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Ⅰ. 전시과 체제
  • 2. 공전·사전과 민전
  • 1) 공전과 사전
  • (2) 공전의 세 유형과 공전·사전의 지목

(2) 공전의 세 유형과 공전·사전의 지목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고려의 공전은 세 가지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용어였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 구분을 초월하여 당시의 공전은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되었다. 이른바 1과공전·2과공전·3과공전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와 관련하여≪高麗史≫食貨志 常平義倉條에 나오는 다음의 기록이 주목된다.

현종 14년 윤 9월에 判하기를, “무릇 여러 주현의 義倉法은 都田丁의 수에 의거하여 거두어 들이되 1科公田은 1결당 租 3斗를, 2科(公田) 및 宮院田·寺院田·兩班田은 租 2斗를, 3科(公田) 및 軍人戶丁·其人戶丁은 租 1斗씩을 내도록 이미 규정한 바 있으니, 혹 흉년을 만나 백성들이 굶주릴 때는 이것으로 위급함을 구제하였다가 가을에 이르러 환납토록 하되 남용되는 비용이 없도록 할 것이다”고 하였다(≪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常平義倉).

이 기록이 비록 義倉米의 징수를 위해 마련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징수의 대상이 되는 토지를 세 유형으로 분류하고 있어 각각의 토지 사이에는 어떠한 성격 차이가 내재해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시사해 주고 있다. 즉 의창미의 부담액에 차이를 보이고 있는 1과·2과·3과의 공전은 각각 성격을 달리하는 토지였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성격 차이를 토지의 비옥도나 수확량의 다소, 또는 그 경영형태의 차이였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만일 그렇다면 공전만이 아니라 모든 토지를 3과로 구분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성격 차이, 다시 말해서 공전을 세 유형으로 나누는 기준은 토지의 귀속 또는 토지 지배자의 차이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볼 때 1과공전은 왕실소유지이고, 2과공전은 관청소유지이며, 3과공전은 민전이었다고 여겨진다.0323)이 자료의 해석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표시하였는데 旗田巍, 앞의 글(1968b)과 姜晋哲, 앞의 책이 대표적인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우선 1과공전은 2·3과공전과는 달리 이에 비교될 수 있는 사전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王室御料地인 內庄田이었을 것이다. 이는 결당 가장 많은 의창미를 내도록 규정되어 있다는 사실, 즉 다른 토지에 비해 가장 많은 의창미를 부담해도 별다른 불만이 표출되지 않을 토지였다는 사실에서도 쉽게 짐작이 된다. 다음으로 2과공전은 이러한 1과공전과는 구별되면서도 궁원·사원·양반전 등의 사전에 비교될 수 있는 토지였으므로 중앙과 지방 관청의 부속지였던 공해전을 위시한 각종의 국·공유지가 이에 해당된다. 반면 3과공전은 국·공유지로서의 1·2과공전과는 구별되고 軍人戶丁(軍人田)·其人戶丁(其人田) 등에 비교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사유지로서의 민전을 말하는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결당 의창미를 가장 적게 부담한다는 사실도 3과공전의 실체가 민전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3과공전의 소유주는 의창미를 가장 적게 부담할 정도로 1·2과공전의 소유주인 국가나 왕실 또는 관청에 비해 경제적으로 열악하였다고 생각되는데, 일반민을 제외하고는 이에 해당하는 존재를 찾기 어렵다는 이해이다. 이 민전이 국가수조지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음은 물론이고, 바로 이 국가수조지라는 사실 때문에 사유지인 민전이 공전으로 표기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미 설명한 공전·사전의 개념에 입각하여 이들 세 유형의 공전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게 된다. 즉 1과 및 2과공전은 소유권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의 공전(국·공유지)일 뿐이지만, 3과공전은 소유권을 기준으로 하면 사전(사유지)이고 수조권의 귀속을 기준으로 하면 공전(국가수조지)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공전의 3과 구분이 고려 전시기에 걸쳐 지속되었던 것은 아니다. 늦어도 고려 말 특히 과전법 규정에 이르러 1과 및 2과공전은 3과공전에 흡수되어 국가수조지의 일부로서만 존재하게 되었다. 과전법 조항에 나오는 공전의 대부분이 수조지로서의 공전(국가수조지)의 의미로 쓰인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 그렇다고 1·2과공전을 구성하고 있던 왕실어료지나 공해전 등이 이 시기에 완전히 없어졌다고는 할 수 없다. 존속은 하였으되, 다만 1·2과공전으로 구분될 정도로 고려 전기에 지니고 있던 독자성은 상실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으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점들이 지적되고 있다. 먼저 왕실어료지 및 공해전 관련 기사가 전기에 편재해 있다는 점에서 미루어 짐작될 수 있는 바와 같이 1·2과공전의 비중이 전기에 비하여 감소하였다는 측면이 있다. 다음으로, 1·2과공전의 경영이 점차 佃戶制로 일원화되어 가는 추세에 있었다는 점 또한 이러한 변화의 요인으로 주목된다. 전기에 이들 토지는 전호제로 경영되기도 하고 직영제로 경작되기도 하였는데, 차츰 직영제형은 전호제형의 토지(수조지)로 바뀌어 갔고 과전법 단계에서는 전호제형이 일반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0324)이에 대해서는 旗田巍, 위의 글 참조.

