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Ⅰ. 전시과 체제
  • 4. 사전의 여러 유형
  • 7) 궁원전

7) 궁원전

궁원은 주로 왕태후를 비롯하여 왕후·夫人·궁주 등 왕의 妃嬪이나 왕족들이 거주하는 곳을 의미하며 宮은 원보다 더 격이 높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궁원에는 그것을 관리하는 직원이 배치되어 있고 또 田庄·魚梁·舟楫·鹽盆·奴婢 등의 재산이 부속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궁·원에 소속된 토지를 宮院田이라 하였으며1),)이것은 비빈을 비롯한 왕족들이 지배하는 토지였다. 이 궁원전에 대하여는 각기 서로 다른 두 견해가 있다.

하나는 궁원전을 宮院公廨田이라 하여 공전으로 파악하는 견해이다.2) 이에 의하면 고려 전시과의 규정에 양반의 경우와 달리 왕족들에게 田柴를 지급한

세칙이0726)旗田巍,<高麗の公田>(≪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法政大出版局, 1972).
―――,<高麗時代の王室の莊園>(위의 책).
周藤吉之,<高麗朝より李朝に至る王室財政>(≪東方學報≫10-1, 1939).
姜晋哲,<田柴科體制下의 土地制度>(≪한국사≫5, 국사편찬위원회, 1975).
朴龍雲,≪高麗時代史≫下(一志社, 1985).
보이지 않고 다만≪高麗史≫食貨志 田制 서문에서 궁원공해전을 지급한 사실만을 지적하고0727)白南雲,≪朝鮮封建社會經濟史≫上(改造社, 1937), 74∼76쪽.
旗田巍, 위의 글(1972a).
있다.0728)≪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序文. 다 아는 바와 같이 공해전은 2과공전으로0729)旗田巍, 앞의 글(1972a), 218쪽. 중앙 및 지방의 公廨, 즉 각급 관청에 소요되는 경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지급된 토지를 말한다. 따라서 공해전은 국가의 공유지로 편성되어 있었으며 이 범주에 궁원전도 포함되므로 궁원공해전이라 하였던 모양이다. 장택과 궁원을 일종의 공적인 국가기관으로 생각하여 여기에 지급된 토지도 공해전으로 인정한다는 견해이다. 공해전이 공전이냐 사전이냐의 문제는 아직 완전히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으나, 지금까지의 연구성과에 의하면 공해전을 공전 즉 2과공전이라고 보는 입장에서는 궁원전을 공전으로 분류할 수밖에 없다.

다른 하나는, 대부분의 연구자가 이에 속한다. 궁원전이란 궁원이 본래부터 소유하여 온 사유지로서 私田이라고 보는 견해인데,0730)李基白,<高麗軍役考>(≪高麗兵制史硏究≫, 一潮閣, 1968), 149쪽.
姜晋哲,<私田支配의 諸類型>(≪高麗土地制度史硏究≫, 高大, 1980), 136∼137쪽. 한편 洪承基,<高麗時代 私田에 대한 一考察>(≪斗溪李丙燾博士九旬紀念 韓國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7), 191∼194쪽에서는 宮院田은 私田이되 收租權이 국가에 있는 국유지였다고 하였다.
사전이란 지급된 토지로부터의 수조권이나 수세권이 개인이나 사사로운 기관에 주어진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으로≪高麗史≫食貨志에 여러 주현의 常平義倉의 법을 설명하는 과정에 서술된 다음의 기록이 참고된다.

모든 田丁의 數에 준하여 수렴하되 1과는 公田 1결에 租 3두를, 2과와 궁원·사원·양반전은 조 2두로 한다(≪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常平義倉 현종 14년).

이는 궁원전이 사원전이나 양반전과 같이 2과공전에 준하는 사전임을 확인시켜 준다. 그러므로 보통 궁원전이라고 하면 이 사유지로서의 궁원전을 의미하는 말로 이해되어 왔던 것이다.0731)姜晋哲,<高麗前期 ‘地代’에 대하여>(≪韓國中世土地所有硏究≫, 一潮閣, 1989), 86쪽에서 宮院田은 私有地 뿐만 아니라 收租地도 있는데, 수조지 중 대표적인 것으로서 內庄宅·寺院과 더불어 宮院에 분급된 莊·處·田을 들고 있다.

실제로≪高麗史≫后妃傳에는 大·小西院夫人 金氏에게 토지와 노비를 배치한 사실을 보여 주고 있어 궁원전시의 지급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0732)≪高麗史≫권 88, 列傳 1, 后妃 1, 太祖 大西院夫人 金氏·小西院夫人 金氏. 기타 다른 비빈들에게도 궁원전이 지급되었음직 하다. 또 현종 7년 궁인 김씨가 왕자를 낳았을 때 왕은 김씨에게 전장·노비·염분·어량 및 기타 패물을 주었으며,0733)≪高麗史≫권 4, 世家 4, 현종 7년. 문종 때에는 景昌院에 소속된 전시·노비 등을 興王寺에 이관한 사실이 있다.0734)≪高麗史≫권 8, 世家 8, 문종 12년. 이처럼 궁원에서 전시를 佛寺에 시납한 것은 흔히 있었던 일로서 이것은 왕족들이 소유한 사유지였으므로 가능하였다.0735)姜晋哲,<私田 支配의 諸類型>(앞의 책, 1980), 136∼137쪽.

