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Ⅰ. 전시과 체제
  • 2. 공전·사전과 민전
  • 2) 민전
  • (1) 민전의 소유자와 존재 시기 및 지역

(1) 민전의 소유자와 존재 시기 및 지역

고려시대에는 민전이라 불리는 토지가 있었다. 민전은 ‘民이 소유한 토지’, 즉 민의 사유지를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민의 범주, 다시 말해 민전을 소유하였던 계층은 매우 광범위하다.

우선 민전 관계 사료에0375)旗田巍,<高麗の民田について>(≪朝鮮學報≫48, 1968).
有井智德,<高麗朝における民田の所有關係について>(≪朝鮮史硏究會論文集≫8, 1971).
가장 많이 나타나는 민전 소유자로는 民·州民·平民 등으로 호칭되던 백정 농민층을 들 수 있다. 현종 13년 호부가 올린 奏文에 “民田을 抽減하여 宮庄에 소속시킴으로써 민이 征稅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고0376)≪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經理. 하였을 때의 민이나, 문종 13년(1059) 尙書戶部가 올린 주문에 “楊州 界內 見州 州民의 토지가 여러 차례의 수재를 당하여 비옥도가 같지 않다”고0377)위와 같음. 하였을 때의 주민, “權貴들은 민전을 탈점하고 奸氓(간사한 백성)들은 권세에 아부하여 부역을 면제받음으로써 각종의 徵斂이 행하여질 때 평민들만이 고통을 받았다”고0378)≪高麗史≫권 30, 世家 30, 충렬왕 3년·11년 정월 을유. 하였을 때의 평민과 간민의 실체는 모두 민전을 소유하면서 여러 가지 稅役을 부담하는 하층 농민 즉 백정 농민으로 파악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고려의 백정은 특정한 직역 부담은 없으나 조세를 비롯한 잡다한 세역을 부담하던 농민층이었다. 그러므로 민전의 소유는 관직이나 직역과는 무관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관직 또는 특정한 직역을 가지고 있던 계층, 예컨대 양반이나 향리도 민전을 소유하고 있었다. 물론 이들은 전시과 규정에 의해 국가로부터 양반전·향리전 등의 토지를 분급받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조지일 뿐이고 이것과는 성격이 다른 사유지로서의 민전도 소유하고 있었다. 姜邯贊이 軍戶에게 준 開寧縣 소재의 토지 12결이나,0379)≪高麗史≫권 94, 列傳 7, 姜邯贊. 李承休가 외가로부터 분여받은 토지 2頃,0380)李承休,≪動安居士集≫, 雜著, 葆光亭記. 정중부의 난 때 간신히 화를 면한 林椿이 湍州에서 買得하려던 토지,0381)林 椿,≪西河集≫권 4, 寄山人悟生書. 李奎報가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四可齋의 別業(별장)0382)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23, 記, 四可齋記. 등은 모두 양반의 민전이었다. 그리고 외방의 人吏가 신역을 피하기 위하여 권세가들에게 뇌물로 주었다는 所耕田은0383)≪高麗史≫권 85, 志 39, 刑法 2, 禁令 충렬왕 11년 3월. 향리가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의 민전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고려시대 田券의 하나로 유명한 高城의<三日浦埋香碑>는 민전을 소유하고 있는 양반과 백정의 존재를 한꺼번에 보여 주고 있어 주목된다.0384)黃壽永 編,≪韓國金石遺文≫(一志社, 1981), 134∼137쪽.
李蘭英 編,≪韓國金石文追補≫, 28쪽.
이를 토지제도와 관련시켜 살핀 연구로는 旗田巍,<新羅·高麗の田券>(≪史學雜誌≫79-3, 1970)과 金容燮,<高麗時期의 量田制>(≪東方學志≫16, 1975)이 주목된다.
즉 비의 건립에 즈음하여 자기의 토지(민전)를 시납한 通州副使 金用卿과 襄州副使 朴琠은 양반관료이며, 시납된 토지의 서쪽 四標로 등장하는 起畓(起耕地로서의 민전)의 주인 千達은 백정이었던 것이다.

