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Ⅰ. 전시과 체제
  • 4. 사전의 여러 유형
  • 2) 공음전

2) 공음전

공음전시에 관해서는, 고려사회의 성격규정과 관련하여 많은 논란이 있었다. 공음전시를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고려사회의 성격으로서 혹자는 귀족제를, 혹자는 관료제를 주장하였으며, 반대로 귀족제를 주장하거나 관료제를 주장함에 따라 공음전시를 달리 파악하였다. 즉 공음전시의 지급대상자를 5품 이상으로 보는 논자는 귀족제를, 또 전체 관료로 보는 논자는 관료제를 주장하는 것으로 귀착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해방 후 50년대 연구에서 공음전시는 모든 관리를 대상으로 지급한다는 견해가 있었으나, 60년대 초반에 이 제도는 5품 이상을 지급대상으로 하며 음서와 경제적 지주가 된다는 주장이 제시됨으로써 이후 그 견해를 따르는 논자가 많이 나왔다.0633)李炳熙,<高麗時期 經濟制度 硏究의 動向과「국사」 敎科書의 敍述>(≪歷史敎育≫44, 1988), 165∼168쪽. 이 견해에 따르면 공음전시는 唐의 官人永業田과 마찬가지로 5품 이상의 관료에게 지급되었고 자손에게 대대로 상속이 허용되었으며 죄가 있어도 상속권이 인정된 영업전이었다는 것이다. 또 이 제도는 관인 신분의 계승과 거기에 따른 경제적 조건을 보강해 주는 것이라 하였다.0634)李佑成,<閑人·白丁의 新解釋>(≪歷史學報≫19, 1962).
―――,<高麗의 永業田>(≪歷史學報≫28, 1965).

논란이 되는 공음전시에 관한 기사는≪高麗史≫권 78, 食貨志에 아래와 같이 보인다.

문종 3년 5월에 兩班功蔭田柴法을 정하였다. 1품은 門下侍郎平章事로 전 25결 시지 15결이며, 2품은 參政 이상으로 전 22결 시지 12결이고, 3품은 전 20결 시지 10결이며, 4품은 전 17결 시지 8결이고, 5품은 전 15결 시지 5결이다. 자손에게 전하고 산관은 5결을 감한다. 樂工 賤口로서 放良된 員吏는 모두 받을 수 없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功蔭田柴).

이 사료는 연구자에 따라 여러가지로 이해하고 있다. 먼저 1품∼5품으로 표현되는 品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점이 주목된다. 그런데 품을 관품으로 보아 5품 이상의 고위 관리를 공음전시의 지급대상으로 보아 온 견해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동일한 토지분급 규정에 개정전시과나 갱정전시과 모두에서, 동일한 규모의 토지를 분급받도록 된 동일과에는 서로 상이한 관품이 존재하고 있다. 예컨대 개정전시과의 9과에는 정·종4품, 정·종5품, 종7품이 섞여 있다. 관품이 동일하더라도 동일한 규모의 전시를 분급받는 것이 아니므로 공음전시에서도 동일한 관품이 동일한 규모의 전시를 지급받을 수 없는 것이다. 곧 3품·4품·5품을 정·종3품, 정·종4품, 정·종5품과 동일시하는 것은 곤란하다.

또한 兩班功蔭田柴法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더라도 품을 관품과 동일시하는 것은 곤란하다. 공음전시법은 양반으로서 공음이 있는 자에게 전시를 지급한다는 의미이니, 문무양반의 관리 중 특별유공자에 대한 賞與法이라 할 수 있다. 5품 이상의 모든 관료를 특별유공자로 간주할 수 없기 때문에, 품은 관품과 동일시하기 어렵다.

