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Ⅰ. 전시과 체제
  • 4. 사전의 여러 유형
  • 1) 양반과전
  • (2) 양반과전의 운영과 지배의 내용

(2) 양반과전의 운영과 지배의 내용

이와 같은 전시과의 양반전은 “토지를 수급한 자가 또한 1만 4천여 명인데 그 토지는 모두 外州에 있다”든지,0606)≪高麗圖經≫권 16, 官府 倉廩. “모든 주현에는 각각 경외 양반과 군인의 家田·永業田이 있다”고0607)≪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田柴科 명종 18년 3월 下制. 하는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주로 외방의 여러 주현에 설치되었다. 양반의 영업전이란 곧 양반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양계에는 수조지로서의 사전을 두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므로,0608)≪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신우 14년 6월 창왕 敎. 여기서 말하는 외방 주현의 범주에 양계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하겠다.

그러나 모든 양반전이 외방에 설치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 일부는 경기에 있었다. 충목왕 원년(1345)의 都評議使司 上言에 의하면 祿科田이 실시된 원종 12년(1271) 이전에도 경기의 8현에는 ‘양반·군인·한인의 구분전’을 비롯한 여타의 토지들이 있었다고 하는데,0609)≪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충목왕 원년 8월. 이「양반구분전」이 바로 양반전의 일부인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前朝(고려)의 田制에서 사대부의 구분전을 제외한 경기의 토지는 모두 공전이며, 사전은 모두 하도에 있었다”든지,0610)≪太宗實錄≫권 5, 태종 3년 6월 임자 司諫院進時務數條. “고려의 사전은 모두 하도에 있었으며, 경기에는 비록 고위 관원(達官)이라도 단지 구분전 10여 결이 있었을 뿐이나, 이것만으로도 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고0611)≪太宗實錄≫권 5, 태종 3년 6월 을해 司諫院上疏. 하는 司諫院의 설명에서도 다시 확인된다. 경기에 있었다고 하는 ‘사대부나 달관의 구분전’은 곧 앞서 말한 양반구분전과 같은 것이다. 물론 이들 기록이 모두 고려 후기 이후의 것이라는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조선 초의 관료들이 말하는「前朝의 田制」란 고려 전기 이래의 전시과 제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위 사간원의 설명은 고려의 전제를 예로 들어 과전의 하삼도 移給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것인데, 그러한 주장의 근거를 제도가 매우 문란해진 고려 후기의 전제에서 찾으려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조선의 관료들은 전제 운영에 관한 한 고려 후기를 혹평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이와 같이 양반전의 대부분은 외방의 주현에 있었지만, 그 일부는 구분전이란 이름으로 경기에 설치되었다. 즉 한 개인이 지급받는 양반전은 경기의 구분전(양반구분전)과 외방에 설치된 것의 두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고려가 양반전을 분급함에 있어 이러한 방식을 취하였던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첫째, 가능한 한 경기에 국가수조지로서의 공전을 많이 확보하고 양반전을 비롯한 그밖의 과전을 외방에 설치하면 국가로서는 조운을 통한 전조 수납의 어려움을 덜 수 있고, 사전의 전주도 나름대로 필요한 잡물로 전조를 징수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佃客(농민) 또한 전조 수송의 노고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0612)≪太宗實錄≫권 5, 태종 3년 6월 임자 司諫院進時務數條. 둘째, 그러나 한편으로 양반 관원의 대부분은 개경에 거주하였는데, 그들은 생활의 안정을 위해 신속히 식량을 조달할 수 있는 근거리의 과전을 필요로 하였고, 따라서 국가는 양반전의 일부를 畿內에 설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양반구분전이었다. 이처럼 양반구분전은 과전(양반전)의 外方折給이라는 대원칙 아래에서 운영된 것이므로 그 규모는 작을 수밖에 없었다. 달관의 경우도 10여 결에 불과하였으며, 대체로 과전액의 1/8에서 1/7에 이르는 수준이었다고 이해되고 있다.0613)양반전의 구성에 대한 이러한 내용에 대해서는 李景植,<高麗時期의 兩班口分田의 柴地>(≪歷史敎育≫44, 1988) 참조. 한편 전시과 규정에 따라 분급된 양반전의 전체 규모는 갱정전시과를 기준으로 대략 9만 4천 여 결 정도였다. 문반에게 1만 8천여 결이 분급되었으며, 무반에게는 7만 6천여 결이 지급되었던 것이다.0614)姜晋哲, 앞의 책, 79∼81쪽. 이렇게 무반의 양반전이 문반의 그것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물론 무관의 수가 문관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양반전은 일반 민전 위에 설정된 분급수조지였다. 따라서 이를 수급한 전주의 가장 큰 권리는 전조의 수취였다. 그리고 그 수조율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생산량의 1/10이었다. 그러나 전주의 권리가 전조의 수취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前朝에서는 藁草를 징수한 것이 산과 들을 두를 만하다”고 한 申商의 지적에서0615)≪世宗實錄≫권 58, 세종 14년 12월 무자. 짐작되듯이 전주는 양반전의 전객으로부터 고초도 거둘 수 있었다. 이 같은 전주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양반전을 분급할 때 국가는 문권을 작성해 주었다. 문권은 契券이나 文契로도 불리었는데, 양안 상의 토지가 누구에게 주어졌는가를 명시한 것이었다. 고려말 사전개혁론자들의 상소에 거론된 祖父文券·高曾文券·高曾之券 등이0616)≪高麗史≫권 78, 志 32, 田制 祿科田 趙浚·李行·黃順常 上疏. 바로 그러한 문권이었다. 한편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0617)兩班田의 田租를 국가가 수취하여 田主에게 분급해 주었다고 하는 소위 官收官給制를 주장하는 연구로는 다음과 같은 논문이 있다.
周藤吉之,<高麗朝より朝鮮初期に至る田制の改革>(≪東亞學≫3, 1940).
李佑成,<高麗의 永業田>(≪歷史學報≫28, 1965).
金泰永,<高麗兩班科田論>(≪朴性鳳敎授回甲紀念論叢≫, 1987).
양반전의 전조는 전주의 책임 아래 직접 수취되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0618)金容燮, 앞의 글.
李景植, 앞의 책, 119∼124쪽.
즉 양반전의 전조는 납조자인 전객이 전주인 양반에게 직납하도륵 되어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州縣官들이 養戶로 하여금 군인전의 전조를 수송하게 하지 않아 군인들이 굶주리고 추위에 떨어 도산하고 있다”고 걱정한 예종 3년(1108)의 制文이0619)≪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農桑 예종 3년 2월 制. 주목된다. 물론 이를 근거로 군인전을 비롯한 각종 과전의 전조가 官收官給되었다고 하는 견해도 있지만,0620)兩班田의 田租를 국가가 수취하여 田主에게 분급해 주었다고 하는 소위 官收官給制를 주장하는 연구로는 다음과 같은 논문이 있다.
周藤吉之,<高麗朝より朝鮮初期に至る田制の改革>(≪東亞學≫3, 1940).
李佑成,<高麗의 永業田>(≪歷史學報≫28, 1965).
金泰永,<高麗兩班科田論>(≪朴性鳳敎授回甲紀念論叢≫, 1987).
지방관이 군인전의 전조를 수취하였던 것은 아니다. 지방관의 임무는 전조의 수송을 독려하는 것이었을 뿐이며, 전조는 어디까지나 전적의 대표격인 양호에 의해 군인에게 직접 납부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군인전이 이러했던 이상, 이와 성격이 같았던 양반전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직접 수취의 원칙에 따라 전주는 노복 등을 수조인으로 파견하여0621)≪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수조의 실액을 사정하고 전조의 수취를 집행·감독케 하였다. 그러나 수조인이 전조를 직접 받아 간 것은 아니며, 전주의 집이나 조창까지 전조를 수송하는 것은 납조자인 전객의 몫이었다 그런데 양반전의 대부분이 외방 주현에 있었던 관계로 그 전조의 수취와 수송에는 관의 도움이 필요하였으며, 국가는 지방관이나 조운제를 통해 이에 협력하였다. 앞서 소개한 예종 3년의 제문과, 사전의 전조가 조운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기록이0622)≪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漕運 문종 33년 정월. 그 좋은 예라 하겠다.

