도 나름대로 필요한 잡물로 징수할 수 있었고, 이에 따라 佃客(농민) 또한 전조 수송의 노고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0161)≪太宗實錄≫권 5, 태종 3년 6월 임자 司諫院進時務. 둘째, 그러나 한편으로 과전 수급자의 대부분은 개경에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생활의 안정을 위해 신속히 식량을 조달할 수 있는 근거리의 과전을 필요로 하였으며, 따라서 국가는 과전의 일부를 畿內에 설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양반구분전이었다. 이와 같이 양반구분전은 과전의 외방절급이라는 대원칙 아래에 운영된 것이므로 그 규모는 작을 수밖에 없었다. 달관의 경우도 십수 결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달관이라면 갱정전시과를 기준으로 대개 제1과 내지 제2과에 해당하는 관원이라 하겠고, 그들은 각각 100결과 90결의 전지를 받고 있었으므로 양반구분전의 액수는 대략 科田額의 1/8 내지 1/7에 이르는 수준이 아니었을까 한다.0162)전시과 토지의 구성에 대한 이러한 내용에 대해서는 李景植,<高麗時期의 兩班口分田과 柴地>(≪歷史敎育≫44, 1988) 참조.

여러 차례 언급한 대로 전시과 토지는 분급 수조지였다. 따라서 이를 수급한 전주의 가장 큰 권리는 전조의 수취였다. 그리고 그 수조율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생산량의 1/10이었다. 그러나 전주의 권리, 즉 수조권의 내용이 전조의 수취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전주는 과전의 전객으로부터 藁草도 거둘 수 있었다. “전조(고려)에서는 藁草를 징수한 것이 산과 들을 두를만하는 등 사전의 폐해가 매우 많았다”고 하는 申商의 지적이0163)≪世宗實錄≫권 58, 세종 14년 12월 무자.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 준다. 그리고 과전에 대한 이러한 전주의 권리는 문권의 작성을 통해 보장되었다. 즉 과전을 분급할 때 국가는 반드시 그 사실을 증빙하는 문권을 작성해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문권은 흔히 契券·文契등으로도 불리었는데, 量案 상의 토지(전정)가 누구에게 주어졌는가를 명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를 소지해야만 비로소 수조권을 통한 토지지배의 권리, 즉 수조지 지배의 권리를 행사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祖父文券을 가지고 國田, 즉 수조지를 坐食한다고 하는 지적에서0164)≪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李行 上疏. 단적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권세자들이 문계를 조작하여 타인의 노비와 전정을 탈점하였다든지,0165)≪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職制 충렬왕 34년 충선왕복위 下敎. 高曾之券을 근거로 수조지를 서로 쟁탈하였다고0166)≪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黃順常 上疏. 하는 수조지 탈점과 쟁탈 기사에서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이 밖에 문권을 고찰하여 수조지 분쟁을 해결하고,0167)≪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趙浚 1次上疏. 高曾契券에 대한 고핵을 통해 탈점된 토지를 辨正할 수 있다고 하는0168)≪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李行 上疏. 기사 등도 그러한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고려 말의 사전개혁론자들이 양계의 국가 수조지를 탈점한 권세가들의 사전을 몰수하기 위해 그들이 소지하고 있던 문계를 회수한 것도0169)≪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신우 14년 6월 창왕 敎.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즉 문계가 있으면 수조지를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자료는 물론 모두 수조지의 지배가 문계를 통해 보장되었음을 알려 주는 고려 후기에 관한 것들이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만 그러했다고 생각되지는 않으며, 수조지의 탈점과 분쟁 해결의 근거가 되었던 문권을 조부문권·고증계권 등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전시과가 실시될 당시부터 수조지의 분급에 따른 문권의 작성이 이루어졌다고 판단된다.

전주는 수조지의 분급과 함께 문권을 받은 근거로 자기 과전의 전조를 직접 수취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0170)金容燮, 앞의 글 및 李景植, 앞의 책, 119∼124쪽. 그러나 이와는 전혀 다른 견해도 나와 있다. 과전을 비롯한 각종 사전의 전조도 국가 수조지로서의 공전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책임 아래 수취되어 전주에게 분급되었다는 이른바「官收官給制說」이 그것이다. 따라서 관계 사료를 간단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A-1. (州縣들이) 養戶로 하여금 군인전에서의 양곡(田租)을 수송케 하지 않음으로써 군인들이 굶주리고 추위에 떨어 도망하고 흩어지니…(≪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農桑 예종 3년 2월 制).

