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Ⅰ. 전시과 체제
  • 4. 사전의 여러 유형
  • 8) 사원전
  • (1) 사원전의 형성과 그 성격

(1) 사원전의 형성과 그 성격

고려시기에 불교는 국가의 유지 존속을 위해 많은 기능을 수행하였다. 태조 왕건 이래 역대 국왕은 정도의 차가 있기는 하지만 불교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고 여러가지 정책적 배려를 했다. 또한 귀족이나 농민도 불교를 신앙으로 신봉하였다.

이러한 사정을 전제로 해서 사원의 경제는 발달할 수 있었다. 사원은 농지를 경영하기도 하였으며, 상업 활동이나 고리대 행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역시 사원의 가장 중요한 경제적 기반은 농지의 경영에 있었다. 사원은 농지경영을 통해 농민을 지배하였으며, 이를 통해 획득한 부를 기초로 상업활동이나 고리대에 종사하는 것이 가능하였다.0742)고려시기 사원경제와 관련한 연구로는 다음과 같은 논문이 있다.
旗田巍,<高麗朝における寺院經濟>(≪史學雜誌≫13-5, 1932).
白南雲,≪朝鮮封建社會經濟史≫上(東京;改造社, 1937), 809∼859쪽.
劉敎聖,<高麗寺院經濟의 性格>(≪白性郁還曆紀念 佛敎學論文集≫, 1959).
최길성,<1328년 통도사의 농장경영형태>(≪력사과학≫4, 1961).
李載昌,<麗代 寺院領 擴大의 硏究>(≪佛敎學報≫2, 1964).
閔丙河,<高麗時代 佛敎界의 地位와 그 經濟>(≪成大史林≫1, 1965).
武田幸男,<高麗時代における通度寺の寺領支配>(≪東洋史硏究≫25-1, 1966).
安日煥,<高麗時代 通度寺의 寺領支配에 대한 一考>(≪釜山大敎養課程部論文集≫4, 1974).
李載昌,<寺院經濟의 發達>(≪한국사≫6, 국사편찬위원회, 1975).
―――,≪高麗寺院經濟의 硏究≫(亞細亞文化社, 1976).
崔森燮,<高麗時代 寺院財政의 硏究>(≪白山學報≫23, 1977).
姜晋哲,<私田支配의 諸類型>(≪高麗土地制度史硏究≫, 高麗大出版部, 1980).
金潤坤,<麗代의 寺院田과 그 耕作農民-雲門寺와 通度寺를 중심으로->(≪民族文化論叢≫2·3, 嶺南大, 1982).
李相瑄,<高麗寺院經濟에 대한 考察>(≪崇實史學≫1, 1983).
李炳熙,<高麗前期 寺院田의 分給과 經營>(≪韓國史論≫18, 서울대, 1988).

사원의 농지는 다양한 계기에 의해 형성되었다. 우선 이전 시기부터 가지고 있던 토지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있었다. 불교를 수용한 삼국시기 이후 사찰은 상당한 규모의 농지를 지배하고 있었는데,0743)安啓賢,<韓國佛敎史>上(≪韓國文化史大系≫6, 高麗大民族文化硏究所, 1970).
李炳熙,<三國 및 統一新羅期 寺院의 田土와 그 經營>≪國史館論叢≫35, 1992).
그 토지를 고려시기에도 그대로 지배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고려는 이전 시기의 토지소유관계에 대해 전면적인 재조정을 실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전부터 사찰이 소유하고 있던 농지는 그대로 지배할 수 있었다. 다만 사찰이 지배하고 있던 수조지는 부분적인 개혁이 없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국왕이나 귀족, 일반농민들은 불교를 신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전지를 사원에 시납하는 일이 흔하였다. 사원에 토지를 시납하는 예는 특히 고려 후기에 많이 찾아지는데, 구체적으로는 龍寶院·水嵓寺·看藏寺·神福寺·艶陽禪寺·普光寺·上院寺·報法寺 등이 보인다.0744)李炳熙,≪高麗後期寺院經濟의 硏究≫(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2), 23∼25쪽.

사찰은 또한 개간이나 매득에 의해서도 농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사찰이 농지를 매득한 구체적인 예로는, 신라 하대의 海印寺와 開仙寺를 들 수 있다.0745)旗田巍,<新羅·高麗の田券>(≪史學雜誌≫79-3, 1970;≪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法政大學出版局, 1972), 176∼184쪽. 특히 해인사의 경우 농지 매득 사실을 기록한 문기를 조선 전기까지 보관하고 있었다. 개간에 의해 농지를 확대한 예는 특히 고려 후기에 많이 찾을 수 있는데, 水嵓寺·看藏寺·乾洞禪寺·重興寺 등을 들 수 있다.0746)李炳熙, 앞의 책, 27∼29쪽.