양반전은 양반관료가 관직에 복무하여 국왕에게 충성한 것에 대한 대가로 지급되었으므로 사망 등으로 인해 수급자의 奉供이 끝나게 되면 원칙적으로 국가에 반납하여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回收(返納)와 再分給’이라는 절차를 거쳐 유족인 처와 자손에게 전수되었다. 물론 양반전, 특히 문관 양반전의 連立을 명기한 규정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무관의 양반전이 이른바 田丁連立의 원칙에 따라 자손에게 전수되었음을0623)≪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田柴科 현종 19년 5월 判. 고려할 때, 문관의 양반전 또한 자손에게 연립되었을 것은 생각하기 어렵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연립할 자손이 없는 6품 이하 7품 이상 관원의 처에게 구분전 8결을 지급한다”고 하는 문종 원년의 판문에서도0624)≪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田柴科 문종 원년 2월 判. 어느 정도는 짐작된다. 여기서 말하는 연립의 구체적인 대상은 관원인 父祖의 양반전일 수밖에 없다 하겠고, 따라서 위 판문의 내용은 양반전의 자손에의 전수가 일반적이었음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자손에의 전수가 가능하였으므로 양반전이 無期永代的 수조지로서의 영업전이었을 것임은 물론이다.0625)武田幸男,<高麗時代の口分田と永業田>(≪社會經濟史學≫33-5, 1967). 그러나 원칙적으로 양반전을 사사로이 전수할 수는 없었다. 관에 신고하여 허락을 얻은 후에야 전수할 수 있었다.0626)≪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신우 14년 7월 諫官 李行 上疏. 다시 말해「회수와 재분급」이라는 의제적인 절차를 거쳐야만 했던 것이다. 한편 전수되는 액수가 어느 정도였는가는 잘 알 수 없으나, 과전법의 예로 미루어 보아 처와 자손이 모두 있으면 처가 사망할 때까지 전액이, 자손만이 있으면 일부만이 전수되었을 것인데, 후자의 경우는 연령이나 出仕에 따른 별도의 기준이 마련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0627)李景植, 앞의 책, 154쪽.