2. 그 토지는 모두 지방에 있는데, 佃軍이 경작하여 때에 맞추어 전조를 내면 고르게 나누어 준다(≪高麗圖經≫권 16, 官府 倉廩).

3. 郎中 卜章漢이 죄도 없이 귀양가게 되었으므로 守平이 그의 토지를 遞食했는데, 몇년 뒤 章漢이 사면을 받아 돌아오자…또한 田租가 이미 강으로 조운되고 있었는데도 수평이 租簿를 소매에 넣고 가서 그에게 돌려 주었다(≪高麗史≫권 102, 列傳 15, 權守平).

B-1. 권세가의 노복들이 앞을 다투어 전조를 징수하므로 백성이 모두 아우성치고 근심하니…(≪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2. 兼倂家의 전조를 거두는 무리가 병마사·부사·판관을 사칭하고 혹은 별좌를 칭하며, 從者 수십 명이 수십 필의 말을 타고…가을부터 여름까지 떼를 지어 횡행하고 침략함이 도적보다 배나 되니…(≪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趙浚 1次上疏).

3. 전조(고려)의 전제에서 경기의 토지는 사대부의 구분전을 제외하고는 모두 공전이었고 사전은 모두 下道에 설치하였다. 그렇게 한 이유는 공전의 전조는 반드시 民力으로써 수송해야 하는데 경기는 쉽고 下道는 어려우며, 만약 사전은 하도에 있더라도 田主가 각자 임의로 雜物로써 징수할 수 있는 까닭에 佃客에게는 전조를 수송하는 폐단이 없고 전주 또한 무역하는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太宗實錄≫권 5, 태종 3년 6월 임자 司諫院進時務數條).

이 A·B의 기사는 물론 수조지에서의 전조 수취와 관련된 것들인데, 관수관급제설에 의하면 A-1·2·3은 과전 전조의 관수관급을, B-1·2는 전주에 의한 그것의 직접 수취를 말해 주는 것이라고 한다. 아울러 이러한 이해를 전제로 관수관급제설은 수조 방식의 변화를 상정하고 있다. 즉 고려 전기의 전시과 체제에서 관수관급의 형태로 수취되던 과전의 전조가 전시과가 무너지기 시작한 중기 이후로는 전주에 의해 직접 수취되었다는 것이다.0171)周藤吉之,<高麗朝より朝鮮初期に至る田制の改革>(≪東亞學≫3, 1940).
李佑成,<高麗의 永業田>(≪歷史學報≫28, 1965).
金泰永,<高麗兩班科田論>(≪朴性鳳敎授回甲紀念論叢≫, 1987).

그러나 이러한 이해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문제가 하나 있다. 다름 아니라 관수관급제설의 논리대로라면 중기의 말엽인 고종대 무렵에는 이미 전주에 의한 직접 수취의 방식이 상당히 정착되었을 것인데, 그러한 시기에 A-3과 같은 관수관급제의 사례가 보이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서 A-1·2·3의 내용을 다시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사실 A의 세 사료 중에서 A-2만이 관수관급을 시사하고 있을 뿐이고, 나머지는 전조의 수송에 지방관이 관여하고 있다거나(A-1), 과전 전조의 수송에 관의 漕運制가 활용되었음을(A-3) 알려 주는 정도이다. 따라서 A-1·3은 과전의 전조를 수취함에 있어서의 협력이라는 수준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하겠다. 전시과라는 국가적 토지 분급제를 실시하면서, 더구나 과전을 외방에 설치하였으므로 전주에 의한 과전전조의 직접 수취를 원칙으로 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정도의 관의 협력은 불가피한 것이었다고도 하겠다. 이렇게 볼 때 서긍이 A-2에서 官이 과전 전조를 수납하여 분급한 것처럼(及時輸納而均給之) 기술한 것도 조운으로 운송되어 온 과전의 전주가 문권을 가지고 찾아 간 사실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한다.

