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Ⅰ. 전시과 체제
  • 3. 공전의 여러 유형
  • 1) 장·처와 내장전
  • (1) 장과 처

(1) 장과 처

고려시대에는「莊」·「處」라는 일종의 장원이 있었는데, 이것은 주로 왕실 재정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었다. 태조가 즉위 전부터 가지고 있었거나 아니면 궁예로부터 물려 받은 內莊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0463)≪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원년 6월 을축 詔書. 보아 장은 이미 고려 초기부터 존재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360개의 장·처가 料物庫에 소속되어 있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창왕의 즉위 교서라든지 趙仁沃의 상소로부터0464)≪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신우 14년 6월 辛昌 敎·7월 趙仁沃 上疏. 장이 고려 말까지 존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처는 그 기원이 분명하지 않다. 몽고와의 전란 이후 왕실의 재정이 궁핍하여지자 그 타개책의 일환으로 충렬왕 때에 나타났다고 하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0465)李相瑄,<高麗時代의 莊·處에 대한 再考>(≪震檀學報≫64, 1987).
論旨는 다르지만 이를 고려 중기 이후로 보는 견해도 있다(旗田巍,<高麗時代の王室の莊園-莊·處->,≪歷史學硏究≫246, 1960).
장과 같이 고려 초기부터 존재하였을 것으로 보는 입장도 있다.0466)姜晋哲,≪高麗土地制度史硏究≫(高麗大出版部, 1980), 224쪽.
朴宗基,≪高麗時代部曲制硏究≫(서울大出版部, 1990), 163쪽.
한편≪世宗實錄地理志≫와≪新增東國輿地勝覽≫에 수록된 장·처 기록을 분석해 볼 때0467)이에 대해서는 旗田巍, 앞의 글 및 李相瑄, 앞의 글 참조. 장·처는 양계 지역을 제외한 전국에 분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경기와 충청·황해도 지역에 집중적으로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은 이들 지역이 개경에서 멀지 않아 관리하기에 편리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장·처 특히 장은 신라의 녹읍과 계통을 같이하는 것으로, 나말려초의 군소 호족을 통제하는 과정에서 호족의 지배 아래에 있던 촌의 일부가 장으로 편입되면서 형성되었다고 이해되고 있다. 그러므로 장·처는 단순한 면적 단위의 장원이 아니라 촌락이라는 지역적 행정구역을 단위로 하는 토지 지배의 객체였으며, 당시의 행정조직인 군현제도의 일환으로 편성된 것이었다. 장·처가 군현제도의 일환으로 존재하였다는 것은 그것이 鄕·部曲·所 등과 같이 州郡이 될 수 없는 곳에 설치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라든지,0468)≪新增東國輿地勝覽≫권 7, 驪州牧 古跡 登神莊. 장·처의 향리에게도 유수·주·부·군·현의 향리와 마찬가지로 외역전을 지급해야 할 것을 계획한 고려 말 조준의 전제개혁론0469)≪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우왕 14년 7월 趙浚 1次 上書. 등에서 우선 확인되고 있다. 즉 장·처의 위치가 일반 군현과 같은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는 것이다. 또 조선시대에 들어와 향·소·부곡 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폐지되거나 군현에 흡수되었다는 사실도0470)旗田巍, 앞의 글 참조.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특히 장·처가 현으로 승격하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은 이를 더욱 극명하게 반영한다고 하겠다. 충렬왕 10년(1284)에 龍山處가 富原縣으로 승격하였다든지,0471)≪世宗實錄地理志≫京畿 高陽縣. 공민왕 5년에 迷原莊이 迷原縣으로 승격되었던 것0472)≪新增東國輿地勝覽≫권 8, 京畿 楊根郡. 등이 그 좋은 예이다. 한편 장·처의 본질이 촌락이었다는 것은 고려 때의 장·처가 조선시대에 村·直村·里 등으로 변천해 갔다거나, 今勿村處·古等村處 등과 같이 처의 명칭에「村」이 들어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에서0473)이에 대해서는 旗田巍, 앞의 글 참조. 충분히 짐작된다. 이 같은 두 가지 사실은 본래 촌락이던 한 지역이 고려 때 장 또는 처로 되었다가, 조선시대의 군현제 재정비 과정에서 군현이나 촌·리 등으로 재편되어 갔던 그 간의 사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장·처는 단수 또는 복수의 촌락으로 형성된 하나의 지역을 의미하였다.

