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Ⅰ. 전시과 체제
  • 2. 공전·사전과 민전
  • 2) 민전
  • (2) 민전의 사유지적 성격-민전 소유권의 내용-

(2) 민전의 사유지적 성격-민전 소유권의 내용-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민전은 민이 소유한 사유지였다. 민전이 사유지였다는 점은 우선 그것이 매매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앞서 소개한 바도 있지만 정중부의 난 때 간신히 살아 남은 임춘이 단주에서 누적된 조세와 사채에 시달리고 있는 농민의 땅 즉 민전을 사려고 했던 이야기이라든지, 우왕 때 閑散軍으로 뽑힌 농민이 馬匹을 구하기 위해 경작 중인 땅까지 팔아야 했던 일0393)≪高麗史≫권 81, 志 35, 兵 1, 五軍. 등은 민전 매매의 좋은 사례이다. 물론 이 사례들은 모두 무신란 이 후의 사례이지만 그 이전에도 민전의 매매는 자유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원성왕의 능지 조성에 필요한 주변의 대지(민전)를 후한 가격으로 사들였다고 하는<崇福寺碑>의 내용이나,0394)<慶州崇福寺碑>(≪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 121쪽. 승려 入雲이 京租 100석으로 烏乎比所里의 公書·俊休 등 2인으로부터 14결의 토지를 사들였다는 내용의<開仙寺石燈記>0395)<開仙寺石燈記>(위의 책), 87쪽. 이 石燈記의 내용에 대해서는 旗田巍, 앞의 글(1970) 참조. 등을 통해 볼 때 토지(민전) 매매의 관행은 이미 신라 시대부터 있어 왔던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매매만이 아니라 민전은 전주의 의사에 따라 자유롭게 증여될 수 있었다. 그런데 증여는 개인에게 주는 경우와 기관 또는 집단에 기진하는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강감찬이 개령현의 토지 12결을 군호에게 증여한 일과 외방의 人吏가 역을 피하기 위해 귄세가에게 그의 경작전을 뇌물로 주었던 사례 등은 전자의 예이며, 靖宗 때 최제안이 天龍寺·地藏寺·道仙寺·西面山寺 등 토지를 시납한 일이나0396)≪三國遺事≫권 3, 塔像 4, 天龍寺. 충렬왕 때 이승휴가 看藏寺에 7∼8결의 토지를 寄進한 것은0397)李承休,≪動安居士集≫, 雜著, 看藏寺記·看藏庵重創記. 후자의 사례일 것이다. 이러한 증여 역시 신라시대 이래의 관행이었을 것임은 물론이다. 신라 말의 승려 智證이 자기의 사유지인 田莊 12區 500결을 安樂寺에 기증하였던 것은0398)<聞慶 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朝鮮金石總覽≫, 93쪽). 널리 알려진 사실이며, 남의 고용살이를 해서 얻은 자그마한 傭田을 法會에 시주한 大城의 사례도 있었다.0399)≪三國遺事≫권 5, 孝善 9, 大城孝二世父母.

민전의 사유지적 성격은 상속이라는 측면에서도 찾아진다.≪高麗史≫를 비롯한 각종 문헌에는 조업전·세업전·부조전·부모전 등으로 불리는 토지가 보이는데, 이것들은 모두 조상 대대로 세전되어 왔다는 의미에서 쓰인 민전의 다른 이름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慶尙道按廉使 呂克諲이 타인의 조업전과 農牛를 탈점함으로써 민이 생업을 잃게 되었다”고0400)≪高麗史≫권 135, 列傳 48, 신우 9년 3월. 하는 데서 쉽게 짐작된다. 즉 여극인이 타인의 조업전을 탈취한 결과 민이 생업을 잃게 되었다고 했으므로 탈점된 조업전의 주인은 바로 생업을 잃게 된 민이었다고 판단되는데, 민생의 바탕이 되는 조업전이란 다름 아닌 민전인 것이다. 이러한 조업전이 자손에게 상속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무릇 父祖田으로 文契가 없는 것은 嫡長子에게 우선 決給한다”고 하는 예종 17년의 판문에서0401)≪高麗史≫권 85, 志 39, 刑法 2, 訴訟. 분명하게 확인된다. 또 충렬왕 때 이승휴가 외가로부터 2경의 토지를 분여 받았던 것도 조업전 상속의 한 예일 것이다. 그리고 부모 사후에 남녀 동생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지 않아 당시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는 李之氐의 사례라든가,0402)≪高麗史≫권 95, 列傳 8, 李子淵 附 之氐. 재산 다툼으로 인한 형제 간의 불화를 염려하여 임종에 앞서 문계를 만들고 자녀들에게 가업을 균분시켰다는 尹宣佐의 이야기,0403)≪高麗史≫권 109, 列傳 23, 尹宣佐. 남동생과 누이 간에 가산을 다투는 소송에서 아버지가 남긴 문계의 숨은 의미를 찾아 내어 그 가산을 절반씩 나누어 주었다고 하는 孫抃의 사례0404)≪高麗史≫권 102, 列傳 15, 孫抃. 등도 조업전의 상속을 말해 주는 것으로 판단된다. 부모의 재산·가업·가산에 부모가 소유하였던 조업전(민전)이 포함되어 있을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0405)有井智德, 앞의 글.