과전법에서와 마찬가지로 전시과의 과전에 대한 수조가 전주의 책임 아래 이루어졌음은 사료 B에 드러난 바와 같다. 고려 중기 이후만이 아니라 전기에도 그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B-3은 고려 전기의 전제, 즉 전시과 제도에 대한 설명으로 이해되는데, “과전의 전조가 전주의 뜻에 따라 잡물로도 징수될 수 있었다”고 한 점에서 전주에 의한 직접 수조의 사실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관수관급제의 근거라고 하는 A-1도 사실은 전주에 의한 직접 수취를 시사한다고 생각된다. A-1의 내용에 의하면 군인전의 전조를 수취한 것은 지방관이 아니다. 지방관의 임무는 단지 전조의 수송을 양호에게 독려하는 것 뿐이었다. 결국 군인전의 전조는 그 경작자의 대표격인 양호에 의해 군인에게 직접 납부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외방에 있는 군인전의 경우에는 수납 과정에서 국가적인 조운제가 활용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과전의 전조는 納租者가 전주에게 직납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물론 B-1·2가 전하는 바와 같이 전조의 수납을 위해 전주는 노복 등의 수조인을 파견하기도 했으나, 그들이 전조를 직접 받아 간 것은 아니며, 이 때에도 전조는 납조자인 전객이 납부하여야 했다. 수조인의 임무는 수조의 實額을 사정하고, 그 전조의 수취를 집행 감독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결국 전시과의 과전을 수급한 전주는 자신의 책임 아래 전조를 직접 수취하였으며, 국가는 지방관 또는 조운제를 통해 그들의 수조를 지원해 줌으로써 수조권의 행사를 보장해 주었던 것으로 이해된다.0172)李景植, 앞의 책, 124쪽.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전시과의 과전은 관직에 종사하거나 특정의 직역을 수행하는 계층에게 분급되었다. 따라서 과전은 먼저 관료·군인·한인 등의 국왕에 대한 충성의 대가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한 의미에서「祿」의 일종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녹」은 원래 현직자의 직무수행에 대한 보상으로 현물로 지급되어 녹봉이라 불리우지만, 과전은 관직 또는 직역에 종사하는 당사자 개인을 넘어 그 가계의 지속적인 유지를 위해 지급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과전은「世祿」으로 관념되기도 하였다.0173)≪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趙浚 3次上疏. 이처럼 과전의 분급은 관직 또는 직역 종사자에 대한 보상이라는 성격과 그들 가계의 지속적인 유지를 위한 기반이라는 성격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과전은 관직이나 직역에 종사하는 자에 대한 보상으로 지급되었던 것이므로 사망 등으로 인해 수급자의 奉供이 끝나게 되면 원칙적으로 국가에 반납하여야 했다. 그러나 다른 일면으로 수급자 가계의 지속적인 유지라는 기능도 갖고 있었기 때문에「回收와 再分給」이라는 절차를 거쳐 실제로는 유족, 즉 처자에게 전수되었다. “(전시과는) 자신이 죽으면 모두 국가에 반납하는데, 오직 府兵은 20세가 되어 비로소 전시과를 받고 60세가 되면 반납하되, 자손과 친척이 있으면 그 田丁을 遞立(連立)하고 없으면 監門衛에 소속시켰다가 70세가 된 이후에는 口分田을 지급하고 나머지 토지는 회수하며, 후손 없이 사망하거나 전사한 자의 처에게도 또한 모두 구분전을 지급한다”고 하는≪高麗史≫食貨志 國制의 서문이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 준다. 즉 전시과의 과전은 전정연립에 의해 자손에게 전수되거나 구분전의 형태로 70세 이상의 군인 또는 수급자의 처에게 계속 분급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전정연립과 구분전의 분급은 일정한 원칙에 의해 운영되었다. 먼저 전정연립은 첫째, 군인·향리 등 특정의 직역을 부담하는 有役人들의 과전을 대상으로, 둘째, 그들의 자손이나 친척이 있는 경우에 이루어졌는데, 셋째, 그 범위와 순서는 嫡子-嫡孫-同母弟-庶孫-女孫의 차례였다.0174)≪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戶婚 정종 12년 判. 여기서 유역인들의 과전은 嫡長의 자손을 우선으로 최소한 직역을 전수하는 단독전수가 일반적인 원칙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전정연립은 직역의 계승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전정연립의 순서는 곧 직역 계승의 순서이기도 하다. 전시과 과전(전정)의 이같은 적장자 우선의 단독전수는 원칙적으로 자녀 간에 분할상속되었던 사유지의 상속과는 전혀 상반된다. 사유지 뿐 아니라 당시에는 노비도 자녀 간에 분할상속되었다.0175)이에 대해서는<財産의 相續>(≪한국사≫15, 국사편찬위원회, 1994 간행예정) 참조. 이와 같이 재산의 분할상속이 관습화된 고려시대에 전정만이 단독전수된 데에는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다. 그것은 전시과의 과전(전정)이 사유재산이 아니라 직역에의 봉사를 전제로 한 분급수조지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이의 분할 전수를 용인한다면 국가는 직역을 부과하는데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국가는 과전의 사사로운 전수를 금하고, 반드시 관에 신고한 뒤에 전수할 수 있게 하였다.0176)≪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신우 14년 7월 諫官 李行 上疏. 전시과를 두고 ‘祖宗授田收田之法’이라고 설명한 것도0177)≪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趙浚 1次上疏. 그 같은 이유에서였다. 즉 전시과의 과전은 명분상 국가가 분급하고 회수하였다가 또 다시 재분급하는 그러한 성격의 토지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유역인들의 과전이 전정연립의 형태로 직역을 계승하는 자손에게 단독 전수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전정을 연립하는 시기는 직역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즉 앞서 소개한≪高麗史≫식화지 전제 서문의 설명과 같이 군인은 60세에, 元尹 이상 佐丞까지의 향직을 소유한 자는 70세에, 大丞 이상의 향직 소유자는 죽은 후에 자신의 전정을 자손에게 전수할 수 있었다.0178)≪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田柴科 현종 19년 5월. 그리고 무관의 과전 또한 유역인의 경우와 같이 전정연립의 원칙에 따라 전수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나,0179)위와 같음. 유역인들의 직역에 해당하는 무반 관직이 과연 세습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군인전·향리전 등 유역인들의 과전은 이처럼 전정연립의 이름 아래 직역의 계승을 전제로 자손에게 전수되었다. 그렇지만 양반관료, 특히 문관들의 과전인 양반전의 경우는 사정이 좀 달랐다. 과전을 받는 매개로서의 관직이 그대로 계승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반전의 연립을 명기한 규정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양반전도 실제로는 자손에게 전수되었다. 즉 양반전 또한 無期永代的 收租地인 영업전의 범주에 포함되었던 것이다.0180)武田幸男, 앞의 글. 이같은 사실은 “連立할 자손이 없는 6품 이하 7품 이상 관원의 처에게 구분전 8결을 지급한다”고 하는 문종 원년의 판문에0181)≪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田柴科. 잘 드러나 있다. 여기서 말하는「연립」의 구체적인 대상은 관원인 父祖의 과전, 즉 양반전일 수밖에 없다 하겠고, 따라서 위 판문의 내용은 양반전의 자손에의 전수가 일반적이었음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리고 “상장군 이홍숙은 죄를 짓고 유배갔으므로 그의 영업전을 처·자손에게 지급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 정종 7년의 문하성의 상주도0182)위와 같음. 그러한 사실을 시사해 준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이면에는 범죄가 아닌 그 밖의 경우, 예컨대 사망한 경우라면 이홍숙의 영업전(양반전)은0183)여기서의 永業田이 兩班田이라는 것은 이 門下省의 上奏가≪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田柴科에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어렵지 않게 짐작된다. 그의 처자에게 당연히 전수된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전시과 체제에서도 양반전은 처자에게 전수되고 있었다.0184)個人收租權을 질적·양적으로 제한하고 정비하는 방향에서 제정된 科田法에서조차 守信田·恤養田의 이름으로 처자에게 전수되었는데, 이러한 규정이 이에 이르러 비로소 마련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 이전의 전시과 체제에서도 어떠한 형식으로든 과전, 즉 양반전은 처자에게 전수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수되는 과전의 액수가 어느 정도였는가는 잘 알 수 없다. 추측컨대 과전법의 예에 비추어 볼 때 처와 자손이 모두 있는 경우는 처가 사망할 때까지 전액이, 자손만 있는 경우는 일부만이 전수되었을 것인데, 후자의 경우는 연령이나 出仕에 따른 별도의 기준이 마련되어 있었을 것이다.0185)李景植, 앞의 책, 154쪽.