그리고 본법으로 5품 이상의 전 관료에게 전시가 급여되었다고 보면, 500여 명에 이르는 5품 이상의 관료에게 관품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지급되는 전시의 총 규모는 田이 1만 500결, 柴가 4천 결에 이르는데, 관료가 늘고 대체되어 감에 따라 면적이 훨씬 넓어질 것이다. 따라서 5품 이상의 전관료에게 전시가 급여된 특별우대법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결국 본법상 품은 단계로 해석되어야 옳으며 결코 관품의 뜻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될 것이다.0635)朴菖熙,<高麗의「兩班功蔭田柴法」의 해석에 대한 재검토>(≪韓國文化硏究院論叢≫22, 1973). 특별공훈자에게 특별상여가 주어짐은 일반적이고, 앞뒤 사료의 문맥상에서나, 모든 관리가 일반전시과와는 별도로 이 사전적 성격의 전시를 급여받게 되는 객관적 사유가 없다는 점에서도, 품과 관품을 동일시하여 5품 이상의 관리가 지급대상이었다는 주장은 인정하기 어렵다.

공음전시 규정의 ‘散官減五結’이라는 규정을 통해서 검토하더라도 공음전시법의 품은 단계로 파악해야 한다는 사실이 인정된다.0636)金東洙,<高麗의 兩班功蔭田柴法의 解釋에 대한 검토>(≪全南大論文集≫26, 1981). 종래 공음전시법의 산관은 職事가 없는 관이라고 막연히 이해되어 왔다. 그런데 산관의 용례를 살펴보면 여러 가지 유형이 있다. 우선 산관이 입사하지 아니한 대기중의 관료를 지칭하는 용례가 있으며, 또한 관직생활을 거친 후 퇴임이나 휴직, 좌천의 경우로 實職任이 없이 직사가 없는 처지에 놓여 있게 된 경우를 지칭하는 용례가 있고, 散階(문·무산계)나 散秩의 의미로 쓰인 용례도 있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산관은, 단순히 직사가 없는 관이라는 식으로 일률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다양한 용례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散官減五結’이라는 규정은 산관의 경우 현직관에 비하여 5결을 감한다는 내용인데, 앞의 세 경우를 모두 상정해 보아도 공음전시의 수급대상자가 5품 이상의 관리라는 주장에는 선뜻 수긍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목종 원년(998) 전시과의 실직관과 산관의 科差異, 封贈之制, 出米有差 대비표 등 여러 규정에서 산관은 실직관보다 1품 내지 2품 아래로 처우되고 있다. 따라서 문종 3년의 공음전시 규정에서 실직 5품 이상의 관원이 수급대상자라면, 산관은 2∼3품 내지 4품까지가 수급대상자로 규정되었어야 마땅할 것이다. 산관도 5품까지 수급대상이 된다면 실직 6품보다 훨씬 우대 받는 셈이 되는데, 위의 예로서는 그러한 경우를 상정하기 어렵다. 따라서 공음전시법의 품은 산관에 대한 규정에만 국한하여 이야기하더라도 단계로 파악함이 훨씬 합리적이라고 생각된다.

공음전시와 긴밀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陰敍를 검토해 볼 때에도 이상의 사실은 보다 명확히 확인된다.0637)金龍善,<高麗 功蔭田柴의 지급대상과 그 시기>(≪震檀學報≫59, 1985;≪高麗蔭敍制度硏究≫, 一潮閣, 1991). 고려의 음서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門蔭과 功蔭이 그것이다. 문음은 5품 이상 관리의 자손에게 시행된 음서이고, 공음은 특별한 공훈을 세웠거나 특별한 계기를 맞아 시행된 음서이다. 이 가운데 부정기적인 음서 즉 공음이 시행되는 계기는 국왕의 즉위나 복위를 맞아 왕태후·왕태자의 冊封 및 封侯의 경우, 太廟·王陵에 친향한 후, 旱災·叛亂 등 국가에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西京·南京을 순행하고 귀경하였을 때, 기타 고관의 치사·사망이나 특정공신의 추념이 행해질 때 등이다. 국가적 경사와 같은 계기를 맞아 은전이 베풀어질 때 그 은전의 하나로 시행된 음서를 공음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이 때 문무양반에게 지급된 토지를 공음전시라고 부른 것으로 보인다. 공음전시는 국왕의 즉위나, 태자의 책봉과 같은 국가적 경사를 맞아 내려진 은전의 하나로서 지급해 준 토지였다. 공음전시 지급의 품이 적어도 1품에서 2품까지는 관직과 관련이 있을지 모르지만 전체적으로는 관품과 관련이 없는 것은 분명하다.