그리고 국가 내지 국왕에 의한 토지의 사급을 통해서도 사찰은 농지를 마련하고 확대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특히 고려 태조는 사찰에 많은 농지를 사급하였다. 전쟁하는 과정에서 승려의 도움을 받았을 때 그 승려가 속한 사원에 토지를 사급해 주는가 하면, 태조가 직접 사원을 중건하거나 폐허화된 사원을 복구하고서 토지를 지급하기도 하였다.0747)廣學大德·大緣三重 형제 2인이 931년 태조를 따라 상경하여 隨駕焚修했는데, 이에 태조는 그들이 속한 堗白寺에 田畓 약간결을 지급하였으며(≪三國遺事≫권 5, 神呪 6, 明朗神印), 또한 태조는 東征할 때 寶壤이 적을 제압하는 술책을 가르쳐 주었다고 하여 그가 거처하고 있던 雲門寺에 전 500결을 지급하였다(≪三國遺事≫권 4, 義解 5, 寶壤梨木). 能如禪師가 속한 直指寺에도(<直指寺事蹟>,≪直指寺誌≫, 亞細亞文化社, 271∼273쪽), 希朗이 속한 海印寺에도 전지를 사급하였고(<海印寺古籍),≪朝鮮寺刹史料≫上, 495∼496쪽), 尙州의 龍巖寺에도 전지를 지급하였다(≪新增東國輿地勝覽≫권 28, 慶尙道 尙州牧 佛宇). 태조대 이후에도 토지를 사급한 예로는 성종대의 長安寺,0748)≪新增東國輿地勝覽≫권 47, 江原道 淮湯都護府 佛宇. 현종대의 玄化寺,0749)≪高麗史≫권 4, 世家 4, 현종 11년 8월 병술.
<玄化寺碑>(≪海東金石苑≫上, 亞細亞文化社, 1976), 1021쪽.
문종대의 興王寺와 大雲寺가 찾아진다.0750)≪高麗史≫권 8, 世家 8, 문종 12년 7월 기묘·18년 4월 경오.

사원은 이상과 같은 여러 계기에 의해 토지를 마련하였다. 계기가 다양하듯 이 토지의 성격도 한 가지일 수가 없었다. 그 토지는 성격상 소유지와 수조지로 나눌 수 있겠다. 고려시기는 사적인 토지소유가 전개된 사회이기 때문에 사원도 토지를 소유하는 하나의 주체일 수 있었다. 사원이 하나의 토지소유 주체로서 양안에 기재되는 경우는 흔한 일이었다. 개간이나 매득, 신자의 시납에 의해 토지를 마련한 경우는 대개 사찰의 소유지로 되었다.

또한 사원은 수조지를 가지고 있었다. 수조지를 사원이 지배하고 있는 사실은 여러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종 12년(1058) 7월에 궁원의 하나였던 景昌院에 소속하고 있던 토지가 흥왕사에 이속되었다가0751)≪高麗史≫권 5, 世家 8, 문종 12년 7월 기묘. 그 22년 뒤인 문종 34년 3월에 호부 마음대로 萬齡殿에 지급하였다.

刑部가 아뢰기를, ‘戶部가 마음대로 興王寺의 전토를 萬齡殿에 지급하였으니, 죄 주기를 청합니다’라 하였다. (이에) 制에, ‘호부 관리의 직을 삭탈하고 전리에 放還하라’고 하였다(≪高麗史≫권 9, 世家 9, 문종 34년 3월 임신).

호부가 흥왕사의 허가도 없이 마음대로 그 토지의 귀속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흥왕사의 소유지가 아니라 수조지였기 때문이다. 흥왕사의 소유지였다면 호부가 자의적으로 처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우왕 원년(1375) 3월에도 여러 사원의 田租를 취해서 군비에 충당하였던 사실이 찾아진다.0752)≪高麗史≫권 82, 志 36, 兵 2, 屯田 신우 원년 9월. 만약 사원이 순수하게 사적인 방법으로 획득한 토지, 즉 사원의 소유지였다고 하면 국가는「取」대신에「科斂」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수조지였기 때문에 국가는 특별한 경우에 수조권자인 사원의 수조권 행사를 일시 중단시키고 대신 전조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의 사료는 사원이 수조지를 지배하고 있음을 보다 분명히 보여준다.