한편 노비를 비롯한 천민층도 민전을 소유할 수 있었다. 고려 말 전제 개혁을 위해 올린 상서에서 조준은 “公私賤人이 差役될 때도 백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代田 1결에 대하여 免租의 혜택을 부여한다”는0385)≪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계획을 세웠었는 바, 이는 공·사천인 즉 노비도 토지(민전)를 소유하고 조세를 납부하고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라 하겠다. 또 특별한 예이겠지만 명종때의 私奴婢 平亮의 경우에서0386)≪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18년 5월 계축. 볼 수 있듯이 노비 중에는 농경에 힘써 거대한 재산을 축적하였던 자도 있었으므로, 이들이 매득을 통해 자기의 민전을 소유할 수 있었을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된다.

이처럼 위로는 양반관료에서부터 아래로 노비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한 계층이 민전을 소유하고 있었으므로 民田所有者(民田主)로서의 민의 범주는 국가의 지배를 받고 있는 전국민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민전의 주된 소유 계층은 역시 숫적으로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백정농민층이었을 것이다.

결국 민의 사유지로서의 민전은 고려 전시기에 걸쳐 존재하였다. 민전이 기록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은 앞에서 인용한 바 있는 현종 13년의 호부의 상주문이지만, 실제로 민전은 그 이전부터 존재하였다. 이미 신라시대에도 烟受有田·畓으로 불리던 농민의 사유지가 있었고, 弓裔의 暴斂으로 1頃에서 6석의 田租를 내다가 태조의 십일조 정책으로 2석만을 내게 된 토지와0387)≪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신우 14년 趙浚 上書. 陳田의 개간을 장려하는 광종 24년의 판문에0388)≪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나오는 사전은 민전과 성격이 꼭 같은 실체를 지닌 것이었다. 그리고 민전 기사는 현종 이후 고려 말은 물론 조선시대까지 간헐적이지만 계속 출현하고 있다. 사실 민전은 민의 사유지이기 때문에 비록 그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토지사유제가 인정되는 한 지속적으로 존재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한편 민전은 전국에 걸쳐 광범위하게 분포하였다. 국가 세수의 핵심을 이루던 하삼도는 물론 경기와 동북의 양계 지역에도 존재하였던 것이다. 우선 사료상으로 경상도의 泗州와 中牟縣, 양광도의 見州·槥城郡·南京, 경기의 臨津·臨江縣, 북계의 安北都護府 및 龜州·泰州·靈州·渭州·通海縣 등의 군현에서 민전의 실재를 확인할 수 있다.0389)旗田巍, 앞의 글(1968). 그러나 민전이 이들 군현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경상·양광·경기·북계의 나머지 군현은 물론이고 全羅·西海·交州道 및 東界 지역에도 민전은 존재하였다. 충목왕 3년 양광·전라·경상·서해·평양·강릉·교주도에 接廉存撫使를 파견하여 민전을 조사케 하였다는 사실이0390)≪高麗史≫권 37, 世家 37, 충목왕 3년 2월 신묘. 이를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일반 군현만이 아니라 특수 행정구역으로 분류되었던 鄕·部曲·莊·處 등에도 민전은 있었다. 향과 부곡에 민전이 실재하였다는 것은 이 곳 주민들이 농경을 통해 생활을 영위하고 국가에 조세와 역역을 부담하였다는 사실에서 충분히 짐작된다. 즉 국가의 恩免이나 災免 조치가 있을 때 향·부곡 또한 일반 군현과 동등하게 조세와 역역을 감면받고 있는 바,0391)≪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賑恤 恩免之制 숙종 3년·5년과 정종 2년·숙종 7년. 이는 곧 향·부곡민들의 민전 소유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장·처 토지의 본질이 일반 군현의 민전과등질적인 장·처민의 사유지였다고 이해되고 있는 이상0392)姜晋哲,≪高麗土地制度史硏究≫(高麗大學校出版部, 1980), 224∼235쪽. 장·처에도 민전은 존재하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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