품을 관품이 아니라 단계로서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모든 관료가 5단계로 구분되어 공음전시가 지급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곧 모든 관리가 아니라 특별유공자를 급여대상으로 하였으리라 판단되는데, 앞서 언급한 글자의 의미나 본법이 급여대상자에게 특혜를 주는 것이라는 사실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으며, 만일「全官吏說」을 인정하는 경우 田 37만결, 柴 18만 6천결에 이르는 지급액이란 역사현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전관리설」을 인정할 때 전시세습에 있어서 上薄下厚의 모순된 현상이 나오기 때문에 공음전시를 지급받는 주된 대상은 특별유공자라고 할 수 있다.0638)朴菖熙, 앞의 글. 결국 공음전시법은 특별한 공훈이 있는 관료를 5단계로 나누어 전시를 지급하는 규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0639)이러한 이해와 상이한 견해가 근래에 제기된 바 있다.
최연식,<高麗前期의 職田과 그 支給形態>(≪韓國史硏究≫70, 1990).

공음전시법을 이렇게 이해한다면, 공음전시는 공이 있는 자에게 지급되는 공신전과 유사한 성격이 된다. 사실≪高麗史≫食貨志 편찬자들이 ‘功蔭田柴’ 조에 수록한 내용은 대체로 공신전에 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모두 8개 조항인데, 공음전시에 직접 관련된 자료는 3개 뿐이며, 나머지는 공음전시로 표현되지 않고 勳田이나 功臣田·功臣賜田으로 표기되고 있다. 공음전시를 공신전으로 이해한다면, 훈전을 제외하고는 모두 공신전에 관련된 내용이다. 그런데 훈전도 사실은 공신에게 지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경종 2년 3월) 開國功臣 및 向義歸順城主 등에게 勳田을 50결에서 20결까지 차등있게 사여하였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功蔭田柴).

훈전이 지급된 대상은 개국공신과 향의귀순성주였다. 개국공신은 물론이고 향의귀순성주도 고려의 건국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準功臣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출전을 지급받은 대상도 결국은 공신이며, 따라서 훈전은 공신전과 동일하게 취급할 수 있다.≪高麗史≫식화지 공음전시조에 기록된 8개 기사는 잘못 분류된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수록된 것이라 하겠다.0640)金東洙, 앞의 글.
朴天植,<高麗史>食貨志 ‘功蔭田柴’의 檢討>(≪全北史學≫7, 1983).

이 공음전시는 자손에게 世傳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세전과 관련해서는≪高麗史≫전제, 공음전시조에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기록이 보인다.

(현종 12년 10월) 判에, ‘功蔭田은 直子가 죄를 범하면 그 손에게 移給한다’고 하였다.

(문종 3년 5월) 양반공음전시법을 정하였다. …공음전을 받은 자의 자손이 사직을 위태롭게 하는 것을 도모하거나, 모반 대역에 연좌되는 일 및 공사의 이러저러한 죄를 범하여 제명된 자 이외에는 그 아들이 죄가 있고 손이 죄가 없다면 공음전 1/3을 (손에게) 지급한다.

(문종 27년 정월) 判에, ‘자식이 없는 사람의 공음전은 女壻·親姪·養子·義子에게 傳給한다’고 하였다.

