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Ⅰ. 전시과 체제
  • 4. 사전의 여러 유형
  • 4) 구분전

4) 구분전

고려시기 그 성격을 둘러 싸고 논란되고 있는 토지종목 가운데 口分田이 있다. 구분전이란 원래 생계유지, 휼양 등을 위해 지급된 토지였다. 신라시기에도 그러한 성격의 구분전이 존재하였으나,0655)“向德 熊川州板積鄕人也…天寶十四年(755) 乙未 年荒民餓 加之以疫癘 父母飢且病 母又發■…向德…乃刲髀肉以食之 又吮母■…王下敎 賜租三百斛 宅一區 口分田 若干”(≪三國史記≫권 48, 列傳 8, 向德). 고려시기의 구분전과는 그 성격이 동일하지가 않았다. 구분전에는 세 계통이 있다. 恤養口分田, 兩班口分田, 雜口分田이 그것인데,0656)구분전을 이와 같이 3계통으로 정리한 연구로는 李景植,<高麗時期 兩班口分田과 柴地>(≪歷史敎育≫44, 1988)가 참조된다. 모두 구분전이라는 원래의 의미에는 충실하면서도 그 계통, 설정의 의미는 각각 상이하였다.

휼양구분전은 전시과제도의 운영과 긴밀한 관련을 갖는 토지였다. 휼양구분전과 관련한 자료는 아래와 같다.

(현종 15년 5월) 判에, ‘자식이 없으면서 身歿한 군인의 처에게는 구분전을 지급한다’고 하였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田柴科).

(문종 원년 2월) 判에, ‘6品 이하 7品 이상으로 연립할 자손이 없는 자의 처에게는 구분전 8결을 지급한다. 8품 이하와 전쟁에서 사망한 군인의 (처에게는) 구분전 5결을 지급한다. 5품 이상 戶로 부부가 모두 사망하고 아들이 없이 출가하지 않은 여식에게는 구분전 8결을 지급하고 여식이 출가하면 관에서 회수한다’고 하였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田柴科).

(문종 23년) 判에, ‘군인으로 年老하거나 身病이 있는 자는 자손이나 친족이 대신하는 것을 허용하고, 자손이나 친족이 없으면 나이가 70이 될 때까지는 監門衛에 소속시키고 70후에는 다만 구분전 5결을 지급하고, 나머지는 회수한다. 또한 海軍도 이러한 예에 의거한다’고 하였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田柴科).

휼양구분전을 지급받는 계층에는 과전을 상속할 수 없게 된 양반의 처나 딸, 군인 등이 있었다. 전시과에 의해 설정된 토지는 양반계층에게 그 신분적 지위를 세습할 수 있도록 일정하게 보장하기 위해 설정한 것인데, 사정이 생겨 그 토지를 세전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지급한 것이 휼양구분전이었다.

자손이 없으면서 사망한 군인의 경우, 자손이 없으므로 토지를 세전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그 토지를 회수하게 되었다. 이 때 그 군인의 처의 경우 국가에서 배려하지 않으면 생계가 어려워지게 되므로, 그 처를 위해 설정한 토지가 바로 구분전인 것이다. 그러므로 구분전은 군역의 세습, 군인전 세전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미망인에게 잠시 동안 지급하도록 설정한 토지였다. 물론 그 군인의 처가 사망했을 경우에 그 토지는 국가에서 회수하였다. 지급하는 토지의 규모는 현종대에는 명시되지 않고 있다가 문종 원년(1047)에는 5결로 한정하고 있다. 현종대에도 일정한 지급 규정액이 있었겠지만 문종대에 와서는 그 지급액이 축소되어 5결로 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군역을 수행할 수 없게 된 군인에게도 구분전이 지급되었다. 군인의 경우 자손이나 친족이 있다면, 군인이 연로하거나 병이 있을 때 그 군인의 신분을 세습하면서 그 역을 대신할 수 있었지만, 자손이나 친족이 없을 경우에는 군인의 신분을 계승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이 때 그 군인은 이미 군인으로서의 역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그가 지급받았던 토지를 국가가 속공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이런 경우 그 군인이 생존해 있는 동안 그를 위해 그가 지급받았던 토지의 일부를 떼어서 지급하였다. 이것 또한 휼양구분전이었다. 문종 23년의 규정에는 70이 넘으면 구분전으로서 5결의 토지를 지급하도록 규정되었다.

