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Ⅰ. 전시과 체제
  • 4. 사전의 여러 유형
  • 6) 군인전

6) 군인전

軍人田은 경군 소속의 군인들에게 군역에 복무하는 대가로서 국가가 지급한 토지를 말한다.0690)軍人田에 관해서는 그 지급대상자나 경영방식을 싸고 李基白과 姜晋哲의 견해가 대립되고 있다. 또한 군인전 지급이 京軍에 한정되며 군인전의 설정지역이 部曲이었다는 주장과 함께 1/4 收租率이 적용되었다는 견해도 있다(吳一純,<高麗前期 部曲民에 관한 試論),≪學林≫7, 1985). 양반들이 관직에 복무하는 대가로 직전을 받았듯이 京軍 소속의 군인들은 군역이라는 직역에 복무하여 군인전을 받았다. 다시 말하면 국가는 군역을 확보하기 위한 경제적 뒷받침으로서 군인에게 일정한 토지를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군인전에 대한 지급규정이 처음으로 명시된 것은 목종 원년(998)의 이른바 改定田柴科에서이다.0691)≪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田柴科. 즉 각 과의 전시과에 대한 지급사항을 적고 이어서 군인전 지급에 대한 細則을 밝히면서 제17·18과에 속하는 馬軍과 步軍에게 각각 田 23·20결이라는 구체적인 지급 액수를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군인전 지급의 시기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자들이 이보다 앞섰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의 기록들을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우선 태조 23년(940)의 役分田 지급 때로부터 군인전 지급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즉 후삼국의 통일 과정에 공이 많은 朝臣과 軍士들에게 토지를 분급한 태조 23년의 역분전제도에서0692)위와 같음. 비롯되었다는 견해이다.0693)李基白,<高麗京軍考>(≪李丙燾華甲紀念論叢≫, 一潮閣, 1956;≪高麗兵制史硏究≫, 一潮閣, 1968). 이에 따른다면 여기에 나타나는 군사는 일반군인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군인전 지급의 기원은 태조 23년으로 상당히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지만, 이 때는 전체 군인을 대상으로 한다기 보다 일부 특수한 전공자에 국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0694)姜晋哲,<高麗初期의 軍人田>(≪淑大論文集≫3, 1963), 135쪽.

한편으로는 경종 원년(976)에 설정된 始定田柴科에서 그 기원을 찾기도 한다.0695)千寬宇,<閑人考-高麗初期 地方統制에 관한 一考察->(≪社會科學≫2, 1958;≪近世朝鮮史硏究≫, 一潮閣, 1979, 9·22쪽).
金鍾國,<高麗の府兵について>(≪立正史學≫23, 1959), 19쪽.
李基白,<高麗軍役考>(앞의 책), 146쪽.
이는 職散官에게 각 품에 따라 비로소 전시과를 지급했다는 기록 말미의 “이 해의 科等에 미처 들지 못한 자는 모두 田 15결을 지급한다”는 기록0696)≪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田柴科.에 주목한 경우이다. 즉 ‘未及此年科等者’ 안에 군인이 포함되며 이들은 일률적으로 15결을 지급받았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그러나 이 때는 아직 고려의 병제가 정비되기 이전이므로 기록 그대로 당시에 군인전시과가 마련되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0697)姜晋哲, 앞의 글, 133∼134쪽.

이처럼 군인전의 지급시기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어 학설이 일정치 않지만, 어떻든 군인전의 지급이 기록상 분명하게 나타나기는 앞에서 말했듯이 목종 원년의 개정전시과에서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 뒤 덕종 3년(1034)에 개정된 양반 및 군·한인전시과에 계승되었으나0698)≪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田柴科. 여기에서는 정확한 지급 액수가 밝혀지지 않았다. 이어서 문종 30년(1076)에 갱정된 양반전시과에서는 무인에 대한 전반적인 대우가 상승된 것과 함께 馬軍은 제15과로서 田 25결을, 役軍과 步軍은 제16과로서 田 22결을, 監門軍은 제17과로서 田 20결을 지급 받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0699)위와 같음.