자손에의 세습이 원칙이고, 잘못이 있더라도 그 원칙은 지켜지도록 규정되어 있다. 현종 12년(1021)에는 공음전을 받은 자의 아들(直子)이 죄를 범할 경우에는 손자에게 이급토록 규정하였다. 아마 공음전을 자손에게 전수하는 것은 이미 원칙으로 확립되어 있었는데, 이 시점에 와서는 아들이 죄를 범한 경우조차도 세전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문종 3년(1049) 5월에는 공음전 시법을 재조정하였는데, 세전과 관련해서도 내용이 보완되고 있다. 즉 공음전을 받은 자의 자손은, 사직을 위태롭게 하는 것을 도모하거나 모반 대역에 연좌되는 일 및 공사의 죄를 범하여 제명된 경우 외에는, 아들이 경미한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손자가 죄가 없으면 공음전시 가운데 1/3을 손자에게 지급토록 하였다. 현종대보다 죄에 대한 규정이 세분화되어 모든 죄를 지어도 자손에게 세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중대한 죄를 지은 경우에는 세습할 수 없도록 하였고, 아들이 죄가 있어 손자에게 전할 경우 종전에는 공음전 전부가 이급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문종 3년에 와서는 1/3로 지급액이 크게 축소되었다. 요컨대 현종대 규정의 미비한 점을 보충하면서 세전에 대해 일정한 제한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문종 27년에는 아들이 없는 자의 공음전에 대해서는 女壻·親姪·養子·義子의 순으로 세습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양자나 의자보다 사위 조카가 전수받는 데 있어서 우선권을 가지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당시의 친족 체계와 관련하여 세전할 수 있는 대상을 자손에서 조카·양자·의자로 크게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공음전시가 이처럼 세전될 수 있는 것은, 지급 대상자의 성격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지급 대상자는 국가에 커다란 어려움이 있을 때 국가나 국왕을 위해 큰 공을 세운 자로서 고려 국가 체제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한 자이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서는 고려 국가 내지 국왕을 저버리는 특별한 범죄가 아니라면 세습하는 것을 허용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의 상속은 다음의 기사와 같이 자손이 여럿일 경우 분할 상속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충렬왕 24년 정월 충선왕 즉위) 교서를 내리기를, ‘공신전으로 자손이 미열하여 孫外人이 점취한 것은 연한에 구애받지 말고 孫에게 환급하라. 만약 1호가 合執하고 있으면 足丁·半丁을 변별하여 均給하라’고 하였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功蔭田柴)

공신전은 공음전시와 동일한 것으로 이해되는데, 동종 가운데에서 1호가 합집한 경우 足丁·半丁을 분별하여 균등하게 지급하도록 정했다. 1호가 합집한 경우 즉 단독으로 차지하고 있는 경우는 부당하다고 보면서 동종 중의 사람에게 공신전을 균등히 지급토록 한 것이다. 이 경우 토지를 일정한 단위로 묶어서 파악한 족정·반정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세습되도록 조정하고 있는 점은, 고려시기 일반적인 토지분급의 원칙과도 관련하여 주목되는 사실이다. 결국 1호가 합집한 것, 즉 1호가 단독으로 차지하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바, 균분 상속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공음전시의 성격은 국가에서 분급하는 것이므로 수조지였을 것이다. 세습이 허용되었지만, 세습이 행해질 때에는 관에 고하는 절차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세전하는 자의 유무, 범죄의 유무를 관에서 조사하고 또한 아들이 경미한 죄가 있는 경우 손자에게 1/3만을 지급하도록 규정한 사실도 역시 관에서 그 토지를 관리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결국 세전은 가능하지만 관에서 개인에게 사유지로서 소유권을 완전히 지급한 것이 아니라 일정하게 관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고려 중기 이후 공음전시에 대한 국가의 관리는 약화·소멸되어 갔다. 국가에 고해 자격여부를 인정받은 후 세전되던 것이, 그 절차 없이 受得한 자가 자유로이 세전하는 것으로 바뀌어 갔다. 그것은 전체 토지제도의 변화 추세와도 짝하는 현상이라 할 것이다. 타인에게 탈점되는 수도 있었는데, 위의 충렬왕 24년(1298) 정월 충선왕의 즉위 교서에서 그러한 사실을 살필 수 있다. 즉 공신전을 받았으나 자손이 미열해서 孫外人, 곧 자격이 없는 자가 점취한 경우가 있다는 것인데, 이는 곧 그들에 의한 탈점이 성행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종전에는 수조지를 지급하던 방식이었으나, 賜牌田을 지급하는 것으로 바뀌어 갔다. 몽고와의 전쟁으로 많은 농토가 황폐화되었는데 이것의 개간과 관련하여 국가는 사패전을 지급하였다.0641)李景植,<高麗末期의 私田問題>(≪東方學志≫49, 1983).
朴京安,<高麗後期의 陳田開墾과 賜田>(≪學林≫7, 1985)
개간을 하면 소유권을 취득하게 되므로 결국 수조권과 소유권이 중첩된 토지였다. 그런데 사패전의 형식으로 받은 공신전은, 국가가 지급할 때에는 규모를 정하는 것이었으나, 실력을 배경으로 확대시켜 지급액을 초과하여 점유하는 경우도 있었다. 충숙왕 5년(1318) 5월 국왕의 하교 중 공신사전에 관한 내용이 그것이다.