그러면 이러한 세 유형의 공전에는 각각 어떠한 지목의 토지들이 있었는가. 우선 1과공전에는 왕실소유지로서의 內庄田(庄宅田)이 있었다. 이 토지는 왕실이 초기부터 소유하고 있던 것으로 내장택에서 이의 관리 및 운영을 담당하였다. 내장 및 동궁의 식읍에 쌓여 있는 곡식이 썩는 것을 걱정하는 태조 원년의 詔文에0325)≪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원년 6월 을축. 나오는 내장(전), 宮庄에 抽減된 泗州의 민전을 보상하는데 쓰인 공전0326)≪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經理 현종 13년 2월. 등이 바로 1과공전으로서의 내장전이다. 물론 이외에도 내장전에 포함될 수 있는 토지로 莊과 處가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 설명하는 바와 같이 장·처는 왕실의 소유지가 아니라 민전과 성격이 같은 토지로 보는 것이 타당하므로 여기에 포함시키기는 어렵다. 다음으로 2과공전에는 중앙 및 지방관청의 운영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마련된 公廨田과 官屯田, 특정 지역에 설치된 군사조직의 군량과 필요한 경비를 현지에서 조달할 목적으로 두어진 軍屯田, 각급 학교의 운영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중앙의 국자감과 지방 각 주현의 향학에 분속되어 있던 學田, 그리고 왕이 親耕을 실행함으로써 勸農의 모범을 보이고 그 산물로 神農·后稷의 제사를 모셨다는 籍田 등이 있었다. 그리고 3과공전에 속하는 것으로는 민전과 장·처가 있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민전은 국가 재정의 주된 수입원으로서 전국에 걸쳐 광범위하게 존재한 일반 民의 사유지였다. 그러나 모든 민전이 3과공전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민전 중 일부는 전시과 규정에 따라 관료를 비롯한 여러 직역 담당자에게 수조지로 분급되었기 때문이다. 즉 개인수조지도 있었던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바 있는 현종 14년의 의창미 수조규정에 구체적인 지목으로 등장하는 양반전·군인호정·기인호정 등의 실체가 바로 이 개인수조지인데, 이들 토지는 소유권을 기준으로 볼 때도 사전이고 수조권의 귀속을 기준으로 보아도 사전이므로 절대 공전으로 표기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민전 중 국가수조지만이 3과공전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러한 민전은 소유권을 기준으로 보면 비록 사전(사유지)이지만 수조권이 국가에 있었기 때문에 공전으로 표기될 수 있었다. 국가수조지로서의 민전 외에 장·처(전)도 3과공전에 해당되는 토지였다고 이해된다. 물론 이 장·처를 1과공전으로 보는 견해도 있기는 하지만, 그 성격이 민전과 등질적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3과공전으로 보는 견해가 타당할 것이다.0327)旗田巍는 이를 1科公田이라 하며(앞의 글, 1968b), 姜晋哲은 3科公田이라고 한다(앞의 책, 224∼235쪽). 한편 庄·處田을 2科公田으로 본 견해도 있다(朴鍾進,<高麗初 公田·私田의 性格에 대한 再檢討),≪韓國學報≫37, 1984). 즉 莊·處는 고려의 군현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촌락 단위의 왕실 直領이었으므로 군현제의 하부단위인 촌락과 동일한 촌락이었다는 등질성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장·처의 토지와 주민 또한 일반 군현의 민전 및 농민과 등질적인 존재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장·처는 그 곳 주민의 사유지로서 왕실에 조를 내는 수조지였다는 것이다. 결국 수조권이 왕실에 있었다는 점에서 공전으로 표기될 수 있으나, 왕실소유지로서의 내장전과는 달리 소유권이 왕실이 아닌 장·처의 민에게 있었으므로 1과공전이 아닌 3과공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장·처(전)가 3과공전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두말할 필요 없이 장·처의 대부분은 왕실수조지였지만 국왕의 施納이나 移給 등을 통해 궁원과 사원으로 이속된 것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처를 3과공전으로 볼 수 없음은 민전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즉 궁원과 사원의 장·처(전)는 소유권을 기준으로 볼 때도 사전(사유지)이고 수조권의 귀속을 기준으로 해도 사전(개인수조지:궁·사원수조지)이기 때문이다.0328)이 宮·寺院收租地로서의 庄·處도 3科公田으로 간주하고 있다(姜晋哲, 앞의 책, 160·229쪽).