崔在錫,<高麗時代 父母田의 子女均分相續再論>(≪韓國史硏究≫44, 1984).
한편 위에 든 몇 가지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러한 조업전의 상속은 모든 자녀를 대상으로 균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0406)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財産의 相續>(≪한국사≫15, 국사편찬위원회, 1994 간행예정) 참조.

이와 같이 민전은 매매·증여·상속이 행하여질 수 있는 개인의 사유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민전의 소유 규모에 특별한 제한이 가해지지 않았다. 따라서 세력 있는 자는 개간·탈점·매득 등을 통해 대토지소유자가 될 수 있는 반면에, 가난한 농민은 그나마 가지고 있던 소규모의 민전도 권세가에게 팔거나 빼앗기고 그들의 토지를 借耕하는 소작농으로 전락할 수 있었다. 민전의 개간과 점유가 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이루어질 수 있어서 유력자들은 광대한 토지를 차지할 수 있으나 힘없는 농민은 소작에 종사할 수밖에 없는 것이 고려 전제의 문제라고 하는 정도전의 지적이0407)鄭道傳,≪三峯集≫권 7, 朝鮮經國典 上, 賦典 經理. 이러한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시기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고 또 예외적인 경우도 있겠지만 대개의 경우 귀족층이나 지방의 토호층은 장대한 토지(민전)를 소유하였고, 일반 농민층이나 천민층은 소규모의 토지(민전)를 소유하는데 불과하였을 것이다. 즉 12전장 500결의 토지를 사찰에 희사한 지증의 예에서 보듯이 나말려초 이래 몇몇 대귀족과 대호족 중에는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이를 전장으로 경영하는 자가 적지 않았으며, 나머지 귀족과 호족들도 중·소규모의 토지소유자로 존재하였다. 반면에 일반 농민층은 중농의 경우라도 충렬왕 때의 伊里干 설치 기사에서0408)≪高麗史≫권 82, 志 36, 兵 2, 站驛 충렬왕 5년 6월. 짐작되듯이 4결 정도가 소유의 표준 규모였던 것 같으며, 대개의 경우는 數畝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이해된다.0409)金容燮, 앞의 글. 권세가들과 일반 농민층 사이의 이와 같은 민전 소유 규모의 차이는 고려 중기 이후 농장이 발달하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고 이해되고 있지만, 그 이전부터 있어 왔던 현상이었다고 여겨진다. 광종 24년의 개간 장려 판문과 예종 연간의 일련의 기사에0410)≪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예종 6년·권 79, 志 33, 食貨 2, 農桑 예종 3년. 자주 보이는 사전(私有地:民田) 전호의 존재가 이를 잘 말해 준다. 이들 사전 전호의 대부분은 곧 일반 농민층으로서 소유한 민전이 전혀 없거나 있다 하더라도 아주 작은 규모에 불과하였던 사람들이었으며, 반면 이들에게 소작을 준 전주는 대부분 규모가 큰 토지(민전)를 소유한 권세가들이었을 것이다. 물론 민전 소유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양극적 현상이 고려 전기의 일반적인 사정이었는가의 여부는 현재로서는 불명확하지만 나말려초 이래의 상황과 전호의 존재를 고려할 때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었던 것 만큼은 사실인 듯싶다. 한편 민전은 사유지였던 만큼 국가 권력에 의해 법적으로 그 소유권을 보호받고 있었다. 민전의 소유권에 대한 국가의 법적인 보호는 量案의 작성을 통해 구현되었다. 신라시대 이래로 국가는 민전을 비롯한 전국의 각종 토지에 대하여 量田을 실시하고 量田帳籍·量田都帳·田籍·都田帳 등으로 불리는 양안을 작성하였는데, 여기에는 토지의 소유주는 물론 田品·量尺數·結數·四標 및 陳起 여부 등이 기재되었다.0411)量田 및 量案에 대해서는 金容燮, 앞의 글 참조. 이러한 양전 실시와 양안 작성은 조세 수취의 대상이 되는 토지와 인물을 정확히 파악하는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었겠지만, 이와 함께 민전주의 소유권도 보호할 수 있었다. 즉 민전에 대한 소유권 분쟁이 발생하였을 때 양안이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일례로 고려 후기의 경우이지만 권세가들이 賜牌를 빙자하여 민전을 탈취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 국가는 탈취된 민전의 “주인이 전적에 올라 있다”는 점을 들어 원래의 소유주에게 돌려 주도록 조치하고 있었다.0412)≪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經理 충렬왕 11년 3월. 민전의 소유권은 양안에서 뿐 아니라 각종의 금령을 통해서도 국가의 보호를 받았다. 즉 국가는 타인의 토지(민전)를 주인 몰래 경작하거나 매매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이를 위반하는 자는 처벌하였던 것이다.0413)≪高麗史≫권 85, 志 39, 刑法 2, 禁令. 또 국가의 필요에 의해 민전을 수용해야 할 경우에도 적절하게 보상해 줌으로써 그 소유권을 보호하였다. 비록 신라 때의 예이기는 하지만 元聖王의 능지로 민전을 편입시키면서 국가는 넉넉히 보상하였으며, 현종 때에는 宮庄으로 추감된 민전을 공전(국·공유지)으로 보상하기도 하였다.0414)≪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經理 철종 13년 2월.