한편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父의 양반전을 연립할 자손이 없는 6품 이하 관원의 처에게는 구분전이 지급되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만 구분전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들 외에 자손이나 친척 없이 70세에 이른 군인, 자식없이 사망한 군인의 처, 부모가 모두 죽고 남자 형제도 없이 아직 출가하지 않은 5품 이상 관원의 자녀 등도 5∼8결의 구분전을 받았다.0186)≪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田柴科 문종 원년·23년 判. 그런데 이들이 받은 구분전은 다름 아니라 자신이나 부친 또는 남편에게 주어졌던 과전의 일부였다. 즉 구분전을 지급한다고 해서 새로운 수조지를 분급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지급되었던 과전의 일부를 구분전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용익할 수 있도록 인정한 것에 불과하였다. “전정을 연립할 자손이나 친척이 없는 군인에게는 70세가 된 후에 구분전을 지급하고 나머지 토지는 회수한다”고 하는 식화지 전제의 서문이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 준다. 70세가 된 군인이 받은 구분전은 곧 자신이 받았던 군인전의 일부였던 것이다. 이처럼 과전과 구분전은 전혀 별개의 토지가 아닌 같은 토지의 양면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구분전의 지급대상은 모두 의지할 만한 남자 자손이 없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규모 또한 최소한의 생계를 위해 필요한 수입을 제공하는 정도, 즉 半丁 내외였다. 따라서 구분전은 恤養的인 기능을 갖고 있었다 하겠다. 여기서 휼양적 기능을 지닌 이 구분전과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양반구분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상정된다. 즉 양반구분전 또한 관원의 居京 생활에 필요한 양곡의 조달이라는 기능을 갖고 있었으며, 정확히 같은 것은 아니지만 6품 관원의 경우 그 규모 역시 대략 반정 수준이었던 것이다.0187)更定田柴科에서 6품 관원이 받는 田地額은 50∼45결 수준이었는데, 대략 科田額의 1/7 내지 1/8이 兩班口分田이었다고 이해되므로 6품관의 양반구분전은 6∼7결이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이렇게 볼 때 휼양을 위해 구분전으로 지급된 과전의 일부란 곧 경기에 설치되었던 양반구분전이거나, 또는 그 일부가 아니었을까 한다.