辛裔가 元의 명을 받아 楡岾都監을 주관하고 있었다. 그 때 姜居正과 尹衡이 有備倉官이 되어 왕명으로 사원전을 거두었는데 楡岾寺의 田도 또한 公收를 당하였다. 유점도감이 유비창에 牒을 보내 전을 되돌려 주도록 하니, 이에 (강)거정 등이 이르기를, ‘사원전은 이미 왕명으로 本倉에 소속시켰으니 함부로 되돌려 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유점도감이 신예에게 호소하였다(≪高麗史≫권 125, 列傳 38, 姦臣 1, 辛裔).

辛裔가 원나라의 명을 받아 楡帖都監을 주관하고 있었는데 有備倉官이 왕명으로 사원전의 조를 수취한 결과 楡帖寺의 전조도 역시 관에서 수취하였다는 것이다. 유점사의 토지가 국가의 권력을 매개로 하지 않는 순수한 사적인 소유지라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국가가 그 토지에 대한 일정한 지배권, 다시 말하면 그 토지에서의 수조권을 지급하였기 때문에 그 토지를 왕명에 의해 환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수조지는 국가와의 관련 하에서 획득하고 지배하는 것이 가능한 토지였다. 국가와 긴밀한 관련을 갖는 사원으로는, 우선 국왕의 眞影을 모시는 眞殿이 설치된 사원을 생각할 수 있겠다. 흥왕사의 경우는 眞殿寺院으로서 수조지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므로, 다른 진전사원도 국가로부터 수조지를 지급받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0753)≪高麗史≫권 83, 志 37, 兵 3, 國宿軍에 따르면, 眞殿이 설치된 사원은 安化寺·弘圓寺·興王寺·天壽寺·大雲寺·重光寺·弘護寺·玄化寺·國淸寺·崇敎寺·乾元寺·奉恩寺 등 12개이다. 이 밖에 許興植은 佛日寺·嵩善寺·眞觀寺·靈通寺·宣孝寺·龍興寺·賢聖寺·妙蓮寺·神孝寺·普濟寺를 추가로 지적하고 있다(<佛敎와 融合된 高麗王室의 祖上崇拜),≪東方學志≫45, 1983;≪高麗佛敎史硏究≫, 1986, 87쪽). 대개의 경우 진전사원은 개경 주위에 분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국가에 의해 특별히 賜額된 사원의 경우에도 사액의 성격상 수조지 지급이 수반되었을 것이다. 사액사원으로는 安化寺,0754)≪高麗史節要≫권 8, 예종 13년 4월. 慈濟寺,0755)≪高麗史≫권 6, 世家 6, 靖宗 11년 2월. 孝信寺,0756)≪高麗史≫권 21, 世家 21, 희종 2년 9일 갑오. 旻天寺0757)≪高麗史≫권 33, 世家 33, 충선왕 원년 9월 갑진. 등이 찾아진다. 그리고 국왕이나 신료들이 늘 중시하는 사원인, 태조대에 건립된 사원도 토지를 분급받았으리라 생각한다. 이 사원은 裨補寺院이라고 칭해졌다.0758)국가로부터 수조지를 받은 眞殿寺院, 賜額寺院, 태조대에 건립된 비보사원을 하나의 체계로 이해할 수 있는 기준을 모색해 볼 필요가 있다. 모두 국가와 관련하여 수조지를 받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체계로 정리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아마도 주지를 국가에서 파견하는 사원, 혹은 國設寺院, 혹은 후기에 자주 언급되는 이른바 비보사원을 하나의 체계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이 글에서는 일단 이를「裨補寺院」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소유지나 수조지와는 성격이 다른 것으로 莊·處田이 있었다. 장·처전이 사원에 소속되어 있음은 고려 말에, “料物庫에 속한 360개의 장·처전 가운데 사원에 시납된 것은 요물고에 되돌리라”한 데서0759)≪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알 수 있다. 장·처전에서는 사원은 田租만이 아니라 庸調에 상응하는 것도 징수하였다.

長生標가 설치된 사원에서는 장·처전과 유사한 지배를 수행할 수 있었다. 예컨대 장생표가 설치된 통도사의 영내에 있던 직간은 곧 처간으로 상정된다.0760)최길성, 앞의 글. 따라서 장생표가 설치된 사원이 영내의 민을 지배하는 형태는 사찰이 장·처를 지배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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