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Ⅰ. 전시과 체제
  • 4. 사전의 여러 유형
  • 5) 향리전

5) 향리전

고려의 전시과는 문무양반에게 전시가 지급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중앙의 서리 뿐만 아니라 지방의 향리들에게도 전토를 지급했다. 이 가운데 향리에게 지급된 토지를 鄕吏田 혹은 鄕吏外役田이라 한다. 주지하듯이 향리는 신라 말 고려 초기의 호족세력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고려 초기의 혼란기에 반독자적 세력을 펴고 있던 호족들은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면서 점차 향리로 재편되어 갔다. 그런 과정에서 이들의 지위는 많이 격하되었지만 지방행정을 담당하는 실권자로서의 직역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役은 주로 조세·공부를 수취하고 역역을 징발하는 등 지방통치 상 중요한 몫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국가는 그 직역에 대한 대가로서 일정한 직전을 지급했던 것으로 보인다.0664)深谷敏鐵,<高麗初期の鄕吏について-一つの思いつき->(≪鈴木俊還曆記念 東洋史論叢≫, 1964), 517쪽. 전시과 체제 안에서 향리에 대한 구체적인 직전 지급의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적극적인 기록을 찾아 볼 수는 없으나,≪高麗史≫食貨志의 다음 기사에서 향리에게도 직전이 지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목종 원년 3월에, ‘여러 주현의 安逸戶長에게는 職田의 반을 주라’(≪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田柴科).

위의 기사에서의 安逸戶長이란 나이가 70이 되어 퇴역한 호장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들 퇴역한 호장에게 직전의 반을 주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직 호장에게 일정한 양의 직전이 지급되었으리라는 추측을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를 더욱 뒷받침해 주는 것으로는 다음의 판문이 주목된다.

현종 16년 2월에, ‘여러 주현의 長吏로서 100일간의 疾苦가 있는 자는 京官의 예에 따라 파직하고 직전을 거두어 들이라’(≪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鄕職).

즉 고려 왕조에서는 관리가 병이 들어 100일이 넘도록 出仕치 못하는 경우에는 職을 파하고 전토를 회수하였는데, 향리도 또한 이에 준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직전을 회수당하였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향리에 대한 직전의 지급규정이 성립되어 실제 운용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0665)武田幸男,<高麗·李朝の邑吏田>(≪朝鮮學報≫39·40, 1966), 25∼28쪽. 그것이 바로 향리외 역전으로서, 이 제도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아마도 향리직제가 마련된 성종 초로 생각된다.0666)金鍾國,<高麗時代の鄕吏について>(≪朝鮮學報≫25, 1962), 108∼112쪽에서는 田柴科의 지급대상에서 鄕吏를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고 하였으나, 일부나마 鄕職에 따라 田柴가 지급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단정은 좀 무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의 향리에 대해서 직전 즉 의역전이 지급된 사실은 충분히 확인되지만 이 향리외역전에 대한 지급규정은≪高麗史≫혹은 기타의 기록에 전혀 보이지 않으므로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가 없다. 다만≪高麗史≫권 78, 식화지 1, 전제 공해전시의 성종 2년 6월의 기사 가운데 보이는 주·부·군·현의「長田」을 戶長職田, 즉 외역전이라고 파악하는 견해가 있는데0667)武田幸男, 앞의 글, 25∼27쪽. 이와 같이 보기에는 그 규모가 너무 적기 때문에 의문이 있다. 즉 公廨田柴의 기록에 의하면 長田은 公須田·紙田 등과 더불어 지방 공해전의 일환으로 지급되고 있었는데 당시 주·부 군·현에 分定된 長田의 규모는 주·현의「丁」에 따라 3∼5결로 제정되어 있었다. 이 당시 주·현에는 각각 2∼8명 정도의 호장이 임명되어 있었으므로0668)≪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鄕職 현종 9년조의 개정된 州府郡縣의 향직 및 정원을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鄕吏職號\州縣 州·府·郡·縣 兩 界 州 鎭
1000丁
이 상
500丁
이 상
300丁
이 상
100丁
이 하
1000丁
이 상
100丁
이 상
100丁
이 하
戶 長
副 戶 長
兵 正
副 兵 正
倉 正
副 倉 正

