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Ⅰ. 전시과 체제
  • 4. 사전의 여러 유형
  • 8) 사원전
  • (4) 사원경제 확대에 대한 대책

(4) 사원경제 확대에 대한 대책

고려 후기에 사원이 농지를 확대하고 농민에 대한 지배를 강화시켜 가면서, 국가와 지배층, 그리고 농민과의 충돌이 심각해져 갔다. 그러한 갈등은 정치문제로 부각되어 이를 해소하기 위한 많은 논의가 있었으며 대책들이 모색되었다. 정부는 정부대로, 신료층은 그들대로 각 계층이 처한 사회적 위치에 따라 각각 다양한 대책을 마련하고 있었다. 사원 자체의 팽창을 막기 위한 방책을 제시하기도 하였고, 사원의 여러 경제행위에 대한 제한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국가나 신료층이 취하는 수습안의 하나가 사원 신설의 억제와 출가에 대한 제한이었다.

공민왕 원년(1352)에는 사원의 건립을 금하였으며,0807)≪高麗史≫권 38, 世家 38, 공민왕 원년 2월. 성리학자인 李穡은 중세 이래로 불교도가 더욱 번성하여 “五敎兩宗이 이익을 추구하는 소굴이 되었으며, 川傍과 山曲에 사찰이 없는 곳이 없다”고 당시의 실정을 지적한 뒤 새로이 창건하는 사찰을 모두 철거하라고 건의하였다.0808)≪高麗史≫권 115, 列傳 28, 李穡.

승려의 증가, 특히 하급승려의 증가는 곧 국역부담자의 감소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국가의 부세제 운영을 전반적으로 동요시키는 것이었다. 국가가 승려, 특히 하급승려의 증가에 대해 취할 수 있는 대책은 부분적으로 역사에 동원하거나 군에 차출하는 방법이었다. 즉 免役이라는 특권의 박탈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양인농민의 감소나 승려의 증가를 막을 수 없었다. 양인농민의 감소에 대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처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度牒制의 운영을 강화시키는 것이 있었다.

충숙왕 12년(1325) 2월에는 州縣의 吏는 세 명의 자녀가 있어도 함부로 승려가 될 수 없도록 규정하였고, 또한 자녀가 많더라도 반드시 관에 고해 도첩을 받은 후 자녀 한 명의 머리를 깎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어기는 경우 자녀와 부모 모두를 처벌하도록 하였다.0809)≪高麗史≫권 85, 志 39, 刑法 2, 禁令 충숙왕 12년 2월.

공민왕 원년(1352)에 이색은 이미 승려가 된 자는 도첩을 주고, 도첩이 없는 자는 군오에 충당하라고 건의하였다.0810)≪高麗史≫권 115, 列傳 28, 李穡. 같은 해 2월에는 도첩이 있어야 승려가 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0811)≪高麗史≫권 38, 世家 38, 공민왕 원년 2월. 같은 왕 8년 12월에는 함부로 승려가 되는 것을 다시 금하였다.0812)≪高麗史≫권 85, 志 39, 刑法 2, 禁令 공민왕 8년 12월. 또한 20년 12일에는 도첩을 받지 않고서는 출가할 수 없도록 규정하였음에도 담당관이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후로 승려가 되고자 하는 자는 丁錢 50필의 布를 납부한 후에 祝髮하는 것을 허용하고, 위반하는 자는 師長·父母를 처벌하며 향리로부터 津·驛의 公私의 역을 지고 있는 사람은 (출가하는 것을) 모두 금한다”0813)≪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職制 1 공민왕 20년 12월.는 초강경 조치를 취하였다.

이처럼 공민왕대부터는 국가나 신료들이 세속인의 출가를 엄격히 제한하자고 주장하였으며, 실제로 제한조치를 취하였지만, 출가 자체를 금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공양왕 때가 되면 불교비판론자들은 도첩이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모든 승려를 환속시키고, 불교를 철저히 없애자는 주장을 피력하였다.0814)≪高麗史節要≫권 35, 공양왕 3년 5월.
≪高麗史≫권 120, 列傳 33, 金子粹.

사원의 경제활동이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었고, 이것에 대해 중앙 정계에서 논란이 거듭되면서 폐해를 없애기 위한 여러 가지 대책이 제기되고 있었다. 이에 사원의 경제 활동 자체에 대해서도 일정한 제한 조치를 취하였는데, 사원의 농장경영, 농민에 대한 전조 濫徵, 양인 농민의 招匿행위에 대한 구폐책이 그것이다.