功臣賜田은 산천을 표지로 하여 받은 것이 날마다 넓어지고 있으나 세를 납부하지 않아 貢賦를 부담하는 전토는 날마다 감축되고 있다. 수를 초과하여 지나치게 점유한 것을 자세히 조사하여 본래대로 되돌려라(≪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功蔭田柴).

공신의 賜田이 권세를 배경으로 산천을 표지로 삼으면서 지급받은 것을 넓혀 가면서 세를 바치지 않으므로 貢賦를 부담해야 하는 토지가 날로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급액을 초과해서 점유하고 있는 자는 본래대로 되돌리라는 것이다. 공신전을 지급받는 자는 대개의 경우 세력자였기 때문에 사패전을 지급받아, 그 지급액의 규모를 상회하는 것을 차지하는 경우가 허다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충숙왕 12년 12월에는 공신의 사전이 100결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조치하였다.0642)≪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功蔭田柴. 100결을 상회하는 것은 式目都監에서 조사해서 회수하도록 조치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조치가 시행된 후에도 여전히 지급액을 초과해서 지배하는 경우가 있었다. 우왕 6년 9월 諫官 李崇仁 등이 상소한 내용에 잘 나타나 있다. 국가가 전토의 사패를 지급함은 본래 공이 있는 자를 대우하기 위함인데 “사패를 冒受하여 전토를 매우 많이 점유한 자가 있다”0643)≪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功蔭田柴.라는 것이다. 이는 곧 사패를 함부로 받아 전토를 지나치게 많이 차지한 자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이숭인은 공민왕대 공신들의 토지 과다 점유를 주로 문제삼은 것이지만 역시 이전 시기에 받은 자도 문제가 없을 수는 없겠다. 그리하여 趙浚은 창왕 즉위 직후에, “이로부터 閑人·功蔭·投化·入鎭·加給·補給·登科·別賜라는 명칭의 토지가 대대로 증가했다”0644)≪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우왕 14년 7월.라고 글을 올렸다.

공음전시는 국가의 관리가 무너져 가면서 점유자가 자유로이 세전하게 되었으며, 몽고와의 전란 후에는 사패 형태로 전토를 지급받았는데 권력을 배경으로 지급액을 초과 점유하여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렇게 이해해 보면, 공음전시 공신전은 때때로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특별유공자에게 지급하는 것으로서, 세습이 명백히 보장된 토지였다. 그 지급총액은 당시 전체 토지에서 상당한 양에 이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수득한 자가 공신이므로 본인이 살아 있을 경우 지위를 활용하여 그 토지를 확대시켜 가고 있었다. 따라서 고려 전제 상의 문제를 언급할 때 양반과전과 아울러 공음전시도 언급되는 것이다. 고려 왕조가 끝나갈 무렵 과전법에서 이 토지는 일정하게 정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李炳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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