군인의 직역을 세습할 수 없게 된 경우 그 군인의 처에게 지급한 것, 또 본인이 연로한 경우에 본인에게 지급하는 것이 구분전이었는데, 양반의 경우에도 신분을 세습할 수 없게 되면 구분전이라는 토지를 지급하도록 되어 있었다. 양반으로서 연립할 자손이 없게 된 경우, 그 토지는 양반의 직역이 세전되지 못하게 되므로 국가에서 회수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양반이 사망한 경우 즉시 그 토지를 회수하면 그 양반의 처는 생활하기 어렵게 된다. 이를 위해 설정한 토지가 구분전이었다. 문종 원년의 규정에 따르면, 6품 이하 7품 이상의 양반이 연립할 자손이 없이 사망하였을 경우, 그 처에게 구분전 8결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또한 8품 이하의 양반에게 동일한 경우가 발생하였을 경우에도 그 처에게 구분전을 지급하도록 규정하였는데, 그 지급액은 5결이었다. 5품 이상의 양반의 경우에도 동일한 사태가 발생하였다면, 역시 구분전을 그 처에게 지급하도록 규정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는 달리 양반이 사망하고 양반의 처 또한 사망한 경우 그 자손을 위해서도 토지를 지급하도록 규정하였다. 남자 자손이 있다면 그에게 양반이 받았던 토지를 지급하도록 하면 되겠지만, 남자 자손이 없을 경우에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즉 양반의 父와 母가 역시 사망하고, 남자 형제마저 없으면 부가 받았던 토지는 국가가 회수하도록 되었다. 이 때 그 딸 자식을 위해 설정한 토지가 또한 구분전이었다. 문종 원년의 규정에 따르면, 5품 이상의 양반이 사망하고 그 처도 사망하였을 때 아들 자식이 없는 경우 출가하지 않은 딸에게 구분전 8결을 지급하도록 규정하고, 그 딸이 출가하면 국가에서 회수하였다. 아마 5품 이하의 양반가에도 동일한 경우가 발생하였다면 규모가 작았겠지만, 그 딸에게 구분전이 지급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휼양구분전은, 전시과에 의해 토지를 지급받았던 家에 그 토지를 세전할 수 없게 된 사정이 발생하였을 때 임시적으로 마련된 토지였다. 즉 職役傳受, 家系繼承이 단절된 경우에 지급되는 토지였다. 군인 본인이 그 군역을 세전할 자손이나 친족이 없는 경우, 군인이 자손이 없이 사망한 경우의 처, 양반으로서 사망하였으나 자손이 없는 처, 또 양반 자신과 그 처가 사망하고 남자 자손이 없게 된 경우의 출가하지 않은 딸 자식 등이 구분전을 지급받는 대상으로 명시되어 있다. 지급받는 대상은 여러 경우였지만, 모두 전시과의 운영과 관련하여 지급되고 있는 점에서 공통이었다.

전시과의 운영과 관련하여 설정되고 지급되었던 휼양구분전은 전시과제도의 운영과 깊은 관련을 가지면서 운영상의 변화를 보인다. 12세기 이후 전시과제도의 운영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붕괴되어 가는 것과 짝하여 휼양구분전제도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국가의 私田 관리 전체가 무너지면서 이러한 휼양구분전은 제대로 지급되지 못하였다. 이 휼양구분전은 과전법에서는 그 설정의 의미가 살려져서 守信田·恤養田의 명목으로 재정리되었다.

양반구분전도 역시 전시과 제도의 운영과 긴밀히 관련한 토지종목으로서, 전시과 제도의 운영을 보완하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즉, “전시와 구분전은 사대부를 우대하고 염치를 권장하는 것이다”0657)≪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신창 즉위년 7월 趙仁沃上書.라고 하였듯이, 전시과에 의해 지급된 토지와 구분전은 모두 사대부를 우대하고 염치를 지키게 하기 위해 설정된 것이다. 구분전을 지급받는 주체는 사대부인 것이다. 양반에게 지급된 양반구분전은 녹과전과 함께 경기 지역에 설정되고 있었다.0658)≪高麗史≫권 33, 世家 33, 충렬왕 34년(충선왕 복위년) 11월 신미. 또 양반구분전이 경기에 설정되었음은 조선 초의 자료이지만, “前朝의 田制에 畿內의 토지는 사대부의 구분전 외에는 모두 공전이었다. 사전은 모두 下道에 있었다”0659)≪太宗實錄≫권 5, 태종 3년 6월 임자.라고 한 데서 확인된다. 그런데 그 규모는 다음 기사에서 살필 수 있듯이 10여 결에 이르고 있었다.