한편 이 장·처에도 일반 군현과 마찬가지로 姓을 같이하는 하나 또는 여러 개의 氏姓集團이 있었다.≪世宗實錄地理志≫≪新增東國輿地勝覽≫에 보이는 장·처의 土姓·續姓·來姓·亡姓의 존재가 바로 그것이다. 공민왕 때에 현으로 승격된 迷元(原)莊에 普虛의 친척들이 모여 살았다는 사실도0474)≪高麗史≫권 38, 世家 38, 공민왕 원년 5월 기축. 이를 시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장·처의 주민은 강한 혈족적 유대, 즉 공동체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국가나 왕실은 이러한 혈족적 유대를 이용하여 장·처를 통치하고 관리하였다. 이 곳의 제반 업무를 실제로 담당한「吏」또한 본래는 이 같은 혈족집단의 수장이거나 간부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장·처에 거주하는 주민은 대부분 농경에 종사하였는데, 장의 거주자는 莊戶 또는 莊丁으로 불리었다. 따라서 이들은 일반 군현의 백정농민에 비견되는 존재로서 신분적으로는 양인이었다고 판단된다. 즉 이들은 백정과 마찬가지로 성씨를 가진 경우가 많았고, 조세와 요역을 부담하였으며, 장정은 明經業·書業·算業·律業의 監試에도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생활에 있어서는 일반 군현민에 비해 차별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위의 과거시험에서 장정이 백정의 경우보다 불리한 조건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 하나의 예라 하겠다. 명경업 감시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백정에게는≪周易≫≪尙書≫≪毛詩≫≪禮記≫≪春秋≫에서 9机로 고시하였음에 반하여 장정은 12机로 고시하였던 것이다.0475)≪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1 인종 14년 11일 判. 향·소·부곡 등의 吏와 함께 장·처의 吏가 일반 군현의 吏와 구별되어 취급된 것도0476)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朴宗基, 앞의 책, 32∼42쪽 참조. 장과 처, 결국 장·처의 주민이 군현민에 비하여 차별적인 대우를 받았다는 것을 상징한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하였지만 이와 같은 장·처는 기본적으로 왕실에 소속되어 왕실재정의 근간을 이루었다. “料物庫 소속의 360개의 장·처 중 선대에 사원으로 施納한 것은 모두 환원시키라”는 창왕의 교서나, “360개의 장과 처의 토지는 공상을 받들기 위한 것이다”고 하는 조인옥의 상소,0477)≪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고려 때 에는 장과 처로 불리는 것이 있었는데, 여러 궁전과 사원 및 내장택에 분속되어 조세를 부담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는≪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0478)≪新增東國輿地勝覽≫권 7, 驪州牧 古跡 登神莊. 등이 이를 잘 말해 준다. 내장택과 요물고는 각각 고려 전기와 후기에 왕실 재정을 주관한 관청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러나≪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왕실 외에 궁원과 사원에도 이러한 장·처가 있었다. 이 외에도 궁원 소속의 장호들이 과중한 요역에 시달리고 있음을 걱정한 현종 20년(1029)의 교지에서0479)≪高麗史≫권 5, 世家 5, 현종 20년 9월 을해. 궁원에 장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상당수의 왕실 장·처가 사원에 시납되었음을 전하는 앞에서 언급한 창왕의 교서를 통해 사원에 소속된 장·처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궁원·사원의 장·처는 대체로 사급이나 시납에 의해 왕실의 장·처가 이관된 것들이었다고 추측된다.