그 후 약 300년이 지난 공민왕 5년(1356)의 교서에 의하면 국가에서는 田 17결을 1足丁으로 삼아 군인 1丁에게 지급한 사실이 밝혀져 있다.0700)≪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이것은 병종에 따라 25결부터 20결까지 차등을 두어 토지를 지급하던 전시과의 규정과는 다른 계통의 사료로서, 고려 초기의 군인전지급에 결부시킬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전시과 제도가 무너진 고려 후기에 들어와 1족정 17결로 병종과 관계없이 일률적으로 지급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따라서 군인전 지급 시기는 연구자에 따라 각기 그 견해가 다르지만, 목종 원년의 개정전시과의 명문화로써 군인전 지급 사실이 확인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지금까지 설명한 군인전 지급 관계의 국가 규정을 알기 쉽게 표로 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시 기 구 분 지급대상 및 액수
태조 23년(940) 役分田 軍 士
경종 원년(976) 始定田柴科 未及此年科等者 15결
목종 원년(998) 改定文武兩班及軍人田柴科 馬軍 17科 23결
步軍 18科 20결
덕종 3년(1034) 改定兩班及軍閑人田柴科 軍 人
문종 30년(1076) 更定兩班田柴科 馬軍 15科 25결
役軍·步軍 16科 22결
監門軍 17科 20결
공민왕 5년(1356) 敎 書 軍人 1足丁 17결

軍人田에 관한 국가의 규정

*李基白,<高麗軍役考>, 148쪽과 千寬宇,<閑人考>, 32쪽 참조.

그러면 실제로 군인들에게 지급된 토지는 얼마나 될까. 위 표에서 보면 군인들은 병종에 따라 20결∼25결을 차등있게 지급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만약 이 규정대로 군인들이 군인전을 지급받았다면 고려의 군인들은 매우 윤택한 생활을 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어느 경우에서나 적어도 20결 이상이었는데, 이 액수는 중앙의 하급 문무관료들의 전시보다도 훨씬 많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다액의 전지가 군인들에게 모두 지급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만일 규정된 전결수를 그대로 지급할 경우, 고려의 경군 조직인 2군 6위의 45領을 기준으로, 그 전체 병력은 4만 5천 명이 되므로, 군인에게만 100만 결 정도의 토지가 지급되어야만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것은 고려 초기 전국의 총 전결수와 비등한 면적이 된다.0701)고려 초기 전국의 田結數를 100만 결 내외로 추산하기도 한다(姜晋哲, 앞의 글, 165쪽). 따라서 이렇게 막대한 양의 토지가 군인들에게 지급되었으리라고는 보기 어렵다. 이러한 점은 전시과의 군인전 지급 규정에 의문을 품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군인전 지급 규정 자체는 인정하지만 국가가 군인들에게 지급하기로 한 규정상의 액수는 給田額의 상한선을 나타낸 것이거나 혹은 규정은 있으되 실시하지 못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0702)姜晋哲, 앞의 글, 165쪽.
李基白,<高麗軍役考>(앞의 책, 1968), 158쪽.
따라서 대개의 경우 군인들은 규정액에 훨씬 미달되는 전토만을 보유하여 빈궁한 생활을 면치 못하였던 모양이다.

諸衛軍人들로 집이 가난하고 名田이 부족한 자가 많은데 이제 변경에 征戍가 쉬지 않아 구휼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 戶部로 하여금 공전을 나누어 加給하게 하라(≪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靖宗 2년 7월).

위의 기록은 군인전이 규정보다 적게 지급되어 부족한 자가 대단히 많았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덕종 3년에 개정된 전시과가 시행된 지 불과 2년 뒤의 일로서, 실제 군인에게 지급된 토지가 부족하여 군인들의 생활이 곤궁하였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군인전이 국가로부터 직접 지급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앞에서 쓰인 지급이란 표현은 아마도 국가가 군인전을 따로이 지급해 주었다는 뜻이 아니라, 실은 군인들이 본래부터 소유해 온 민전을 그대로 인정하였다는 의미로 생각된다. 즉 국가는 군인들이 본래 소유했던 민전 위에 군인전을 설정하여 면세를 조건으로 하여 지급이라는 의제적인 형식 절차만을 밟은 것이 아닌가 한다.0703)≪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靖宗 2년. 본래 소유하고 있는 토지가 부족하고 생활이 곤궁하여 軍戶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없을 때 실제로 국가에서 일정한 면적의 공전을 더 지급하여 주었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라 보아 좋다.0704)鄕吏田의 경우 鄕吏들에게 새로운 토지를 지급했다기보다 기존의 토지소유에 대한 국가적 차원에서의 추인일 것이라는 점과 관련하여 볼 때 그와 같은 견해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군인전은 향역과 더불어 직역의 일종으로서 軍役의 부담자에게 지급하는 토지였다. 문무양반 전시가 수조지인 것처럼 군인전도 역시 수조지이므로 군인은 군인전의 경작자가 아니라 그 수조권자였다. 이는≪高麗史≫권 78, 食貨志의 다음 예종 연간의 기사에서도 확인된다.