兵 史
倉 史
公 須 史
食 祿 史
客 舍 史
藥 店 史
司 獄 史
8
4
2
2
2
2
20
10
10
6
6
4
4
4
7
2
2
2
2
2
14
8
8
4
4
2
2
2
5
2
2
2
2
2
10
6
6
4
4
2
2
2
4
1
1
1
1
1
6
4
4
3
3
1
1
0
6
2
2
2
2
2
10
6
6
4
4
2
2
2
4
2
2
2
2
2
10
6
6
4
4
2
2
2
2
1
1
1
1
1
6
4
4
2
0
2
2
2
合 計 84 61 51 31 52 50 29

이를 감안한다면 결국 당시 호장 1인에게 주어지는 전토의 규모는 대략 1결에도 못미치게 된다. 따라서 이를 향리외역전(戶長職田)으로 볼 때 호장의 사회적 지위에 비하여 그 지급액이 너무나도 적어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잘 아는 바와 같이 고려는 초기에 향리들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신라 말 이후 고려 건국 직후에 이르기까지 중앙정부는 전국의 각 지방을 집권적으로 파악할 능력이 없었고, 지방 각처에서는 호족세력이 대두 성장하여 중앙정부로부터 독립된 소왕국을 형성한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이들은 고려왕조가 성립하는 과정에서 정치적·군사적으로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이들이 바로 고려 향리의 전신이었다. 그리고 호장은 그들의 우두머리였는데 그런 입장에 있는 호장에게 주어진 給田額이 위와 같다면 더욱 의혹이 짙어질 뿐이다. 특히 일반 전시과에서 京外雜職(서리)이 20결 정도의 토지를 받고 있음에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때문에 혹자는 이를 호장의 직전이 아니라 그의 직무수당을 마련하기 위해 할당된 토지가 아닐까 하는 견해를 비치기도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0669)姜晋哲,<私田支配의 諸類型>(≪高麗土地制度史硏究≫, 高麗大出版部, 1980), 106∼107쪽. 오히려 호장들에 대한 給田과 관련하여 검토되어야 할 것은 호장들에게 제수되던 향직, 또는 무산계에 따른 급전과의 관계라고 생각된다. 호장에게 제수되던 향직은0670)이에 대해 姜晋哲,<전시과 체제 하의 토지제도>(≪한국사≫5, 국사편찬위원회, 1983), 151∼152쪽에서는 鄕職에 대한 田柴의 지급은 향리에 대한 職田으로 이해할 수 없다 하고, 향직이 고려의 공적 조직이기는 하지만 實職이 아니며 爵과 같이 국가적 신분 질서체계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여기에서의 鄕은 중국풍에 대한 고려풍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향리가 향직을 보유하는 계층에 중요한 몫을 차지하나 이것은 향리들만이 가지는 직계도 아니라고 하여 武田幸男,<高麗時代の鄕職>(≪東洋學報≫47-2, 1964)의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고려 초에 來投한 지방세력자에게 수여하여 신왕조에 附化시키기 위한 품직으로 고려의 독자적인 질서체제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에 고려시대의 호장들은 大相(4품)·左尹(6품)·正朝(7품)·中尹·軍尹(각 9품) 등의 향직을 받고 있었다.0671)≪掾曹龜鑑≫권 1, 吏職名目解. 이러한 향직에 대하여 문종 30년(1076)에 제정된 갱정전시과에서 제시하고 있는 급전 규정을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品 階 田 柴 額
제12과
제13과
제14과
大相(4품) 佐丞(3품)
元甫(4품) 正甫(5품)
元尹(6품)
田 40결, 柴 10결
田 35결, 柴 8결
田 30결, 柴 5결

이것은 문종 갱정전시과 가운데서 향직에 대한 급전 규정만을 골라서 도표화 한것이다. 이에 의하면 당시 향직자에 대한 급전은 12과에서 14과까지의 세 종류로 규정되어 있었으며 그 대상은 향직 3품에서 6품이었다. 이 기록만으로는 3품 佐丞 이상 6품 元尹 이하에 대해서는 확실한 것을 알 수는 없으나 그들 향직자에게도 어떠한 형태로든 급전이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생각된다.0672)이것과 관련하여≪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田柴科의 “鄕職 大丞 이상 正職 別將 이상의 官階를 가진 인물이 죽었을 때 田丁이 체립된다”는 기록을 참고하면 그들 향직자들에게도 給田이 이루어졌음을 추측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와 같이 향직에 대한 토지지급은 향리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고 보아 좋다.

