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Ⅰ. 전시과 체제
  • 3. 공전의 여러 유형
  • 1) 장·처와 내장전
  • (2) 내장전

(2) 내장전

고려의 왕실은 전국에 걸쳐 광대한 御料地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 어료지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촌락을 단위로 한 수조지로서의 장·처였다. 그러나 왕실어료지에는 장·처와는 본질적으로 성격을 달리하는 토지, 즉 왕실이 소유권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경영하는 면적 단위의 소유지도 있었다. 이러한 면적단위의 왕실소유지와 장·처를 모두 장 또는 내장으로 표현한 듯하여(넓은 의미의 내장전) 어료지의 실체 파악에 적지 않은 혼란을 초래하기도 하지만, 양자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른 만큼 구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흔히 내장전은 면적을 단위로 하는 왕실소유지에 한정시켜 쓰고 있다(좁은 의미의 내장전:순수내장전).0486)姜晋哲, 앞의 책, 192·250∼251쪽.

이러한 內莊(庄)田은 고려 초부터 있었다. “일부 노비를 제외한 대다수의 궁중 노비를 궁 밖으로 내보내 토지를 경작하여 조세를 내게 하였다”는 태조의 조치가0487)≪高麗史≫권 93, 列傳 6, 崔承老. 이를 잘 말해 준다.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여기서 궁중 노비로 하여금 경작케 한 토지의 실체는 내장전이었다고 이해된다. 한편 희종이 당시의 권신 崔忠獻에게 내장전 100결을 하사하였다는 사실로0488)≪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미루어 보아 적어도 고려 중기까지 내장전이 존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의「내장전」이 수조지로서의 장·처전이 아닌 순수 내장전이라는 것은 그 규모를 100결이라는 면적으로 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짐작된다. 그런데 이후로는 내장전 관계 기록이 거의 보이지 않으므로 언제까지 존속하였는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국초부터 내장전과 함께 내장택에 소속되어 왕실의 재정을 지탱하였던 장·처전이 고려 말까지 요물고 소속으로 존속하였던 것으로 보아 내장전 역시 고려 말까지 남아 있었다고 추측된다. 물론 대몽 항쟁 직후 전기의 내장전은 소멸되고 이를 대신하여 내장전과 같은 성격을 지닌 處가 등장하였다고 보는 견해가0489)李相瑄, 앞의 글. 있기는 하지만, 처의 형성 시기와 그 성격에 대한 이해에 적지 않은 이론이 있으므로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이와 같이 내장전은 왕실의 소유지였으므로 장·처전과는 달리 왕실이 주체적으로 경영을 담당하였는데, 당시 내장전을 비롯한 국·공유지를 경영하는 방식에는 佃戶制와 直營制의 두 가지가 있었다. 전호제란 소유 주체가 소유지를 타인에게 소작시키고 소정의 租(소작료)를 수취하는 것이며, 직영제는 소속 노비나 주변 농민의 요역을 동원하여 소유지를 경작하여 그 수확을 모두 확보하는 경영형태이다. 내장전의 경우 이 두 가지 경영형태가 모두 채택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전호제가 보다 우세한 경영형태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우선 내장전의 전호제 경영은 다음의 두 기록에서 확인된다.

A. 태조께서는 內屬奴婢로 宮에 남아서 供役할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는 궁 밖으로 나가 살게 하고 토지를 경작하여 세를 바치게 하셨다(≪高麗史≫권 93, 列傳 6, 崔承老).

B. 근래 주현의 관원들이 宮院·朝家田만을 사람들로 하여금 경작케 하고(令人耕種) 군인전은 비록 비옥한 땅이라도 경작하기를 힘써 권장하지 않으며 또 養戶로 하여금 식량을 수송케 하지 않음으로써 이로 인해 군인이 추위에 굶주려 흩어져 버리니 지금부터는 군인전에 우선적으로 佃戶를 정해주도록 하라(≪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農桑 예종 3년 2월 制).

A에서 태조의 조치로 갑자기 궁 밖으로 나온 노비(外居奴婢)가 자기 소유의 토지를 가졌을 리 없기 때문에 그들이 경작한 토지는 태조의 내장전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노비들이 내장전을 경작하고 바친「稅」의 실체는 소작료(地代)였다고 판단된다. 결국 사료 A는 태조의 내장전이 왕궁의 외거노비를 전호로 하는 전호제로 경영되었음을 입증한다고 하겠다. 한편 B는 궁원전과 조가전이 전호제로 경영되었음을 알려 주는 것으로 이해되는데,0490)이를 宮院·朝家田에서의 직영제 경영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이해한 견해도 있지만(李佑成,<高麗의 永業田>,≪歷史學報≫28, 1965 및 姜晋哲, 앞의 책, 237∼238쪽) 이는 오해이며, 이 기록은 오히려 그 곳에서의 佃戶制 경영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濱中昇,<高麗田柴科の一考察>,≪東洋學報≫63-1·2, 1981). 朝家는 왕실·조정·관가 등의 뜻을 지닌 용어이므로 왕실소유지인 내장전도 조가전의 범주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0491)姜晋哲, 앞의 책, 238·253쪽. 따라서 사료 B 역시 내장전에서의 전호제 경영을 시사하는 하나의 예라 하겠다. 반면 내장전에서의 직영제 경영을 직접적으로 말해 주는 기록은 찾아지지 않는다. 다만 A에 나오는 내장전이 태조의 조치 이전에 직영제로 경영되었으리라는 것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아울러 태조의 조치로 모든 내장전의 경영이 직영제에서 전호제로 바뀌었다고 할 수는 없으므로, 이후에도 내장전의 일부가 여전히 직영제로 경영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러나 사료 A와 B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직영제에서 전호제로의 전환이 내장전 경영의 대체적인 추세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내장전이 직영제로 경영될 때에는 수확량을 모두 왕실이 차지하므로 조세 수취가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전호제로 경영되는 내장전에서는 수확량의 얼마를 조(소작료)로 징수할 것인가가 문제되는데, 그 수조율은 1/4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1/4은 전호제로 경영되는 국·공유지에서의 수조율(소작 료)이었다고 이해되는데,0492)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 책 제2편 1장<조세>참조. 내장전 역시 왕실에 소유권이 있는 1과공전으로0493)旗田巍, 앞의 글(1968). 국·공유지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金載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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