前朝에 私田은 모두 下道에 있었고, 京畿에는 비록 達官이라 하더라도 다만 口分田이 十數結 있었을 뿐이며 또한 이에 의거하여 생계를 유지하였다(≪太宗實錄≫권 5, 태종 3년 6월 을해).

달관인 경우 10여 결이 되었으나 그렇지 않은 지위가 낮은 관인의 경우에는 그에 이르지 못하였을 것으로 보인다.0660)李景植은 전체 사전 지급액의 1/8∼1/7정도로 보고 있다(李景植, 앞의 글). 경기에 설정된 구분전은 또한 관인의 생활에 매우 긴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양반구분전의 일부가, 가계에서 계승되는 직역의 전수가 단절되었을 때 휼양구분전으로 지급되는 것으로 보인다.

양반구분전이 경기에 설정되는 것은 전시과의 운영과 긴밀한 관련을 갖고 있었다. 즉 전시과의 과전이 대부분 외방에 설정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과전이 외방에 설정된 것은 그만한 사정이 있었다. 공전의 租는 반드시 인력을 써서 수송하는데 경기는 쉽고 하도는 어렵기 때문이었으며, 또한 사전이 비록 하도에 있어도 그 전주가 각자 임의로 잡물로 징수하여 전객도 輸轉하는 폐해가 없고 전주 역시 무역하는 번잡함을 꺼리지 않는 형편이었기 때문이었다.0661)李景植, 위의 글.

양반구분전은 서울에 거주하는 관료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하였다. 고려 후기 녹과전이 설치될 때에도 양반구분전은 손상시키지 않고 유지시켰다.

경기의 전토로 조업의 구분전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절급하여 녹과전을 삼는다(≪高麗史≫권 110, 列傳 23, 李齊賢).

경기의 전토를 녹과전으로 절급하고 있는데, 祖業口分田은 녹과전으로 삼지 않겠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조업구분전이란 조업전이 된 구분전으로 보아야 한다.

先王이…경기의 兩班祖業田을 제외한 半丁을 혁파하여 녹과전을 설치하고 科에 따라 절급하였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충목왕 원년 8월).

양반조업전은 곧 양반의 조업구분전을 가리키는 것이며, 그것을 녹과전으로 삼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부는 녹과전과 함께 양반구분전만은 계속 보호하여 유지하려고 애썼다. 사패전의 분급에 제한을 가하고, 또 사패 冒受로 탈점된 구분전·녹과전을 다시 회수하여 원래 전주에게 환급하고 때로는 사패전 자체를 몰수한 적까지 있었다. 고려 후기에 양반구분전은 사전 문제가 격화되는 속에서도 국가의 이와 같은 노력과 조치 아래서 그런대로 유지되어 갔다.0662)李景植, 위의 글. 공양왕 3년(1391) 과전법이 제정되면서 양반구분전은 토지분급제의 체계에서 탈락하여 소멸되었다.

잡구분전은 휼양구분전이나 양반구분전과는 토지제도 상에서 차지하는 성격이나 지급되는 대상면에서 성격이 다른 토지였다.

경기 8현의 전토는 다시 경리하여, 御分田과 宮司田, 鄕吏·津尺·驛子의 雜口分位田은 元籍을 살펴서 지급하고, 양반·군·한인의 구분전은 원종 12년 이상의 공문을 살펴서 折給한다. 나머지 諸賜給田은 모두 수탈하여 직전으로 균급한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양반이나 군인·한인에게 지급되는 구분전과는 달리 잡구분전이 있었다.0663)위 자료에 보이는 한인구분전도 양반구분전과 동일한 성격의 것으로 추정된다. 지급되는 대상은 鄕吏나 津尺·驛子 등으로서, 그들이 특정한 신역을 수행하는 대가로 국가로부터 지급받는 토지가 잡구분전이었다. 잡구분전은 고려의 끝무렵, 조준이 그의 전제개혁안에서 이를 外役田과 驛田의 항목으로 분류하여 처리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구분전에는 세 가지 계통이 있었다. 휼양구분전이나 양반구분 전은 모두 전시과의 운영과 관련한 토지였으며, 이에 반해 잡구분전은 특정한 역의 수행과 관련된 토지였다.

<李炳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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