이처럼 일단 분급된 전시과의 과전은 비록 회수와 재분급이라는 의제적인 절차는 거쳤지만 그 전액 혹은 일부가 전정연립 또는 구분전의 이름으로 수급자의 자손이나 처에게 전수되었다. 즉 과전은 강한 世傳性을 지닌 분급 수조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앞서 소개한 이홍숙의 사례에서 짐작되는 바와 같이 수급자가 죄를 범하면 세전이 인정되지 않고0188)門下省의 上奏에도 불구하고 李洪叔의 경우는 왕의 特令으로 영업전(양반전)의 전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특령에 의한 예외적인 경우이고 일반적인 원칙은 아니었다. 곧바로 국가에 회수되었다. 이홍숙의 처자에게 그의 양반전을 전수시킬 수 없다고 주장한 문하성이 “모든 범죄자는 영업전을 받을 수 없다”고 한 舊法을 거론하고 있는 것과, “관리가 臨監하면서 스스로 도적질하거나 뇌물을 받고 법과 다르게 처리한 자는 職田을 회수하고 歸鄕시킨다”고 한 법제0189)≪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職制. 등은 모두 그러한 사실을 말한다. 그러나 몰수된 과전이 본인 또는 그의 처자에게 환급될 수도 있었다. 국왕의 사면으로 면죄되었을 경우이다. 그리고 이 때에는 몰수 이전의 과전이 그대로 지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몇몇 범죄의 경우를 제외하고 범죄로 인해 직전이 몰수된 자가 사면을 받으면 직전의 환급을 허락해 주라”는 내용의 현종 16년의 교지가0190)≪高麗史≫권 5, 世家 5, 현종 16년 12월. 이의 법적 근거라고 하겠으며, 앞서 인용한 바 있는 낭중 복장한의 경우가(A-3) 그 구체적인 사례라 하겠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전시과에서는 田地와 함께 柴地가 분급되었다. 그러나 전시과의 모든 수급자가 시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갱정전시과에 의하면 일반전시과의 제14과 이상에 배정된 양반관료, 武散階田柴와 別定田柴의 제1등급에 배치된 소수의 무산계 소지자 및 大德(僧人)들만이 시지를 받을 수 있었고, 이속과 군인·한인들은 그 지급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따라서 시지는 주로 양반관료에게 분급되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시지가 樵菜地, 즉 섶(薪)과 숯(炭) 등의 땔감을 조달하는 물적 기반으로서의 기능을 지녔음은 물론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시지는 居京者들의 식량 조달을 위한 물적 기반으로 이해되는 양반구분전과 유사한 성격을 지녔다고 하겠다. 이에 따라 시지는 수급자가 거주하는 개경 근처의 경기에 주로 설치되었다. 운송상의 편리를 고려해야만 했던 것이다. 시지로 설정된 지역이 2日程을 넘지 않은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국가가 분급한 것인 만큼 분급시지가 사유지일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것은 수조지로서의 과전과 같은 성격을 지닌 존재였다. 그러므로 타인의 이용을 금하는 독점 행위는 허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대개 이러한 분급시지는 민과의 공동이용을 전제로 한 無主空山, 곧 국유지에 설정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히려 양반관료는 그러한 공동이용을 매개로 섶·숯의 수취라는 분급시지에서의 권리를 실현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즉 양반 전주는 분급시지의 주변에 거주하는 농민에게 그것을 이용하게 하고 그 대가로 소정의 섶·숯을 수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0191)柴地의 운영에 관한 이러한 내용에 대해서는 李景植, 앞의 글 참조.