그리고 궁원에는 많은 토지와 노비 등의 재산이 부속되고 있음은 위의 사료들에 나타난 바와 같다. 이처럼 국왕 혹은 국가가 궁·원에 대하여 토지 및 노비 등의 재산을 사급한 것은 왕족들에 대한 예우에서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궁원전은 양반들에게 내린 賜田 및 兩班功蔭田과 그 성격이 비슷하다 할 수 있으며 이것이 왕족들의 중요한 재정적 기반이 되었다. 이것은 궁원전을 왕족들의 토지로 간주하고 왕실 소속의 御料地와는 구별해서 생각하는 경우이다.0736)姜晋哲,<田柴科 體制下의 土地制度>(앞의 책, 1983), 157쪽. 이에 대해 궁원은 왕을 비롯한 왕족의 궁전이며 여기에 부속된 토지, 즉 궁원전 안에는 왕령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므로 궁원전은 일종 왕의 私領地이며 왕의 公領地인 왕실 어료지와는 별개의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0737)旗田巍, 앞의 글(1972a), 211쪽.

궁원전을 비롯한 사전은 다음≪高麗史≫식화지의 기록에서처럼 주현관이 직접적으로 간여하여 경영한 것 같다.

근래 州縣官이 삼가 宮院田·朝家田을 사람들로 하여금 耕種하게 하고 軍人田·其人田이 비록 기름진 땅이라 하더라도 마음을 써서 추수를 권하지 않고 또한 養戶로 하여금 양곡을 운반하게 하지 않으니 군인은 주리고 추위에 못이겨 도망하여 흩어졌다(≪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農桑 예종 3년).

위 기록에서 주현관이 마음을 써서 추수를 독려한 궁원전과 조가전의 경작에는 각기 佃戶가 정해져 있어서 군인전과는 달리 별 문제가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0738)濱中昇,<高麗田柴科の一考察>(≪東洋學報≫63-1·2, 1981), 48∼51쪽.
洪承基,<高麗時代 私田에 대한 一考察>(≪斗溪李丙燾博士九旬紀念 韓國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7), 192∼193쪽.
이처럼 궁원전의 경작은 주현관의 간여 하에 노비를 사역하던가 혹은 특권적인 지위를 이용하여 부근의 농민을 동원하여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외에 토지를 농민에게 대여하여 경작시키고 경작농민으로부터 토지 用益의 대가를 수취하는 방식도0739)≪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현종 13년. 있었을 터인데 이 경우 그들은 수확의 일부로 생계를 꾸리고 다른 일부를 궁원에 바쳤을 것이다. 어떻든 궁원은 많은 施地·노비·염분·어량 등에 이르기까지 각종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는 독립된 단위였던 만큼 독자적 경영도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궁원전의 확대는 주로 왕의 시지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더러는 민전을 탈취하여 궁원에 소속시킴으로써 원성을 자아내는 경우도 있었다. 현종 연간에 경상도 泗川에서 민전을 탈취하여 궁원과 장택에 소속시켰기 때문에, 농민의 경작지는 줄고 세 부담이 막대하므로 농민이 征稅를 견디지 못했다는0740)≪高麗史≫권 4, 世家 4, 현종 7년 및 권 88, 列傳 1, 后妃 1.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궁원전의 지급액수는 전시과의 규정에 나타나지 않으므로 그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高麗史≫食貨志 상평의창조에서 2과공전 및 사원·양반전과 같이 2두의 租率이 적용된 것으로 보아 3과공전에 준하는 군인전 보다는 많은 액수가 지급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군인전이 그 병종에 따라 23결에서 20결에 이르는 토지를 지급받았으므로 궁원전은 그 보다 많은 액수를 지급받았음이 확실하다. 그리고 이것은 일과성 지급에 그치지 않고 가끔 왕의 시지가 행해졌던 것 같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현종 7년에 延慶院主 김씨가 왕자를 낳았을 때 전장·노비 등을 준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때문에 궁원전은 처음 지급액이 얼마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으나 시지, 탈취의 방법으로 확대되어 상당히 많은 전토를 경영했던 것으로 보아 좋을 것이다.

이러한 궁원전은 다른 사전과 마찬가지로 세습이 허용되었다.0741)≪高麗史≫권 8, 世家 8, 문종 12년. 그러므로 궁원전시는 그것을 받은 宮主나 院主 등이 죽으면 그 소생 자녀들에게 적당히 분배되고 또 먼 후손들에게까지 전해 내려가 영구히 상속되는 토지였다.

궁원도 사원과 마찬가지로 庄·處를 소유했던 듯한 기록이≪新增東國輿地勝覽≫에 보인다.

處라고 칭한 것도 있고 莊이라 칭한 것도 있어 각각 宮殿·寺院 및 內庄宅에 분속되어 그 세를 바쳤다(≪新增東國輿地勝覽≫권 7, 驪州牧 古跡 登神莊).

이것은 궁전·사원에도 장·처가 분속되어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궁전은 왕이나 왕족이 거주하는 곳으로 궁원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따라서 궁원에 장·처가 존재하였음은 명백하나 그것이 왕실 어료지로서의 장·처의 성격과 같은 것인지 어떤지 현재로선 그 실체를 구명할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욱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朴敬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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