한편 고려시대 호장들에게는 향직 뿐만 아니라 무산계가 수여되는 경우도 있어 경제적 혜택을 누리기도 하였다. 즉 주현군 가운데 1품군의 지휘자로서의 직임을 맡을 수 있었던 호장 등 상층부의 향리들에게 무산계가 주어질 기회가 있었으며0673)旗田巍,<高麗の武散階>(≪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法政大出版局, 1972), 392∼393쪽. 무산계의 수혜는 곧 토지의 지급을 연상케 한다. 다시≪高麗史≫百官志에 나타난 무산계 가운데 향리와 관계된 품계를 살펴 보면 17등급인 振威副尉, 25등급인 禦侮副尉, 28등급인 陪戎校尉가 이에 해당된다.0674)고려의 武散階는 29등급으로 구분된다(≪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武散階). 이들은 문종 30년의 갱정전시과에서 각기 그 등급에 따라 다음과 같이 토지지급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른 향리의 토지 지급은 17등급인 진위부위가 22결, 25등급인 어모부위와 28등급인 배융교위가 각각 20결씩을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알기 쉽게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등급 지급된 토지 武 散 階
1
2
3
4
5
6
田 30결, 柴 8결
田 30결
田 25결
田 22결
田 20결
田 17결
冠軍大將軍, 雲麾將軍
掌武將軍, 宣威將軍, 明威將軍
寧遠將軍, 定遠將軍, 遊騎將軍, 遊擊將軍
耀武校尉·副尉, 振威校尉·副尉, 致果校尉·副尉, 翊麾校尉·副尉
宣折校尉·副尉, 禦侮校尉·副尉, 仁勇校尉·副尉, 陪戎校尉·副尉
大匠, 副匠, 雜匠人, 御前部藥件樂人, 地理業僧人

이렇게 보면 고려시대의 향리는 호장을 중심으로 해서 職田 및 鄕職, 武散階의 수여에 따른 급전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들은 대체로 호장 중심의 급전이어서, 副戶長 이하 다른 향리들에게 주어진 토지지급의 실태는 잘 알 수 없지만 그들에게도 어떠한 형태로든 급전이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생각된다.0675)“州郡津驛의 吏가 각각 그 田土의 所出을 먹고”(≪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趙浚上疏文)와 “州府郡縣鄕所部曲津驛의 吏에서 모든 國役을 제공하는 자에 이르기까지 受田하지 않음이 없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趙仁沃上疏文)라는 기록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한편 향리들에게는 勳田이 지급되었음을 다음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경종 2년에 開國功臣 및 向義歸順城主들에게 勳田을 주었는데 그 액수는 50결에서 20결에 이른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功蔭田柴).

이것은 향리의 전신이 호족이었다는 사회적 배경과 관련하여 설명할 때 설득력을 갖는다. 본래 향리는 지방의 호족으로서 많은 재산을 축적하여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상당 기간 동안 본래의 호족적 특성과 경제적 기반을 보유하고 있었다.0676)“고려 초 鄕吏의 職은 朝官과 통용되었으며…”(≪世宗實錄≫권 81, 세종 20년 4월), “金順男의 아들 奉文은 三司左尹이었지만 고향으로 돌아와 吏가 되었는가 하면 安東의 權太師의 孫이었던 權冊은 자원하여 戶長이 됨”(≪掾曹龜鑑≫권 1, 吏職名目解) 등과 같은 기록은 호족적 특성을 드러내는 것이라 보아 좋다. 이 토지는 고려 국가체제의 정비과정에서 상당부분이 훈전으로 賜給되는 형식을 밟아 종전의 지배권을 인정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고려 토지제도의 일반적 성격에 따라 이들 향리들에게 어떠한 새로운 토지를 지급한 것이 아니고 신라 말부터 지방세력의 경제적 기반이 되어 왔던 기존의 토지소유에 대한 국가적 차원에서의 추인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방에 있어서의 전통적 세력으로서의 향리는 기존의 토지소유에 대한 우선적 소유권을 획득하여 그것을 토대로 자손들에게 세습한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향리의 영업전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실제로 향리가 이와 같은 토지를 소유한 사례로서 다음의 李永의 경우를 들 수 있다.