한편 연립할 자손이 없는 6품 이하 관원의 처에게는 8결, 부모가 모두 죽고 남자 형제도 없이 출가하지 않은 5품 이상 관원의 자녀에게는 5결의 구분전이 지급되었다. 그런데 이들이 받은 구분전은 다름이 아니라 남편 또는 아버지에게 지급되었던 양반전의 일부였다. 즉 구분전을 분급한다고 해서 새로운 수조지를 지급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지급되었던 양반전의 일부를 구분전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용익할 수 있도록 인정한 것에 불과하였다. 비록 군인전의 규정이기는 하지만 “자손이 없는 군인이 70세가 되면 구분전을 주고 나머지 토지는 회수한다”고 한≪高麗史≫食貨志 田制條의 서문에서 그러한 사실을 엿볼 수 있다. 70세가 된 군인에게 지급된 구분전의 실체는 곧 자신이 과거에 받았던 군인전의 일부였던 것이다. 양반관료의 유족에게 주어진 구분전의 실체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양반전과 구분전은 전혀 별개의 토지가 아니라 같은 토지의 양면이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러한 구분전의 규모는 대략 최소한의 생계 유지를 위해 필요한 수입을 제공하는 정도, 즉 半丁 내외였다. 따라서 구분전은 휼양적 기능을 갖고 있었다 하겠다. 여기서 휼양적 기능을 지닌 이 구분전과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양반구분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상정된다. 양반구분전 또한 관원의 서울 생활에 필요한 양곡의 조달이라는 기능을 갖고 있었으며, 정확히 같은 것은 아니지만 6품 관원의 경우 그 규모 역시 대략 반정 수준이었던 것이다.0628)更定田柴科에서 6품 관원이 받은 田地額은 45∼50결 수준이었는데, 대략 科田額의 1/7 내지 1/8이 양반구분전이었다고 이해되므로 6품관의 앙반구분전은 6∼7결이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이렇게 볼 때 유족의 휼양을 위해 구분전으로 지급된 양반전의 일부란 곧 경기에 설치되었던 양반구분전이거나 또는 그 일부가 아니었을까 한다.

이처럼 일단 분급된 양반전은 비록 회수와 재분급이라는 의제적인 절차는 거쳤지만, 그 전액 혹은 일부가 자손에게 연립되거나 구분전의 이름으로 처자에게 전수되었다. 즉 양반전은 강한 世傳性을 지닌 분급수조지였다. 그러나 수급자가 죄를 범하면 세전이 인정되지 않았음은 물론 곧바로 국가에 회수되었다. “모든 범죄자는 영업전을 받을 수 없다”라든지,0629)≪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田柴科 정종 7년 정월. “臨監하던 관리가 스스로 도적질하거나 뇌물을 받고 법과 다르게 처리한 자는 職田을 회수하고 歸鄕시킨다”고 하는 법규0630)≪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職制. 등이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 준다. 반면 몰수된 양반전이 본인이나 그의 처자에게 환급될 수도 있었다. 국왕의 사면으로 면죄되었을 경우이다. 그리고 이 때에는 몰수되기 이전의 양반전이 그대로 지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0631)≪高麗史≫권 5, 世家 5, 현종 16년 12월 및 권 102, 列傳 15, 權守平.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양반관료에게는 田地와 함께 柴地가 분급되었다. 그래서 양반전은「兩班田柴」라고도 불리었다. 이 시지가 樵菜地, 즉 섶(薪)과 숯(炭) 등의 땔감을 조달하는 물적 기반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음은 물론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시지는 서울 생활자들의 식량 조달을 위한 물적 기반으로서의 양반구분전과 유사한 성격을 지녔다고 하겠다. 이에 따라 시지는 수급자가 거주하는 개경 근처의 경기에 주로 설치되었다. 운송상의 편리를 고려해야만 했던 것이다. 시지로 설정된 지역이 2日程을 넘지 않은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고 하겠다. 이와 같이 국가가 분급한 것인 만큼 분급시지가 사유지일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것은 수조지로서의 과전과 같은 성격을 지닌 존재였다. 따라서 타인의 이용을 금하는 독점 행위는 허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대개 이러한 분급시지는 민과의 공동이용을 전제로 한 無主空山, 즉 국유지에 설정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히려 양반관료는 그러한 공동이용을 매개로 섶과 숯의 수취라는 분급시지에서의 권리를 실현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즉 양반전주는 분급시지의 주변에 거주하는 농민에게 그것을 이용하게 하고 그 대가로 소정의 섶과 숯을 수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0632)李景植, 앞의 글 참조.

<金載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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