이렇게 장·처가 비록 왕실을 비롯한 궁원·사원에 소속되어 있기는 하였지만, 그 토지(莊·處田)의 소유권이 왕실이나 궁원·사원에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장·처전의 본질은 왕실의 소유지가 아니라 수조지였다고 판단된다. 이와 관련하여 비록 고려 말의 자료이기는 하지만 전제개혁을 위한 하나의 시도로서 제기된 조인옥의 상소가0480)≪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주목된다. 그에 의하면 조종의 토지분급제는 대체로 천지·종묘의 제사용으로 쓰일 籍田, 공상용의 장·처전, 사대부용의 전시·구분전, 일반 국역자(주로 향리)용의 외역전, 그리고 4만 2천의 병사를 위한 군전 등의 다섯 가지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장·처전은 국가적인 토지분급 체계 내에서 국가의 재정운용 원칙과 관련하여 운영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때의 토지분급(分田)이 수조지의 분급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선대에 사원으로 시납된 장·처전을 요물고로 환수시킨 창왕 교서의 장·처전 역시 수조지를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만일 그것이 소유지였다면 국가가 마음대로 그 이전을 강제하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왕실의 장·처전이 수조지였으므로 궁원과 사원의 장·처전 역시 수조지였다고 이해된다. 문종 때 왕의 명으로 興王寺에 이전된 景昌院의 田柴,0481)≪高麗史≫권 8, 世家 8, 문종 12년 7월 기묘. 호부의 조치로 萬齡殿으로 분급된 흥왕사 토지의0482)≪高麗史≫권 9, 世家 9, 문종 34년 3월 임신. 실체는 모두 수조지로서의 장·처전이었다고 생각된다. 왕의 명이나 호부의 조치로 귀속처가 바뀌는 토지였다면 궁원이나 사원의 사유지일 까닭이 없고, 사유지가 아닌 토지로 중원과 사원에 소속되어 있었다면 장·처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0483)이에 대해서는 姜晋哲, 앞의 책, 229∼232쪽. 따라서 결국 장·처전의 소유자는 주로 장·처의 주민이었다고 여겨진다. 바꿔 말해서 장·처전은 장·처민의 민전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장·처전이 넓은 의미의 내장에 포함되기는 하겠지만, 왕실소유지로서의 내장전(순수내장전)과는 일단 구분해서 이해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장·처전의 본질적인 성격이 수조지로서의 민전이었으므로 이것을 소유한 장·처의 주민은 생산량의 1/10을 田租로 소속처에 부담하였다.≪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莊과 處가 여러 궁전·사원 및 내장택에 분속되어 세를 바쳤다”고 하였을 때의「稅」의 실체는 다름 아닌 전조였을 것이다. 이들은 전조 뿐 아니라 요역도 왕실과 궁·사원에 부담하였다. 과중한 요역에 시달리는 궁원 소속의 장호를 구휼하는 문제에 殿中省이 나서고 있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보여 준다. 즉 장호의 요역 문제에 호부를 제쳐 두고 왕족 관계의 일을 관장하던 전중성(宗簿寺)이 관여한 것은 장호의 요역이 궁원과 관계된 사안, 즉 궁원에 귀속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0484)旗田巍, 앞의 글 참조. 이는 궁원에 소속된 장·처의 경우이지만 왕실과 사원 소속의 장·처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소속처에 관계없이 수조지로서의 민전이라는 莊과 處의 본질은 같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장·처전은 그 본질에 있어서는 일반 군현의 민전과 다를 것이 없었으나, 전조와 요역을 수취할 권리가 국가나 개인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왕실이나 궁원·사원에게 주어진 토지였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일 뿐이었다. 즉 조세와 요역의 귀속처만이 달랐던 것이다. 따라서 장·처전을 1과공전으로 보기 보다는 3과공전으로 파악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0485)旗田巍는 이를 王室御料地 안에 포함시켜 1科公田으로 보았으며(<高麗の公田>,≪史學雜誌≫77-4, 1968), 姜晋哲은 3科公田으로 파악하였다(앞의 책, 224∼235쪽). 이 밖에 이를 2科公田으로 분석한 주장도 있으며(朴鍾進,<高麗初 公田·私田의 性格에 대한 재검토>,≪韓國學報≫37, 1984), 莊과 處가 형성된 시기와 성격은 전혀 다르다고 보고 莊은 1科公田이며 處는 3科公田이었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李相瑄, 앞의 글). 국가수조지인 일반 군현의 민전이 3과공전인 이상, 이와 등질적인 성격의 장·처전을 1과공전으로 보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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