州縣官이 宮院·朝家田의 경작에만 치중하고 군인전은 경시하여, 비록 좋은 땅이라 하더라도 그 경작자인 養戶들을 독려하지 않아, 군인들이 굶주림과 추위에 못이겨 도망하는 자가 많으니, 이 뒤로는 군인전을 우선으로 취급하라(≪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農桑 예종 3년).

이에 의하면 군인전의 경작을 勸督하는 것은 주현관이며, 그것의 경작은 佃戶가 담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군인전은 일정한 전호를 가진 수조지였다 할 수 있다.0705)군인전이 收租地였을 것이라는 점을 뒷받침하는 사료로서≪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田柴科 명종 18년의 기록이 보인다. 즉 간사한 州縣官과 농민들이 권세가에게 아첨하기 위하여 군인전 등을 함부로 하고 있으니 처벌하라는 내용이다. 이 역시 군인전은 군인경작지가 아니라 수조지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이 땅의 조세를 받는 자는 특정의 군인이며, 조세를 바치는 자는 농민경작자 즉 전호였다. 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하여 상반된 의견이 주장되어 왔다. 즉 고려의 병제가 軍班制였다는 학설과 府兵制였다는 학설이 그것이다.

고려의 병제가 군반제였다는 입장은, 군인전을 분급받은 사람은 전문적 직업군인인 軍班氏族으로서0706)≪高麗史≫권 8, 世家 8, 문종 18년 윤 5월. 비록 말단이기는 하지만 국가의 관료체계에 위치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이들은 군인전을 직접 경작하는 경작자가 아니라 수조권을 누리는 수조권자로서 경작농민에게서 수조하는 관료계층이라는 것이다.0707)李基白,<高麗京軍考>(앞의 책, 1968), 66쪽 및<高麗軍人考>(앞의 책, 1968), 108쪽 등에서 일관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또한 深谷敏鐵,<高麗時代の民田についての考察>(≪史學雜誌≫69-1, 86쪽)에서도 군인전은 收租權에 입각한 토지라 하였다. 한편 朴時亨,≪朝鮮土地制度史≫, 199쪽에서는 군인전을 받은 府兵軍人은 11세기 중엽 훨씬 이전에 군반씨족으로 고착된 특권층이라 하였다. 이렇게 보면 군인전에 붙어 있는 養戶도 전호로 파악하여 좋을 것이다.0708)洪承基,<高麗時代 私田에 대한 一考察>(≪斗溪李丙燾博士九旬紀念 韓國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7), 192쪽.
濱中昇,<高麗田柴科の一考察>(≪東洋學報≫63, 1981), 48∼51쪽.

이와는 달리 고려의 병제가 부병제였다는 관점에서 군반씨족을 농민이면서 동시에 군역을 담당하는 계층으로 보는 입장이 있다. 즉 군인전을 지급받은 자를 府兵 곧 농민으로 파악한 것이다. 이 경우 이들은 上番과 非番으로 조직되어 있어서 상번의 경우에는 正丁으로서 번상 시위하였으나 비번일 때에는 지방에서 농사에 종사하는 병농일치의 존재였다는 것이다. 이는≪高麗史≫兵志의 다음 기사를 토대로 한다.

州鎭縣에 入戍하는 군인들에게 本貫의 養戶 2인을 例給하게 하였다(≪高麗史≫권 81, 志 35, 兵 1, 문종 27년 3월).

