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Ⅰ. 전시과 체제
  • 2. 공전·사전과 민전
  • 1) 공전과 사전
  • (4) 공전·사전의 수조율

(4) 공전·사전의 수조율

고려시대에는 보통「分半」「四分取一」「什一」등으로 표현되는 세 가지 수조율이 있었다.「분반」이 생산량의 1/2을,「사분취일」이 1/4을,「십일」이 1/10을 거두는 수조율이었음은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러면 이러한 세 가지 수조율은 각각 어떠한 성격의 토지에 적용되었는가.

그런데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고려시대의 공전은 직영제와 전호제에 따라 경영되었고, 사전은 자기경영과 전호제(소작제)에 의해 경작되었다. 직영제와 자기경영의 토지는 생산량의 전부를 토지 소유자가 확보하므로 수조율이 문제되지 않지만 전호제에 의해 경작되고 있던 공전(국·공유지)이나 사전(사유지)은 그렇지 않다. 수확의 얼마를 소작료로 징수할 것인가는 토지 소유자와 소작자 모두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 소작료는 借耕者가 소유자에게 내는 이른바 지대의 개념에 해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선 수조율이 개재될 수 있는 토지로 전호제형의 공전과 사전을 들 수 있다. 한편 이미 언급한 사실이지만 국가는 개인의 토지 사유를 인정하면서도 일정한 통제를 가하고 있었다. 동양적 왕토사상을 관념적 토대로 하여 사유지로서의 민전 위에 설정한 수조권이 그것이었다. 수조권을 설정한 이상 국가는 생산량의 얼마를 수취해야 하는가 하는 수조율도 규정해야만 했다. 이러한 수조율은 토지 소유자가 국가에 내는 地稅의 개념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수조율이 개재될 수 있는 또 하나의 토지로 사유지로서의 민전을 들 수 있겠다. 바로 이러한 성격을 지닌 세 토지, 즉 전호제로 경작되는 공전(국·공유지) 및 사전(사유지)과, 본질은 사유지이지만 국가에 의해 수조권이 설정되면서 수조지가 된 민전이 1/2·1/4·1/10의 수조율과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우선 전호제(소작제)로 경작되는 사유지에서의 수조율(소작료)은0362)私有地에서의 소작료를「租」라 부른 예는 處干의 실체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충렬왕 때의 소위 處干 기사(≪高麗史≫권 28, 世家 28, 충렬왕 4년 7월 을유)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한편 國·公有地에서의 소작료를「租」라 칭한 예는 광종 24년의 判文에서 쉽게 확인된다. 1/2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陳田을 개간한 자에게 사전인 경우 첫 해에는 수확의 전부를 주고 2년째부터 비로소 田主와 分半한다”고 한 광종 24년의 판문에0363)“光宗二十四年十二月判 陳田墾耕人 私田則初年所收全給 二年始與田主分半 公田限 三年全給 四年始依法收租” (≪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잘 나타나 있다. 이미 설명한 대로 여기에 나오는 사전은 사유지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개간된 사유지는 개간자를 전호로 하는 전호제에 의해 경작되었다고 이해되는데, 그 수조율(소작료)이 1/2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전호제로 경작되는 사유지에서의 수조율은 늦어도 고려 초기부터 1/2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이 이 시기에 비로소 만들어진 것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신라 말에도 귀족·호족들의 많은 사유지가 있었고, 그 일부는 전호제로 경작되었을 것이므로 소작료로서의 분반 수취 또한 존재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위 광종 24년의 판문은 그 이전부터 있어 온 분반수취의 관행을 재확인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광종 24년 이후에도 이러한 관행이 계속되었음은 물론이다. 