李永은 安城郡 사람으로 戶長이었던 父의 영업전을 계승하기 위해 胥吏가 되었다(≪高麗史≫권 97, 列傳 10, 李永).

이 때 받은 영업전의 규모가 어떠한지, 그 경영 수취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향리의 사회적 배경과 관련하여 보면 그것은 양반의 영업전과 비슷하였을 것으로 보아 무리가 없을 것이다.0677)李佑成,<高麗의 土地所有와 兩班·鄕吏·軍人層>(≪高麗社會 諸階層의 硏究≫, 成均館大博士學位論文, 1975), 67쪽.

고려 후기의 향리들은 口分田, 位田 형태의 外役田을 받고 있었다.0678)“御分田, 宮司田, 鄕吏, 津尺, 驛子 및 모든 口分田, 位田은 元籍에 따라 考覈하여 量給하도록 한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田柴科).
“州·府·郡·縣의 吏 및 津·鄕·所·部曲·庄·處의 吏와 院·館의 直에게는 모두 口分田을 전례에 따라 析給하되 종신토록 한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趙浚上疏文)는 것은 이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특히 고려 후기의 향리외역전은 후에 科田法으로 이어져 더욱 구체적인 실태에 접할 수 있게 된다. 즉 조선 초기 과전법에는 각각 3결의 구분전과 2결의 稅位田으로 구성된 5결씩의 邑吏田이 지급되고 있었다.0679)武田幸男, 앞의 글(1966), 19∼24쪽. 이렇게 보면 결국 고려시대의 향리들은 그 일대를 거쳐 국가로부터 전토를 지급받고 있었던 셈이다. 다만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구체적인 전시지급의 실태가 확인되지 않고 또 위에서 든 기록들이 고려 말의 기사라는 점에서 향리전의 존재 가능성에 회의를 품는 견해도 있다.0680)李惠玉,<高麗時代의 鄕役>(≪梨花史學硏究≫17·18, 1988), 315쪽.

호장층에는 직전 및 향직, 무산계에 따른 급전이 행해진 것이 확실하지만 鄕役 수행에 큰 비중을 차지하였던 일반 향리들에 대한 급전 사실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其人0681)其人이란 國初에 향리의 자제를 뽑아 서울에서 인질을 삼고, 또 그 鄕事의 顧問에 대비케 한 者를 말하나 당시는 인질적 성격 뿐 아니라 호혜적 성격이 더 짙었던 것으로 본다.으로 선상되는 일부 記官層에게 其人戶丁이라 불리는 토지가 주어진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기인호정이란 다음 기록에서 살필 수 있듯이 기인에게 지급된 토지를 말한다.

3과공전 및 군인·기인호정은 각기 租 1두로 한다(≪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常平義倉).

이것은 각기 軍人田·其人田을 지칭한 것으로 기인에게 토지가 분급된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리고 수조의 양에서 軍人戶丁과 동등하게 1두를 義倉租로 내고 있었다. 수조의 양에서 군인호정과 동등하게 취급되었다는 것은 이 두 계층의 급전액이 비슷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기인역은 본질적으로 군역과 더불어 역 의무를 진 것이 분명하다. 국가는 이에 따른 보상으로서 기인에게 토지를 지급하였다. 즉≪高麗史≫에 보이는 다음과 같은 문종대의 其人選上 규정에는 그 대상인 兵正·倉正 이하 副兵正·副倉正 이상의 기관층이 足丁·半丁으로 편제되어 있다.0682)≪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銓注.

이와 관련하여≪高麗史≫兵志의 다음 기사가 주목된다.

국가에서 田 17결을 1足丁으로 삼아 군인에게 1丁을 지급하는 것은 옛날 田賦制度의 유법이다(≪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공민왕).

위 기사에서 족정·반정이란 대체로 전세 수취의 단위, 직역지 분급의 단위, 직역 差定의 요건 등을 주요 기능으로 가지는 전제상의 한 구성요소로 보아 좋다.0683)尹漢宅,<足丁制의 성격과 성립-신라·고려사회 농가파악방식의 새로운 전개->(서울大 碩士學位論文, 1983), 4∼7쪽. 따라서 기인선상의 대상인 병정·창정 이하 부병정·부창정 이상에 해당되는 향리는 족정·반정으로 묘사되는 일정량의 토지를 분급받았다고 할 수 있다.