여러 차례 언급하였지만, 고려의 사전은 사유지로서의 사전과 개인수조지로서의 사전이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쓰였으므로 그 구체적인 지목 또한 둘로 나누어 고찰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먼저 전자의 대표적인 지목으로는 민전을 들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민전은 주로 농민이 소유하고 경작하는 토지를 말한다. 관료를 비롯한 각종의 직역부담자들이 소유한 토지 역시 민전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민전은 조상으로부터 상속되어 온 것이기 때문에 흔히 祖業田·世業田·父祖田·父母田·家田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 밖의 매매·증여·개간 등을 통하여 새로 형성된 민전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민전의 대부분은 국가수조지로 편입되어 국가 재정의 주된 수입원이 되었으나, 일부는 전시과의 규정에 의해 개인수조지로 분급되기도 하였다. 민전만이 아니라 왕의 비빈 또는 왕족들의 궁원에 속한 궁원전도 사유지로서의 사전이었다. 玄化寺의 창건에 즈음하여 여러 궁원이 헌납한 田地가0329)<玄化寺碑 陰記>(≪朝鮮金石總覽≫上). 바로 이러한 사유지였을 것이다. 또 사찰이 오래 전부터 소유해 왔거나, 국왕·귀족 및 일반 백성들의 사유지로서 사찰에 시납·기진된 사원전도 이러한 사전이었다. 물론 똑같이 궁원전·사원전으로 불리었다고 하더라도 그 실체가 수조지였던 것으로 보이는 궁원·사원의 장·처는 궁·사원의 사유지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앞서 논의하였듯이 장·처 자체는 민전과 등질적인 토지였으므로 역시 사유지로서의 사전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수조지로서의 사전에는 매우 다양한 지목이 있었다. 이러한 사전은「名田」, 즉 수조권자의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에 따라 이름이 붙여지는 형식으로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위에서 인용한 바 있는 현종 14년의 의창미 수조규정에서 2·3과공전과 대비되어 쓰인 양반전·군인호정(군인전)·기인호정이 대표적인 수조지로서의 사전이었다. 양반전은 문·무반에 재직하고 있는 관료들에게 그 복무의 대가로 전시과 규정에 따라 지급한 것으로서 과전으로도 불리었으며, 군인전은 경군에 소속된 군인들에게 군역에 복무하는 대가로 지급한 토지였다. 그리고 기인전은 향리 중 선상하는 자에게 지급된 토지였는데, 기인 외의 다른 향리들에게도 향역의 대가로 향리전이 지급되었으므로 기인전은 넓게 보아 향리전에 포함되는 것이었다. 이 밖에도 5품 이상의 귀족 관료들의 특권적인 생활을 보장해 주기 위해서 지급된 공음전(兩班功蔭田柴), 주로 6품 이하의 하급 양반 및 군인의 유족에게 지급된 후생정책적 의미의 구분전, 6품 이하관의 자녀로서 未仕·未嫁인 閑人에게 지급된 한인전, 외국인이 귀화하였을 때 지급한 투화전, 왕족·공신·중신들에게 특별히 지급한 식읍 등이 있었다. 그리고 앞에서도 잠시 언급하였듯이 궁·사원전 중에서 사유지가 아닌 수조지로서의 장·처도 이러한 사전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와 같은 수조지로서의 여러 사전이 사유지로서의 민전 위에 설정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민전 위에 설정된 국가의 수조권이 각종의 명분으로 개인에게 양도되면서 다양한 수조지로서의 사전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수조지로서의 사전의 본질은 수조권의 소유일 뿐 해당 토지 자체의 소유권을 가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상에서 설명한 공전의 세 유형과 그 성격 및 공전·사전의 구체적인 지목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의<표 1>,<표 2>와 같다.

區 分 國·公有地로서의 公田 收租地로서의 公田
類 型 1 科 公 田 2 科 公 田 3 科 公 田
地 目 內 庄 田
(庄·處 除外)
公 廨 田·屯 田
學 田·籍 田
民 田(國家收租地)
庄·處(王室收租地)
所 有 權 者 王 室 國家·公共機關 주 로 農 民

<표 1>公田의 세 類型과 地目

區 分 私有地로서의 私田 收租地로서의 私田
地 目 民田, 宮院田, 寺院田(莊·處 除外),
莊·處(田)
兩班田·軍人田·鄕吏田(其人田)·功蔭田·
口分田·閑人田·投化田·食邑 등
所 有 權 者 一般 民, 宮院 및 寺院, 莊·處民 一般民

<표 2>私田의 地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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