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Ⅰ. 전시과 체제
  • 2. 공전·사전과 민전
  • 2) 민전
  • (3) 민전의 경영형태와 조세 수취

(3) 민전의 경영형태와 조세 수취

민전은 민의 사유지일 뿐 아니라 그의 경작지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흔히 민전은 所耕田·耕作田·執耕田·耕田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0418)有井智德, 앞의 글 및 李成茂, 앞의 글 참조. 이러한 민전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경영되었다. 자기경영과 전호제 경영이 그것이다. 자기경영은 파종에서 수확까지의 전 생산과정에 민전주가 직접 참여하는 대신 생산물을 모두 자기가 차지하는 경작형태를 말하는데, 민전주와 그 가족의 노동력만으로 경작하는 순수 자기경영과 소유 노비나 雇工의 노동력을 동원하여 경작하는 직영형 자기경영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반면 전호제 경영은 자기의 토지를 남에게 빌려 주어 경작시키고 그 대가로 생산량의 일정한 비율을 수취하는 경영형태를 말하는데, 소작제라고도 한다.

이러한 두 가지 경영형태 중에서 자기경영, 그 가운데서도 순수 자기경영이 민전 경영의 주류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정 농민이 민전의 주된 소유계층이었다는 점, 다시 말해서 백정 농민이 소유한 민전이 민전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리라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 준다. 비록 예외적인 경우는 있더라도 이들 백정 농민이 소유한 민전은 대부분 소규모에 불과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소유자 자신과 그 가족의 노동력만으로도 충분히 경작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당시 모든 민전의 소유 규모가 소규모였던 것은 아니다. 민전 중에는 중앙의 양반관료를 비롯하여 富民·豪右·民長 등으로 불리었던 지방 유력자들의 토지도 적지 않게 있었는데, 지방 관아의 재정이 곤궁할 때 부면에게서 도움을 받은 사실을0419)≪高麗圖經≫권 3, 城邑. 고려하면 이들의 소유 토지는 비교적 규모가 컸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같이 규모가 큰 유력자들의 민전은 가족노동력만으로 경작될 수 없었으므로 자연히 소유 노비나 고공의 노동력을 동원한 직영형 자기경영을 택하게 되었을 것이다. 특히 관직에 나가는 것을 본분으로 하고 있던 양반 관료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였을 것이다. 金富儀의 家僮이 채마밭을 경작하다가 銅印을 주웠다는 일화나,0420)≪高麗史≫권 97, 列傳 10, 金富佾 附 富儀. 이규보의 가노가 정원의 풀베기에 자주 나섰다는 이야기,0421)≪東國李相國集≫권 23, 記, 草堂理小園記. 李需의 노비가 토란을 재배하였던 일0422)李奎報,≪東國李相國集≫後集 권 7, 古律詩, 次韻李侍郎見和五首子以七首答之. 등은 노비가 주인의 민전을 경작한 적극적인 예는 아니지만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음을 시사하는 좋은 사례이다. 그리고 “집안이 가난하여 스스로는 살아 갈 수 없어 남의 집 고용이 되었다”는 충렬왕 때의 기사에서0423)≪高麗史≫권 31, 世家 31, 충렬왕 20년 7월 을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고공을 통해 민전을 경작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이 기록이 고려 후기의 실정을 말해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민전의「傭作」은 그 이전에도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부자집의 고용살이를 해서 자그마한 토지를 마련했다는 大城의 사례에서 보듯이 고공의 존재는 이미 신라 때부터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소규모로 존재할 대부분의 민전은 순수자기경영의 형태로 경작되었으며, 가족노동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규모의 일부 민전은 노비나 고공의 노동력에 의지하여 경작되었지만, 가족 및 소유 노비와 고공의 노동력만으로는 도저히 경작할 수 없는 대규모의 민전도 적지 않았다. 중앙 귀족층과 지방 토호층의 민전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즉 이들은 이미 신라 말부터 대규모의 토지를 소유하여 왔고, 소유 규모에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았으므로 개간이나 매득 등을 통해 자신의 민전을 더욱 확대시킬 수 있었다. 특히 중기 이후로는 국가 통치력의 균열에 편승, 불법적인 탈점까지 자행하여 소위 대규모의 농장을 형성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반면에 생계 유지가 곤란할 정도의 소규모의 토지를 소유·경작함으로써 오히려 가족노동력이 남아 도는 백정 농민도 적지 않았고, 토지가 없는 농민도 상당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토지를 자유롭게 매매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약한 많은 백정농민들은 그나마 소유하던 소규모의 민전조차 처분함으로써 점차 토지가 없는 농민으로 전락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각종의 재해와 부채가 이를 더욱 촉진시켰을 것이다. 단주에서 임춘이 사려던 토지도 조세에 시달리던 농민의 민전이었으며, 마필을 구입하기 위해 팔았던 閑散軍의 토지 또한 이들 농민의 민전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여분의 토지를 가진 대토지소유자(귀족 및 토호층)가 여유 노동력을 가진 백정 농민에게 소작을 주는 전호제 경영이 자연스럽게 전개될 수 있었다. 이처럼 전호제 경영은 대토지소유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귀족 및 토호층에 의한 대토지사유가 급속히 진전된 신라 하대부터 전호제 경영 또한 널리 보급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소위 田莊이라 불리는 대토지는 주로 知莊의 관리 하에 소작제로 경영되었다고 이해되고 있다.0424)姜晋哲, 앞의 책, 15∼16쪽.
