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Ⅰ. 전시과 체제
  • 4. 사전의 여러 유형
  • 1) 양반과전
  • (1) 양반과전의 실체

(1) 양반과전의 실체

양반과전은 흔히 兩班田으로 불리었는데, 전시과 규정에 따라 문무관료에게 지급된 토지를 말한다. 즉 양반관료가 관직을 통해 국가에 충성·봉사하는 것에 대한 반대급부의 하나로 지급된 것이었다. 이러한 양반전의 분급이 토지 그 자체가 아닌 단순한 수조권의 분급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현재 연구자들의 견해가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이의 구체적인 실체, 즉 양반전이 설정되는 토지의 실체가 무엇인가라는 점에 대해서는 견해를 달리하는 여러 주장들이 제기되어 있다. ①양반전은 나말려초의 변동기에 여러 호족으로부터 몰수 한 전장, 결국 국유지 위에 설정된 수조지였다는 견해가 있는가하면,0595)姜晋哲≪高麗土地制度史硏究≫(高麗大出版部, 1980), 68∼83·109∼134·414∼415쪽. ②수급자 자신의 민전 위에 설치된 免租地로서, 그 지급액은 면조권의 상한을 의미한다는 주장도 있으며,0596)金琪燮,<高麗前期 農民의 土地所有와 田柴科의 性格>(≪韓國史論≫17, 서울大 國史學科, 1987).
朴國相,<高麗時代의 土地分給과 田品>(≪韓國史論≫18, 서울大 國史學科, 1988).
③자타의 민전을 막론하고 일반 민전 위에 설정된 수조지였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0597)金容燮,<高麗時期의 量田制>(≪東方學志≫16, 1975).
李成茂,≪朝鮮初期兩班硏究≫(一潮閣, 1980), 290∼294쪽.
李景植,≪朝鮮前期土地制度硏究≫(一潮閣, 1986), 97∼168쪽.
그러나 ① ②의 주장에는 적지 않은 문제점이 내재되어 있는 바,0598)상세한 내용은 이 책 제I편 1장 6절<전시과의 운영과 그 성격>참조. 그러한 견해가 양반전의 실체를 올바로 설명했다고 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양반전은 ③의 주장과 같이 ‘일반 민전 위에 설정된 수조지’로 이해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사실 양반전이 설정된 토지의 실체를 정확히 알려 주는 기록은 찾아지지 않는다.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이에 대해 전혀 다른 견해들이 제기된 것도 기본적으로는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양반전과 함께 전시과 토지의 대종을 이루던 군인전이 일반 민전 위에 설정된 토지였음을 알려 주는 기록이 있어 주목된다. “군인이 증액됨으로써 부족해진 백관의 녹봉을 보충하기 위해 경군의 영업전을 빼앗아 무관들의 불평을 샀다”는 皇甫兪義의 사례가0599)≪高麗史≫권 94, 列傳 7, 皇甫兪義.그 좋은 실례이다. 군액이 늘어남으로써 녹봉이 부족해졌고, 부족해진 녹봉을 보충하기 위해 京軍의 영업전을 빼앗았다는 것은 곧 경군 영업전(군인전)이 녹봉의 재원인 국가수조지로서의 민전으로 편성되었음을 말한다. 그리고 그 민전은 영업전(군인전)의 수급자인 경군 자신의 소유지가 아니라 타인의 민전이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만일 여기서의 경군영업전이 수급자의 민전에 설치된 것, 즉 ②의 주장과 같이 군인의 민전에 대해 면조권을 인정한 것이라면 지급된 군인전을 빼앗아 녹봉에 충당시키려는 시도 자체가 용이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법제적으로 면조의 권리를 갖고 있는 民田主로서의 군인이 군인전의 회수, 즉 면조권의 철회가 부당한데도 자기의 민전에 대한 전조의 수취에 쉽게 응하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따라서 군인전은 타인의 민전 위에 설정되는 경우가 보통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모든 군인전이 그러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군인 자신의 민전은 제쳐 두고 타인의 민전에만 군인전을 설정하는 것은 확실히 행정적으로도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0600)姜晋哲, 앞의 책, 114∼115쪽. 따라서 군인전의 분급은 우선 군인 자신의 민전을 그의 수조지로 인정함으로써 결국 민전주로서의 군인이 내야 할 田租를 면제시켜 주고(免租), 그의 민전이 군인전의 액수에 미달할 때에는 타인의 민전에 대한 수조권을 추가로 지급하는 절차를 취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자신의 민전이 받아야 할 군인전의 액수를 초과하는 경우에는 지급액 만큼만 면조되고 나머지는 국가수조지 또는 타인의 과전으로 편성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일면 면조권의 지급이라는 의미를 띠고 있기는 하지만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군인전의 분급은 ‘자타의 민전을 막론하고 일반 민전 위에 설정된 수조지의 지급’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군인전의 실체가 이러했던 이상 양반전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믿어진다. 군인전과 양반전은 똑같이 전시과 규정에 따라 분급된 토지였는데, 양자가 본질적으로 다른 토지였다고 하는 것은 확실히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사실 두 토지는 지급대상이 달라 서로 다른 이름(地目)으로 불려졌을 뿐, 그 본질이 다른 것은 아니었다.