이에 의하면 정정 군인 1명에 대해 양호는 2명씩으로, 번상 시위의 정정에 在鄕就農의 비번병이 2명씩 붙어 있었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군역교대의 兵務面에 나타난 번상의 정정에 대해 비번의 農兵이 가진 관계로서 병농일치의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 된다. 그러므로 농경에 종사하는 2명의 非番兵은 上番 시위의 正丁에 대한 양호가 되어, 그들이 한 군호를 구성하여 군호에 지급된 군인전의 경작을 담당했다고 인정된다. 즉 이 때 입역한 군호의 군인전은 그 가족의 노동력만으로 경작하기에는 벅찼으므로 양호로써 그것을 보충하였다고 이해된다.0709)姜晋哲, 앞의 글, 169∼174쪽.
―――,<私田支配의 諸類型>(≪高麗土地制度史硏究≫, 高麗大出版部, 1980), 128∼130쪽.
이와 같은 군인전의 경영방식은 양호제에서 전호제로 바뀌어 간 듯한 예종 연간의 기록에서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지만,0710)≪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農桑 예종 3년. 그 실효성에 대해서는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고려에서 군인은 군호를 단위로 하여 파악되었고, 군호는 원래 세습되었다.0711)한편 軍戶世襲에 대하여 軍人 파악의 대상을 신분세습적으로 고정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견해가 있다(姜晋哲, 앞의 글(1963), 149쪽). 그리고 군역의 세습과 함께 군인전도 세습되었다. 군인전은 적장자 상속의 원칙에 의하여 세습되며 이를 보통 田丁連立이라고 하는데,0712)旗田巍,<高麗時代における土地の嫡長子相續と奴婢の子女均分相續>(≪東洋文化≫22, 1957), 5∼14쪽;≪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法政大出版局, 1972, 326∼337쪽). 또한 朴時亨은 앞의 책, 199∼200쪽에서 고려가 田丁連立制를 수립한 이유를 첫째 군인의 계층이 점차 고정되어 갔다는 점, 둘째 武는 부자상전으로 계승될 가능성이 많다는 점에서 將이라는 개념도 고정되어간 점, 셋째 충성심과 희생심을 요구하는 군인을 우대하고 그들 대대로를 왕실의 지지자로 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는 점을 들었다.≪高麗史≫兵志의 다음 기록이 참조된다.

지금 국가가 태평하고 인물이 옛과 같으므로 마땅히 1령으로 하여금 각각 1, 2백명씩을 보충케 하고 京中의 五部坊里에서 各司의 공무에 종사하는 令史, 主簿, 記官과 5품 이상 품관의 子와, 역을 맡고 있는 賤口를 제외한 그 나머지의 양반 및 내외 百丁의 子로써 15세 이상 50세 이하를 선출하여 보충케 하고 選軍別監으로 하여금 전과 같이 田丁을 連立케 하라(≪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靖宗 11년).

여기에서 군인전이 田丁連立의 원칙에 입각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전정연립은 자자손손 세습되었기 때문에0713)≪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戶婚 靖宗 12년. 군인전도 이러한 전정연립의 원칙에 의하여 세습되었음이 분명하므로 永業田이었다.0714)李佑成,<高麗의 永業田>(≪歷史學報≫28, 1965), 7∼10쪽. 이렇게 군인전이 세습되었다는 것은 곧 군역의 세습을 의미한다. 그런데 군역을 세습할 자손친족이 없거나 혹은 도망하여 그 군액에 결원이 생기면 選軍에 의하여 이를 보충하였다. 이 경우 선군된 군인에게 군인전을 지급하게 되는데 이것을 選軍給田이라 불렀다.0715)李基白,<高麗軍役考>(앞의 책, 1968), 154∼155쪽. 그리고 이러한 군인전의 세습과 지급 등의 실무는 선군 혹은 그 長인 선군별감이 관장하였다.0716)≪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靖宗 11년의 “令選軍別監 依前田丁連立”이나≪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田柴科 문종 34년의 “選軍別監奏定 凡臨戰陷敵逃還人職田 勿奪仍給” 등이 이를 확인케 한다.

군역을 확보하기 위한 경제적 뒷받침으로 설정된 군인전은 군인가족의 생계 뿐만 아니라 군인 자신이 군역을 담당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 예컨대 식량·피복·무기 등을 마련하는데 소용되었다.

즉 군인의 식량을 군인전의 所出 중에서 하되 양호가 이를 공급하였으며,0717)≪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農桑 예종 3년. 또 군인 각자의 피복을 군인 스스로가 마련하였던 것이다.0718)≪高麗史≫권 22, 世家 22, 고종 4년. 단 貧乏者나 추위가 심할 때는 예외로 군인이나 防戍兵에게 국가가 供與한 경우도 있었다.0719)≪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문종 18년·30년. 따라서 무기도 스스로 마련해야 했을 것이니, 이렇게 보면 군인전 없이는 군역을 담당할 군인이 있을 수 없고 또 군인전은 곧 그들의 생계 및 피복·무기 등등의 구입에 소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군인전의 수급은≪高麗史≫食貨志에 다음과 같이 보인다.