李炳熙,<高麗前期 寺院田의 分給과 經營>(≪韓國史論≫18, 1988).
고려 전기에 와서도 민전의 전호제 경영은 계속되었으며, 국가의 공인을 받기까지 하였다. 사전(민전) 개간지에서의 분반수취를 규정하고 있는 광종 24년과 예종 6년의 판문이0425)≪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이를 잘 말해 준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는 국·공유지에도 전호제 경영이 도입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외거노비에게 내장전을 경작시키고 납세케 했다는 태조의 조치가0426)≪高麗史≫권 93, 列傳 6, 崔承老. 그 실례이다. 따라서 전호제 경영은 신라 말 이래 계속 확대되는 추세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특히 대규모의 농장이 발달하였던 중기 이후에 민전의 전호제 경영은 더욱 일반화되었다.0427)이에 대해서는<農莊의 發達과 그 構造>(≪한국사≫19, 국사편찬위원회, 1994 간행예정) 참조. 고려 후기의 이러한 실정을 정도전은 “힘이 센 자들은 광대하게 토지를 소유하였고 약한 자들은 그들에게 빌붙어 토지를 차경하고 소출의 반을 나누었다”고0428)鄭道傳,≪三峯集≫권 7, 朝鮮經國典 上, 賦典 經理. 설명하고 있다. 한편 전호제로 경영되는 민전의 전호는 대부분 일반 백정농민이었겠지만, 외거노비인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金永寬의 가노로서 농경에 힘써 치부하였다는 平亮은0429)≪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18년 5월 계축. 주인인 김영관이나 타인의 민전을 경작하던 전호였을 것이며,0430)姜音哲, 앞의 책, 219∼220쪽.
洪承基,≪高麗貴族社會와 奴婢≫(一潮閣, 1983), 103∼106쪽.
이규보의 別業인 四可齋에 거주하던 노비들도0431)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23, 記, 四可齋記. 주인의 별업을 佃作하던 외거노비로 판단된다. 이 밖에도 당시에는 개경 근처에 별업을 가지고 있던 양반관료들이 많았는데, 이들의 별업 또한 이규보의 경우와 같이 자신의 외거노비를 전호로 하여 운영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0432)洪承基, 앞의 책, 96∼102쪽. 그리고 고려 전기에 이들 전호 중에는 자신의 민전이 전혀 없는 농민도 더러 있었겠으나, 적으나마 자기 소유의 민전을 가지고 부족한 자작지를 보충하기 위해 타인의 민전을 소작하는 영세한 자소작 농민이 보다 많았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0433)濱中昇,<高麗前期の小作制とその條件>(≪歷史學硏究≫507, 1982). 물론 농장의 발달로 대토지소유가 확대되던 고려 후기에는 많은 자소작 농민들이 자신의 민전을 잃고 토지가 없는 농민으로 전락하면서 순수 소작농이 증가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전호제로 경영되는 민전의 경우 전호는 당연히 민전주에게 소정의 소작료를 내야 했다. 私田租라 부르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0434)民田(私有地)에서의 小作料을「租」라 칭한 예는 “處干은 타인의 토지를 경작하여 租는 그 주인에게 내고 庸과 調는 官에 바치니 즉 佃戶이다”고 하는 기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高麗史≫권 28, 世家 28, 충렬왕 4년 7월 을유). 그리고 그 소작료는 “陳田을 개간한 자는 사전인 경우 첫 해에는 수확의 전부를 차지하고 2년 째부터 비로소 田主와 分半한다”고 규정한 광종 24년의 판문에서 알 수 있듯이「분반」즉 생산량의 1/2이었다. 여기서의 사전이 주로 사유지로서의 민전을 가리키고 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개간된 민전은 일단 개간자를 전호로 하는 전호제에 의해 경작되었고 그 소작료는 1/2이었다고 이해되는데, 개간지만이 아니라 起耕地도 그러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전호제에 의해 경작되는 민전에서의 수조율(소작료)은 고려 초기부터 1/2이었다. 