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Ⅰ. 전시과 체제
  • 3. 공전의 여러 유형
  • 3) 둔전과 학전·적전
  • (2) 학전과 적전

(2) 학전과 적전

정치적 이념으로서 유교를 숭상한 고려는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설립하여 주로 양반자제들에게 유학을 교육하고 과거를 통해 그들을 관료로 선발하였다. 중앙의 國子監과 지방의 鄕校가 그것인데, 이들 관립학교의 운영경비를 조달하기 위한 재원으로 설정된 토지를 흔히 學田이라고 부른다. 태조가 서경에 학교를 설치하고 양곡 100석을 내려 學寶를 만들게 한 것이0582)≪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태조 13년. 학교에 대한 재정 지원의 시작이기는 하였지만, 그 곳에 토지를 지급한 것은 성종대의 일이다. 즉 성종 8년(989)에 “스승과 학생을 널리 모으고 학교에 田庄을 주어 학업을 익히게 하겠다”는 뜻을 피력하고,0583)≪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8년 4월 임술. 동 11년에는 교지를 내려 유사로 하여금 마땅한 곳을 골라 널리 書齋와 學舍를 운영하고 전장을 지급하도록 하였던 것이다.0584)≪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여기서 말하는 서재와 학사는 대체로 지방에 설치된 향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지방 향교에 토지를 지급하였던 만큼 중앙의 국자감에도 당연히 소정의 토지를 분급하였을 것이다. 이후 중앙과 지방의 학전은 대체로 고려 말까지 유지되었던 것 같다. 成均館·東西學堂 및 鄕校에 소속된 전토와 인구 중에서 豪强에게 겸병된 것을 가려내도록 조치한 공민왕 12년(1363)의 교지에서0585)위와 같음. 학전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학전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다만 우왕 때 養賢庫의 토지로서 延安府에 있던 것이 100여 결이었다는 사실만이 알려지고 있을 뿐이다.0586)≪高麗史≫권 122, 列傳 35, 宦者 李得芬. 한편 권세가들의 농장 확대가 극에 달했던 고려 후기에는 학전도 그들의 탈점 대상이 되었다. 앞서 소개한 공민왕 12년의 교지와, 연안부에 있던 양현고전을 탈점한 睦仁吉·李得芬의 사례가0587)위와 같음. 그 실례라 하겠다.

이와 같이 중앙과 지방의 학교에는 고려 전시기에 걸쳐 적지 않은 규모의 학전이 지급되었으나, 그것이 어떠한 성격의 토지였으며, 어떻게 운영되었는지를 알려 주는 기록은 찾아 보기 어렵다. 다만 학교도 하나의 국가기관으로 인식될 수 있는 만큼 학전 또한 일종의 공해전이었다고 하겠으며, 따라서 그 실체는 국·공유지로서 2과공전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0588)姜晋哲, 앞의 책, 208쪽. 그리고 이의 경영형태와 관련해서는 “국학의 운영비가 너무 많이 들어 민폐가 심하다는 숙종 7년(1102)의 邵台輔 上奏文을0589)≪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예로 들어 직영제로 경작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즉 국학의 운영비가 민폐의 원인이 된 것은 국자감 학전의 확대로 인해 관노비만으로는 이를 모두 경작할 수 없어서 주변의 농민들을 강제로 징발·동원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0590)姜晋哲, 앞의 책, 250쪽. 관계 기록이 매우 적은 현재로서는 일단 이러한 해석도 주목할 만하다 하겠다. 그런데≪高麗史≫百官志 養賢庫條에 나오는 다음의 기록은 국자감 학전이 전호제로 경영되는 국·공유지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養賢庫:예종 14년에 判官 1명을 두고 丙科 權務로 보임하였다. 고종 30년에 4명을 증원하였는데, 2명은 庫 소속의 토지가 있는 곳에 파견하여 권농과 조세 수송을 맡게 하였고 2명은 庫에 남아 수납을 관리하게 하였다(≪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諸司都監各色 養賢庫).

여기서 말하는 庫 소속의 토지란 곧 국자감의 학전을 가리킨다고 하겠는데, 이 학전 소재지에 파견된 양현고 관원이 조세 수송(輸稅)의 직무를 수행하였다면, 이는 곧 국자감 학전의 전호제 경영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학전이 민전 위에 설정된 수조지가 아닌 이상 관의 조세 수송, 결국 조세 수취가 행해지는 경우는 전호제로 경영되는 국·공유지 뿐이기 때문이다. 학전에서의 이러한 조세 수취, 즉 학전의 전호제 경영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는 현재로서는 잘 알 수 없다. 다만 내장전이나 공해전의 경우에0591)이에 대해서는 이 책 제I편 3장 1절<장·처와 내장전>및 2절<공해전>참조. 비추어 볼 때, 학전도 성립 초기의 한동안은 직영제형과 전호제형이 함께 있었다가 곧 전호제 형태로 일원화되어 갔을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籍田은 왕이 親耕을 실행함으로써 권농의 모범을 보이고, 그 곳에서 얻어지는 산물로 神農·后稷의 제사를 모셨다는 토지이다. 고려에서는 성종 2년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는데,0592)≪高麗史≫권 62, 志 16, 禮 4, 성종 2년 정월 을해. 그 규모는 잘 알 수 없다. 다만 조선시대의 경우 東西籍田을 합하여 약 400결이었다는 사실이 참고될 뿐이다.0593)≪太宗實錄≫권 27, 태종 14년 4월 계축. 그런데 이 적전에서의 왕의 친경은 의례적인 것이고, 실제로 적전은 농민이나 노비 등에 의해 경작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어떠한 형태로 경영되었는지를 알려 주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의 경우 적전은 그 곳에 배속된 공노비나 인근에 거주하는 농민의 요역을 동원하여 경작하는 직영제 형태로 경영되었으므로0594)有井智德,≪朝鮮初期における公的土地所有として公田>(≪朝鮮學報≫74, 1975). 고려 때에도 그러하였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金載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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