역시 사유지 개간 때의 收租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지만 “3년 이상된 陳田을 개간할 경우 2년 동안은 수확의 전부를 개간자에게 주고 3년째 부터 田主와 分半한다”고 한 예종 6년의 판문에서도0364)≪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사전에서의 분반수취 원칙은 지켜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고려 때에는 관의 간섭없이 개간을 자유롭게 행할 수 있어서 세력있는 자들은 많은 토지를 개간하여 빈한한 농민들에게 빌려 주고 소출의 반을 거두었다”고 한 鄭道傳의 지적에서도0365)鄭道傳,≪三峯集≫권 7, 朝鮮經國典 上, 賦典 經理. 분반수취의 관행을 엿볼 수 있는데, 정도전이 말하는 이러한 상황은 특히 고려 말기의 경제적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사전에서의 분반수취, 즉 사전조율 1/2의 원칙은 사유지에서의 전호제 경영과 마찬가지로 고려 전시기에 걸쳐 존속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민전에 대한 국가의 수조율은 고려 초기부터 1/10이었다. 이는 고려 말 사전개혁을 주장하면서 올린 趙浚의 上書에 분명하게 밝혀져 있다. 조준에 의하면 태조는 즉위 직후 弓裔의 수취가 너무 가혹하였음을 개탄하고 什一租法에 따라 토지 1負當 3升의 租를 거두도록 하였다는 것이다.0366)≪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또 고려의 取民之制, 즉 조세 수취가 맹자가 말하는 십일조법에 부합하는 것이었다고 피력하고 있는 李齊賢의 策問에서도0367)李齊賢,≪益齋集≫권 9 하, 策問. 민전에서의 수조율이 1/10이었음은 다시 확인된다. 고려 초 뿐만이 아니라 중기에도 이 십일조 원칙은 지켜지고 있었다. 백성에 대한 수취를 가볍게 하여 비록 공전에서「什一」(1/10)을 거두어도 국가 재정이 넉넉하였음을 이야기하는 李奎報의<乙酉年大倉泥庫上樑文)0368)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19, 雜著, 乙酉年大倉泥庫上樑文.이 그 실례이다. 여기에 나오는「공전」이 국·공유지가 아닌 민전, 즉 국가수조지로서의 공전이라는 것은 이 곳에서 거두는 조세가 국가 재정의 근본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자명하다. 그리고 공민왕 11년에 密直提學 白文寶가 그의 箚子에서 “우리 나라의 전제는 漢나라의 限田制를 받아 들여 10분의 1만을 과세하였을 뿐이다”고0369)≪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밝히고 있는 사실에서 미루어 볼 때 고려 후기에도 십일조법이 여전히 시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과전법의 전조 수취규정 또한 이 십일조법에 입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민전에 대한 수조율은 태조 이래 말기까지 줄곧 1/10이었다고 이해된다. 그런데 민전에 대한 수조율이 1/10이었다고 할 때의 민전에는 국가수조지는 물론이려니와 양반전·군인전·향리전 등으로 불리는 각종의 개인수조지까지 포함된다. 개인수조지란 본래 국가수조지였던 것을 전시과 규정에 의거하여 개인에게 분급된 것에 불과하므로 양자 사이에 수조율의 차이가 생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국가수조지(공전)와 개인수조지(사전)의 수조율이 모두 1/10이었으므로 십일조를「공전조」또는「사전조」로 칭할 수는 없다.「민전조」라고 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와 같이 1/2은 전호제로 경작되는 사유지에서의 소작료였고, 1/10은 국 가 권력에 의해 수조권이 설정된 민전에서의 수조율이었으므로, 1/4은 자연히 전호제로 경영되는 국·공유지에서의 수조율(소작료)일 수밖에 없다. 이른바「四分取一」기록으로 불리는 성종 11년(992)의 판문이 그 유일한 근거이다. 즉 “公田에서의 조세는 1/4을 취하는데 水田은 상등전 1결에 租 2석 11두 2승 5합 5작, 중등전 1결에 租 2석 11두 2승 5합, 하등전 1결에 조 1석 11두 2승 5합으로 한다”0370)위와 같음.고 하였을 때의 공전의 실체는 국·공유지였던 것이다. 