이와 관련하여 아버지의 경군영업전(군인전)을 승계하기 위해 서리가 되려다가 마침내는 과거에 급제하여 품관으로 진출한 李永의 사례가0601)≪高麗史≫권 97, 列傳 10, 李永. 주목된다. 이영이 서리가 되었다면 받았을 과전, 즉 서리전은 다름 아닌 아버지의 군인전이므로 서리전과 군인전은 성격상 차이가 없다 하겠고, 또 서리는 품관으로 진출할 수 있는 존재였으므로 서리전과 품관의 양반전 또한 그 성격이 구별된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실제로 이영은 과거를 통해 품관이 되었으므로 그가 품관으로서 받았을 양반전에는 당연히 아버지의 군인전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군인전이 서리전 또는 양반전으로 될 수 있었다는 것은 곧 군인전과 양반전의 본질이 다르지 않았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양반전 또한 ‘자타의 민전을 막론하고 일반 민전 위에 설정된 수조지’였다고 하겠다.

물론 양반전의 실체를 이렇게 보면 이른바「義倉米收租規定」으로 불리는 현종 14년(1023)의 판문에0602)≪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常平義倉. 양반전이 국가수조지로서의 민전(3과공전)이 아닌 2과공전에 대비되는 사전으로 분류된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즉 위 규정에 따르면 양반전은 궁·사원전 등의 여타 사전과 함께 1결에 租 2斗의 의창미를 부담토록 되어 있는 반면, 3과공전(민전)이나 이에 비견되는 軍人·其人田 등의 사전은 조 1두를 내도록 되어 있는데, 만일 양반전이 일반 민전 위에 설정된, 그래서 결국 민전과 등질적인 토지였다고 하면 이러한 부담액의 차이는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0603)姜晋哲, 앞의 책, 414∼416쪽. 이러한 의문은 의창미 부담액의 차이를 토지의 성격차에 기인하는 것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생겨난 것인데, 위 판문이 수조율 규정이 아닌 한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러한 차이는 수급자의 신분이나 경제적인 우열을 고려한 결과였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서 양반·궁원·사원전 등은 경제적으로 우월한 양반이나 궁원·사원이 지급받은 수조지였으므로 국가수조지로서의 3과공전 또는 경제적으로 열악한 군인·기인의 군인전·기인전보다 많은 의창미를 부담하였다고 생각된다.0604)義倉米를 부담하는 주체가 누구였는가는 아직 不明이라 하겠는데, 해당토지의 소유자가 아닌 수조권자로 보면 양반전의 부담이 군인전이나 기인전보다 많은 사실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 “문무양반전과 여러 궁원전을 30결 이상 받으면 예에 따라 1결당 5승의 세를 거둔다”고 하는 현종 4년의 판문을0605)≪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들 수 있는데, 여기서도 30결 미만의 수조지를 받는, 그래서 양반이나 궁원보다 경제적으로 열악한 군인과 기인은 세를 부담하지 않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양반전을 일반 민전에 설정된 수조지로 보더라도 위 의창미수조규정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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