20세에 달한 자에게 비로소 주어지며 60세가 된 군인은 군인전을 국가에 반납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의 자손 친척이 있는 경우에는 田丁遞立하고 없는 경우에는 監門衛에 소속시키며 70세가 되거든 口分田 약간만을 지급하고 나머지는 국가에 귀속시킨다. 그리고 자손이 없이 죽은 군인의 처나 전사자의 처에게는 모두 구분전 약간씩을 지급한다0720)여기에서 永業田은 자자손손 세습되는 토지이며, 口分田은 자기 당대 혹은 그 처의 당대에 한해 지급된 토지를 말한다(朴時亨, 앞의 책, 201쪽).(≪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序).

이에 의하면 고려의 군인은 20세부터 60세까지는 군역의 의무를 지니며 그 이후는 자손이 없는 경우 監門軍에 소속되게 하였다. 감문군은 궁성 내외의 제문 수위군으로서 비교적 안일한 군무에 속했다고 할 수 있다. 자손이 있는 경우는 물론 군역 세습에 의해 토지도 세습되어 영업전으로 이어졌다.

군인전시과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외군인 주현군은 어떤 형태로든 중앙의 군사적인 직접 지휘 아래 놓여 있었던 것 같다. 精勇·保勝이라는0721)精勇·保勝의 명칭은 州縣軍 뿐만 아니라 中央軍인 京軍에도 함께 나타난다. 그러나 精勇·保勝이 동시에 동원될 경우 京軍의 精勇·保勝이 주력부대로 州縣軍의 그것이 보조 혹은 勞役부대의 역할을 한다. 명칭으로 불리우는 주현군은 전투에 동원된다든지 동·서 양계의 방수에 동원된다든지 혹은 군사적인 工役에 동원되기도 하였는데 모두 중앙의 명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현군에 대한 국가의 대우는 경군에 준하는 것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무릇 州縣에는 각각 京外의 양반 군인의 家田과 永業田이 있는데 이에 姦詰한 吏民이 있어 權要에 의탁코자 하여 망녕되이 閑地라 칭하고 權要家의 이름으로 등기하여 둔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田柴科 명종 18년).

여기의 ‘京外兩班軍人家田永業田’을 경외양반과 경외군인의 가전과 영업전으로 해석하면 外軍人 즉 주현군은 京軍人과 같이 가전과 세습이 허용된 영업전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0722)李基白,<高麗州縣軍考>(앞의 책, 1968), 220쪽.
이밖에 주현군에 대해 給田이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점은 李佑成, 앞의 글, 9쪽과 千寬宇, 앞의 글, 45∼46쪽 및 姜晋哲, 앞의 글(1963), 155쪽 등에 언급되어 있다.
이 때 주현군의 영업전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국가가 지급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들이 원래 가지고 있던 자영지를 명목상 국가가 인정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따라서 이들 주현군에게 지급된 토지는 自耕이었을 것이다. 원래 자영지였을 뿐만 아니라 따로 그들에게 양호가 설정되지 않았으므로 이들은 자영농민으로서 병농일치의 군인이었다.

일품군은 노동부대로서 역에 동원되고 있었으며 호장이 향리직과 더불어 장교직을 겸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또한 중앙의 통제를 받고 있었을 것이므로 처우에 있어서는 보승·정용군과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건국 초기부터 국방을 위한 군대주둔지에 설치되었던 주현군 역시 중앙의 지휘를 받았던 것 같다.0723)李基白,<高麗兩界의 州鎭軍>(앞의 책, 1968), 260∼267쪽. 이들 주현군은 대략 중앙군의 양계 주진에 대한 방수군 주진에 토착해 사는 주민들, 혹은 州鎭 입거군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토착 주진군은 국경의 확장에 따른 국가의 사민정책에 의하여 이주한 농민들이다.0724)≪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5년 및 권 14, 世家 14, 현종 즉위년. 그리고 주진 입거군인은 완전히 토착화한 군인이라기보다는 본관 즉 原住地에 가족을 남겨 두고 주진에 입거한 군인이었다.0725)≪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우왕 14년. 이러한 주진군을 이루는 주요 구성원은 농민들이었다.

<朴敬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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