그러나「사전조 1/2」이라는 원칙이 이 때에 이르러 비로소 마련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앞에서도 설명하였듯이 이미 신라 하대부터 귀족 및 호족들에 의한 대토지소유가 발달하였고 이와 함께 전호제 경영 또한 시행되고 있었으므로 생산량의 1/2을 소작료로 내는 관행 역시 존재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광종 24년의 판문은 그 이전부터 있어 온「분반수취」의 관행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재확인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광종 이후에도 이러한 관행은 계속되었다. 역시 사전(민전) 개간 때의 수조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지만 “3년 이상된 陳田을 개간할 경우 2년 동안은 수확의 전부를 개간자에게 주고 3년 째부터는 田主와 分半한다”고 규정한 예종 6년의 판문에서도 민전에서의 분반수취 원칙은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앞서 소개한 정도전의 설명이나, “前朝(고려)의 폐단이 조선 초까지 남아 있어 품관·향리들이 광대하게 토지를 차지하고 유망민을 불러 모아 병작반수하고 있다”고 개탄한 河崙의 啓文0435)≪太宗實錄≫권 12, 태종 6년 11월 기묘. 등을 고려할 때 고려 말까지도「사전조 1/2」의 원칙이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전호제로 경영되는 민전에서의 분반수취, 즉 사전조 1/2의 원칙은 신라 말 이래 고려 전시기에 걸쳐 존속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소작료(사전조)는 토지이용자인 소작인이 빌린 토지의 기능(土地用益)의 대가로서 토지소유자인 민전주에게 지불하는 이른바「地代」에 해당하는 것이었다.0436)旗田巍, 앞의 글(1968b).
姜晋哲,<高麗前期의 ‘地代’에 대하여>(≪韓國中世土地所有硏究≫, 一潮閣, 1989).

한편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국가 권력은 동양적 왕토사상을 토대로 모든 민전 위에 수조권을 설정하고 소정의 조세를 수취하였다. 국가가 거두는 이 조세는 경영형태와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민전의 소유자인 민전주가 부담하였는데, 그 수조율은 고려 초기부터 1/10이었다. 이른바「什一租法」이라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 말에 사전 개혁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던 조준의 상서에 분명하게 밝혀져 있다. 조준에 의하면, 태조는 즉위 직후 궁예의 수취가 너무 가혹하였음을 개탄하고 십일조법에 따라 토지(민전) 1負當 3升의 租를 거두도록 하였다는 것이다.0437)≪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뿐만 아니라 고려의 取民之制는 孟子가 말하는 십일조법에 부합하는 것으로 이를 시행한 지가 이미 400년이나 넘었다고 한 이제현의 지적도0438)李齊賢,≪益齋集≫권 9 下, 策問. 민전에서의 1/10 수취가 이미 고려 초부터 시행되었음을 말해 준다. 태조가 천명한 십일조법은 중기를 거쳐 말기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대원칙으로 줄곧 유지되었다. “백성에 대한 수취를 가볍게 하여 비록 공전에서 1/10을 거두어도 국가 재정이 넉넉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는 고종 12년의 이규보의<大倉泥庫上樑文>과,0439)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19, 雜著, 乙酉年大倉泥庫上樑文. “우리 나라의 전제는 한나라의 限田制를 받아 들여 10분의 1만을 과세하였을 뿐이다”고 밝히고 있는 공민왕 11년의 백문보의 箚子0440)≪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등에서도 십일조법이 실제로 시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과전법의 전조 수취규정 또한 십일조법에 입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민전에 대한 국가의 수조율은 태조 이래 말기까지 줄곧 1/10이었다고 이해된다. 국가수조지에서 뿐 아니라 양반전·군인전·향리전 등으로 불리는 개인수조지인 민전에서의 수조율도 1/10이었다. 개인수조지란 본래 국가수조지였던 것이 전시과 규정에 따라 개인에게 분급된 것에 불과하므로 양자 사이에 수조율의 차이가 생길 리 없기 때문이다. 이 십일조는「地稅」의 개념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이해와는 전혀 달리 민전에 대한 국가의 수조율이 1/4이었다고 하는 견해가0441)姜晋哲,<高麗前期의 公田·私田과 그 差率收租에 대하여>(≪歷史學報≫29, 1965).