전시과의 전지, 즉 과전과 시지는 대체로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운영되었다. 그런데 전시과의 제도적인 모순과 그 동안 진전되어 온 농업생산력의 증대 및 농민층의 계층분화 등으로 인해 전시과 제도는 12세기 이후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그 위에 인종·의종대에 일어난 일련의 정치적 혼란, 특히 무신란을 계기로 한 통치질서의 문란은 이의 원만한 운영을 더욱 어렵게 하였다. 즉 권세가들은 타인의 민전(소유지)은 물론 수조지까지 탈점·겸병하여 농장을 형성함으로써 이른바「私田의 弊害」를 야기시켰던 것이다.0192)전시과 제도의 문란과 농장의 형성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농장의 성립과 그 구조>(≪한국사≫19, 국사편찬위원회, 1994 간행예정) 참조. 그렇다고 전시과 제도 자체가 없어지거나 완전히 기능을 상실하였다고는 할 수 없다.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문종 30년의 갱정전시과 규정이 마련된 이후 이의 개정이나 폐기를 알려 주는 기록은 보이지 않으며, 중·후기의 기사에서도 전시과 과전의 존재는 계속 찾아지고 있기 때문이다.「選軍給田」즉 군인전의 지급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양반구분전의 존재를 전해 주는 충목왕 원년의 도평의사사의 상언, 양반관료의 과전이 외방에 있었음을 말해 주는 고종 때 卜章漢의 사례 등은 모두 중·후기에도 양반전이 계속 지급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들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중·후기의 사회·경제적인 여건의 변화는 전시과 과전의 파행적인 운영을 초래하였다. 하나의 예로 이 시기에 이르러 전시과의 과전은 관에 신고되지 않은 채 자손에게 사사로이 전수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주로 직역을 계승하는 적장자에게 단독 전수토록 되어 있던 원칙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즉 자손 간에 분할 전수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현상은 전시과 토지에 대한 국가의 관리 및 운영 능력이 마비됨으로써 강한 세전성을 띠고 있던 양반전을 비롯한 분급 수조지가 祖業田의 이름으로 家産化되어 버린 현실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0193)李景植, 앞의 책, 161∼162쪽. 그리고 분급 수조지에 대한 국가 통치력의 약화는 마침내 하나의 토지에 5∼6명의 전주가 있게 되고 1년에 8∼9차례나 전조를 내야 하는 상황을 초래하기까지 하였다.0194)≪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趙浚 1次上疏. 이러한 현상은 외방에 설치된 과전의 경우에 더욱 심하였다. 이에 따라 여말의 사전개혁론자들은 과전의 외 방설치를 문제 삼았고, 결국 과전법을 제정할 때 과전을 경기에 한정시키는 원칙을 마련하였다. 이렇게 과전의 전액이 경기에 설정된 이상 종래의 양반구분전은 더 이상 존속할 수 없었다. 종전처럼 특별히 과전의 일부를 구분전이란 지목으로 떼어 내어 경기에 둘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외방의 과전과 경기의 양반구분전으로 이원화되어 있던 전시과의 과전은 과전법의 제정·시행으로 畿內의 과전으로 일원화되었고, 이와 함께 종래 양반구분전의 기능 또한 당연히 과전으로 흡수되었던 것이다. 시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전주에게 과전의 四標 안에 있는 閑荒地의 樵牧漁獵權을 인정해 주는 것으로 시지의 분급을 대신하였던 것이다.0195)李景植, 앞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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