기인 뿐만 아니라 同正職에 대해서도 토지가 주어졌던 것 같다. 고려시대는 정직에 준하여 산직인 동정직을 설정하고0684)金先洙,<高麗時代의 同正職>(≪歷史敎育≫11·12, 1969), 118∼120쪽. 그들에게 17결에서 25결의 토지를 지급하고 있었다. 따라서 동정직을 가진 향리들, 즉 호장동정·부호장동정 등에게도 그 직에 따라 토지가 주어져 향리의 경제적 기반을 이루었던 것으로 생각된다.0685)朴敬子,≪高麗時代 鄕吏硏究≫(淑明女大 博士學位論文, 1987), 93쪽. 그리고 부병정·부창정 이하의 향리들은 일반 농민과는 구별되는 신분상의 지위나 지방사무를 관장하는 末端吏로서 기존의 토지를 인정받아 그들의 경제적 기반으로 삼았던 것 같다.

전시과체제가 붕괴되는 고려 중엽 이후에는 향리층 자체 내에도 커다란 동요가 일어났다. 즉 무신란에 따른 광범한 사회변동과 오랜 기간 동안의 몽고의 간섭 등으로 고려 전기의 지배체제가 무너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향리 상층부는 과거 등을 통해 사대부로 중앙에 진출하였고 말단 향리들은 苦役化된 향역을 피해 유리함으로써 향리의 수가 격감하였다.≪高麗史≫刑法志 충렬왕 22년(1296)의 기사는 이를 확인시켜 준다.0686)“諸州縣及鄕所部曲人吏 無一戶者多矣 外吏 依勢避役者 悉令歸鄕 丁吏 亦令減數歸還”(≪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職制). 이러한 의미에서 고려 후기 향리외역전의 설정은 당시 격감된 향리의 수를 보충하기 위한 것이었고, 지금까지 급전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말단 향리층에게도 급전의 혜택을 주었던 것이라는 견해는 타당성을 갖는다.0687)李惠玉, 앞의 글, 318쪽. 그리고 이렇게 시행된 향리외역전은 과전법을 제정할 때에 人吏位田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어떻든 고려시대에 향리들에게 토지가 지급된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지급 액수나 지급 대상자의 범위 등을 구체적으로 밝힐 수 없는 상태이다. 다만 호장의 경우 직전이나 향직, 무산계 등으로 토지가 지급된 사실이 확인되지만, 기인층을 제외한 기타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향리들에 대한 급전 실태는 명확하지 않다. 그리고 향리의 직역은 세습적인 것이었으므로 향리전 또한 그 직역을 잇는 자손들에게 자연히 세습되었다.

다만 여기에서 이 향리전이 고려 전기 전시과 속에 포함되느냐 하는 문제가 주목된다. 다 아는 바와 같이 경종대 전시과 제정 이후 전시과의 지급 기준이 여러 차례 바뀌고 있으나 향리들에 대한 급전 규정은 문종대의 갱정전시과에 나타난 향직 일부에 불과하다.0688)≪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田柴科 문종 30년. 향리제의 승진규정이 마련되고 체계적인 운영을 꾀하던 시기에 향리 전반에 대한 급전이 이루어졌다면 어떤 형태로든 그 급여기준이 마련되었음직 하지만, 전시과 속에서 향리전의 규정은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 군인들이 전시과 수급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따라서 향리전은 전시과 내에 설정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0689)金鍾國, 앞의 글, 108∼112쪽.
武田幸男, 앞의 글(1966), 37∼39쪽.
그렇다면 고려 전기의 향리전은 어떤 것이었을까. 원래 향리는 그 지방의 토착세력을 대표하는 계층이었으므로 그들의 사회·경제적인 비중은 상당히 높았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위에 든 특수한 경우를 제외한 향리전은 향리 전반에 대한 국가로부터의 田地支給이라기 보다는 본래 소유한 토지에 대한 국가적 추인 내지는 묵인으로 보아 좋을 것이다.

<朴敬子>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