―――, 앞의 책, 389∼423쪽.
일찍이 제기되어 있어 주목을 끈다. 이러한 주장이 근거로 삼고 있는 유일한 사료는 “公田에서의 조세는 1/4을 거두는데 水田은 상등전 1결에 조 2석 11두 2승 5합 5작, 중등전 1결에 조 2석 11두 2승 5합, 하등전 1결에 조 1석 11두 2승 5합으로 한다”고 한 성종 11년의 판문으로,0442)≪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그 논지는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즉 첫째, 위 판문에 나오는 공전의 실체는 국·공유지가 아니라 민전이다. 왜냐하면 당시 대부분의 국·공유지는 직영제로 경영되었으므로 특별히 수조율을 설정할 필요가 없으며, 전호제로 경작되었던 일부 국·공유지에서는 사유지에서와 같이 1/2의 수취가 이루어졌으므로 1/4의 수조율이 적용될 수 있는 것은 3과공전으로 분류되는 민전밖에 없기 때문이다. 둘째, 따라서 고려 초기 민전의 수조율을 1/10로 기술하고 있는 조준 상서문의 내용은 믿기 어렵다. 당시 전국 토지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던 하등전의 생산량은 위 판문에 의거할 때 수전을 기준으로 약 7석에 불과한데, 1결의 생산량을 20석으로 상정하고 십일조법에 따라 1負에서 3升을 내도록 한 태조의 정책은 기만적인 가식으로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고려 초기의 토지 1결당 생산량은 도저히 20석일 수 없으므로 태조가 표방했다는 십일조법은 가공적·관념적인 것에 불과하며, 오히려 결당 생산량을 7석으로 설정하고「四分取一法」을 적용하여 결당 약 2석을 수취토록 한 성종의 정책이 현실적인 것이었다. 셋째, 그러다가 원 간섭기를 전후하여 1/4에서 1/10로 낮아졌는데, 이는 국가의 재정 수입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취해진 불가피한 조처였다. 즉 농장이 급속히 발달하면서 많은 농민이 농장에 투탁하였으므로 이를 막기 위해서는 세율을 낮출 필요가 있었으며, 점차 증대해 온 토지의 생산력이 이러한 조치를 가능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서 재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우선 첫째, 고려시대의 국·공유지는 직영제로 경영되기도 하고 전호제로 경영되기도 하였는데, 전호제로 경영된 것의 규모가 더 크며, 직영제 경영이 점차 전호제 경영으로 바뀌어 가는 추세에 있었다.0443)이 책 제1편 2장 1절<공전과 사전>참조. 뿐만 아니라 광종 24년의 개간 장려 판문에 전호제로 경작되는 사전(민전)의 소작료는「분반」으로 명기하고 있으면서도 공전(국·공유지)의 소작료는 “법에 따라 수조한다”고만0444)≪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기술하고 있는 바, 이것은 국·공유지에서의 소작료(수조율)가 분반이 아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호제로 경영되는 국·공유지에서의 수조율 설정은 필요한 것이었다. 다음으로 둘째,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이 조준 외에 이제현과 이규보도 고려 초·중기에 십일조법이 시행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고, 고려 초기에도 토지 1결의 생산량을 대략 20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의견이 제기되어0445)金容燮,<高麗前期의 田品制>(≪韓㳓劤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 1981).
金載名,<高麗時代 什一租에 관한 一考察>(≪淸溪史學≫2, 1985).
魏恩淑,<나말려초 농업생산력 발전과 그 주도세력>(≪釜大史學≫9, 1985).
있는 이상, 민전에 대한 1/10 수취는 고려 초부터 실재하였으며 또 현실적인 것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셋째, 원 간섭기를 전후하여 1/4에서 1/10로의 세율 변동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기록을 찾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당시의 상황에서 그러한 수조율 인하가 과연 가능하였겠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 시기는 권세가들의 토지 겸병과 조세 포탈로 인해 창고가 비고 관리의 녹봉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못하는 등 만성적인 재정 궁핍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이러한 실정에서 국가수입의 주 원천인 조세를 인하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민전에서의 수조율은 고려 초기부터 말기까지 줄곧 1/10이었다고 생각되며, 소위 성종 11년 관문에 나오는 ‘公田租 四分取一’은 민전 외에 공전으로 불릴 수 있는 또 다른 토지, 즉 국·공유지에서의 수조율을 가리키는 것이었다고 이해된다.0446)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이 책 제Ⅱ편 1장<조세>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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