이와 같이 고려의 민전은 매매·증여·상속 등의 권리가 자유롭게 행사되고 소유 규모에 있어서도 특별한 제한을 받지 않았으며, 소유권 또한 다양한 형태로 국가의 보호를 받은 토지였지만, 근대적-로마법적인 배타적 소유권이 보장된 토지였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민전에는 국가권력에 의해 설정된 수조권이라는 또 하나의 권리가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조권은 “넓은 하늘 아래 왕의 토지가 아닌 것이 없다”는 동양적 왕토사상을 토대로 출현한 것으로, 해당 토지(민전)에서 소정의 조세를 거둘 수 있는 국가적인 권리였다. 당시 소유권이 개인에게 있었던 민전을 비롯한 모든 사유지 위에는 이 수조권이 설정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민전의 소유권자인 민전주들은 일단 국가에 소정의 조세를 납부할 의무를 지니게 되었다. 양전의 실시와 양안의 작성도 이 수조권 행사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즉 양안에 민전주의 성명을 기록함으로써 그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보호해 주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그를 조세부담자로 지정함으로써 확실하고도 안정적인 조세 수취를 도모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국가는 민전에 설정된 이러한 수조권을 두 가지 방향으로 운용하였다. 국가가 직접 수조권을 행사하여 국가 재정에 필요한 조세를 국고로 거두어 들이는 것이 그 하나인데, 이 경우 민전은 이른바 국가수조지가 된다. 대부분의 민전이 여기에 해당되었다. 그리고 이 수조권을 양반관료 및 각종의 직역담당자들에게 양도하는 것이 나머지 하나인데, 이 때의 민전은 소위 개인수조지가 된다. 전시과나 과전법 규정에 따라 분급된 각종 地目의 대부분의 토지, 예컨대 양반과전·군인전·향리전 등으로 불리는 토지의 실체는 바로 이 개인수조지로서의 민전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국가는 민전에 설정된 수조권을 행사하여 재정을 운영하고 관료 및 직역부담자들의 보수를 지급할 수 있었으므로 수조권은 국가의 입장에서 매우 중시될 수밖에 없었다. 본질이 사유지임에도 불구하고 국가수조지로서의 민전을 공전으로 간주하였던 것도0415)소위 義倉米收租規定으로 불리는 현종 14년의 判文(≪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常平義倉)에 나오는 3과공전의 실체가 國家收租地로서의 민전을 가리킨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는 旗田巍,<高麗の公田>(≪史學雜誌≫77-4, 1968) 참조. 바로 이 때문이다. 즉 민전에서의 개인 소유권을 인정하고는 있었지만, 국가의 입장에서는 그 곳에서 조세를 거둘 수 있는 수조권이 더 중요하였으므로 수조권을 국가가 가지고 있는 한 그 민전은 국가의 지배 하에 있는 공적인 토지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반면 수조권이 개인에게 주어진 민전은 사적인 토지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이유에서 본래 국·공유지를 지칭하던「공전」이 국가수조지인 민전을 가리킬 때도 쓰였으며, 사유지를 의미하던「사전」이 개인수조지인 민전의 뜻으로도 사용되었던 것이다.0416)이에 대해서는 李成茂,<公田·私田·民田의 槪念>(≪韓㳓劤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 1981) 및 이 책 제I편 2장 1절<公田과 私田>참조. 결국 민전을 기준으로 본다면 수조권이 국가에 있는 민전(국가수조지)은 공전이며, 개인에게 주어진 민전(개인수조지)은 사전이었던 것이다. 수조권에 대한 이러한 국가의 강한 집념은 마침내, “佃客(民田主)은 그의 所耕田(민전)을 마음대로 매매 또는 양도할 수 없으며, 전객의 死亡·移徙·惰農 등으로 인하여 수조를 실현할 수 없을 경우에는 전주(수조권자)가 임의로 처분할 수 있다”는 내용의 과전법 규정을0417)≪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것은 고려 말 이후에나 해당되었던 규정이겠지만, 수조권을 통한 토지(민전) 지배에 국가가 얼마나 깊은 관심을 두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좋은 예이며, 이전의 전시과 체제에서도 이와 유사한 형태의 소유권 제한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한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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