물론 여기서의 공전을 공전이라 부를 수 있는 또 다른 토지, 즉 국가수조지로서의 민전으로 볼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며, 사실 그러한 견해가 제시된 바 있다. 즉 “당시 대부분의 국·공유지는 직영제로 경영되었으므로 이에 대한 수조율을 특별히 설정할 필요가 없었고, 전호제로 경영되었던 일부 국·공유지에서 도 사유지의 경우와 같이 1/2의 수취가 이루어졌을 것이기 때문에 사분취일 기록에 나오는 공전의 실체는 국·공유지가 아닌 민전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민전(공전)에서의 수조율은 1/4이었으며, 이를 1/10로 기술하고 있는 고려 말 조준 상서의 내용은 신뢰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당시 전국 토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하등전(수전 기준)의 생산량은 ‘사분취일’ 기록에 의거할 때 약 7석이었으므로, 토지 1결의 생산량을 20석으로 상정하고 십일조법에 따라 1負에서 3升을 내도록 한 태조의 정책은 기만적인 가식이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고 하는 주장이0371)姜晋哲, 앞의 책, 389∼423쪽. 그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직영제보다 전호제에 의해 경영되는 국·공유지의 규모가 더 컸으며, 또 직영제 경영이 점차 전호제 경영으로 바뀌어 가는 추세에 있었다. 그러므로 전호제로 경영되는 국·공유지에서의 수조율 설정은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조준 외에 이규보·이제현·백문보 등도 민전에 대한 수취가 1/10이었음을 이야기하고 있고, 고려 초기에도 토지 1결의 생산량을 대략 20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의견이0372)金容燮,<高麗前期의 田品制>(≪韓㳓劤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 1981).
金載名,<高麗時代 什一租에 관한 一考察>(≪淸溪史學≫2, 精神文化硏究院 1985).
魏恩淑,<나말려초 농업생산력 발전과 그 주도세력>(≪釜大史學≫9, 1985).
제기되어 있는 이상 민전에서의 십일조 수취를 가공적·관념적인 것이었다고 돌려 버리기는 어렵다. 이처럼 민전(수지조로서의 공전)에서는 1/10의 수조가 행하여졌으므로 1/4의 수취를 규정하고 있는 성종 11년의 판문에 나오는 공전은 민전 이외에 공전으로 불리었던 또 다른 공전, 즉 국·공유지로 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실은 “州鎭屯田軍 1대에 토지 1결씩을 지급하여 (경작케 하고) 旱田 1결에서는 1석 9두 5승을 거두며 水田에서는 3석을 거두도록 한다”는 숙종 8년의 판문과0373)≪高麗史≫권 82, 志 36, 兵 2, 屯田. 비교해 볼 때도 충분히 짐작된다. 즉 이 둔전 기사에 나오는 둔전 수조액이 성종 11년의 공전조액에 매우 근접해 있는 것은「사분취일」기록에 보이는 공전이 둔전과 같은 성격의 토지, 즉 국·공유지였기 때문이었다고 여겨진다.0374)金載名, 앞의 글 참조. 그러면 어떠한 이유에서 국·공유지에서의 수조율(소작료)이 사유지의 그것에 비해 1/2밖에 되지 않았는가. 이것은 국·공유지가 공적인 토지였다는 점과 국가의 재정수입을 늘리기 위해 국·공유지의 개간을 더욱 장려할 필요가 있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사유지 소작료의 1/2밖에 안되는 낮은 수조율을 설정함으로써 국가는 보다 많은 농민들을 국·공유지의 개간에 끌어 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 보았듯이 민전에 대한 수조율(민전조)은 1/10이었고, 전호제로 경영되는 국·공유지의 소작료(공전조)는 1/4이었으며, 전호제로 경작되는 사유지에서의 소작료(사전조)는 1/2이었다. 그러므로 민전주가 자기의 토지를 소작으로 주었다고 가정할 때, 그는 소작 전호로부터 생산량의 1/2을 소작료(私田租)로 받아서 그 1/5(생산량의 1/10)을 수조권자인 국가나 개인에게 바치고 나머지 4/5(생산량의 2/5)만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金載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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