정부가 취한 대책은 田民에 대한 辨整으로 요약할 수 있다. 사원의 농지를 둘러싼 분규가 있을 때는 법적으로 처리하였다. 사원이 사패를 빙자하여 주인이 있는 토지를 탈취하는 일이 없도록 조치하였으며, 양인을 노비로 삼은 경우에도 推刷하였다. 공민왕대에 신돈의 요청으로 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한 후 중외에 榜諭한 내용도, 사원전 등 토지를 탈점한 것을 원래 주인에게 되돌리고 ‘認民爲隷’한 자는 모두 양인으로 환원하라는 것이었다.0815)≪高麗史≫권 132, 列傳 45, 叛逆 6, 辛旽.

정부는 또한 사원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즉 亡寺가 되어 사찰이 국가를 위해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면, 국가는 그 토지를 몰수하였다. 때때로 그 토지를 다른 사찰에 再折給해 주는 일도 있었지만0816)명종대에 醴泉의 龍門寺에는 近州縣의 亡寺田 30頃이 지급되었으며, 禮安의 龍壽寺에는 古寺田柴 10결이 지급되었다(李炳熙,<高麗中期 寺院의 助成과 經濟運營>,≪李元淳敎授停年紀念 歷史學論叢≫, 1991, 129∼130쪽). 원 간섭기부터는 국가에서 수취하여 국가수요에 충당하였다.0817)≪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公廨田柴.
≪高麗史≫권 82, 志 36, 兵 2, 屯田.

그리고 나아가 때때로 사원의 수조권 행사를 제한하기도 하였다. 항상적으로 시행되는 것은 아니었고, 국가의 재정적 어려움을 타개하고자 하여 취한 조치였지만, 사원의 수조권 행사에 위협을 줄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사원의 田租를 公收하는 조치도 원 간섭기부터 취해지고 있었다.0818)≪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충선왕 후 원년 3월 및 권 82, 志 36, 兵 2, 屯田.
≪高麗史節要≫권 30, 신우 2년 윤 9월.

농민과 사원의 갈등에 대해서는 불법적인 전조의 濫收를 제한하려고 노력하였다. 아직 사원이 전주·지주로서 농민을 지배하는 구조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威化島 회군 후 이성계 일파가 정권을 잡게 되면서 신료들이 제기한 사원의 경제운영을 둘러싼 주장은 판이한 것이었다.

창왕의 즉위 교서에서 “料物庫에 속한 360의 莊處田으로 선대에 사원에 시납된 것은 모두 요물고로 환원하라”0819)≪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는 조치가 있었다. 이후 사전개혁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나타나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사원전에 대한 의견도 제기되었다. 趙浚은 田制改革에 관해 3차에 걸쳐 상소하였는데 그 가운데 제1차 상소에서 사원전에 대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祖聖 이래의 5大寺 10大寺 등의 國家裨補所로서, 京城에 소재한 것에는 廩給하고, 외방에 소재한 것에는 柴地를 지급하라.≪道詵密記≫이외의 신라·백제·고구려 시대에 창건한 寺社와 새로이 조성한 寺社에는 지급하지 말라(≪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즉 사원전은 국초 이래의 5대사·10대사 등0820)10대사는 法王寺·慈雲寺·王輸寺·內帝釋院·舍那寺·普濟寺·新興寺·文殊寺·圓通寺·地藏寺를 가리키는 듯하다(≪三國遺事≫권 1, 王曆 1). 國家裨補所로서 경성에 있는 사찰에게만 지급하고 비보소 가운데 외방에 있는 사찰에는 전지는 지급하지 말고 사지만을 지급하라는 것이다. 그리고≪道詵密記≫에 기재되어 있지 아니한 신라·백제·고구려의 사찰과 고려시기에 새로이 건립한 사찰에는 전지와 시지를 모두 지급하지 말라고 주장하였다. 그 동안 사찰이 지급받고 있었던 전지를 극히 일부의 사찰에게만 인정하고 나머지의 사찰에게는 전혀 토지를 지급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불교 사원경제 그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종래의 사원의 경제기반을 현저히 약화시키려는 조치였으며, 처음으로 제시된 사원경제에 대한 적극적인 개혁안이었던 것이다. 토지지급의 대상이 되는 사원은≪道詵密記≫에 기재되어 있는 裨補寺院이었다.

이후의 주장들은 조준의 주장보다 훨씬 적극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 해 12월에 典法判書인 趙仁沃 등은 사원 전조의 官收官給을 주장하였다.0821)≪高麗史節要≫권 33, 신창 즉위년 12월.

전제개혁 논의는 일단 공양왕 3년 5월 과전법에 의해 마무리되었다. 과전법에는 사원경제와 관련한 조문이 3개 찾아진다. 양반 과전을 중심으로 한 개혁이었기에 사원전에 대해서는 미봉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

종전의 公私 田籍을 거두어 모두 檢覆하여 眞僞를 조사하고 舊에 따라 손익하여 陵寢·倉庫·宮司·軍資寺田 및 寺院·外官職田, 廩給田, 鄕·津·驛吏田과 軍·匠·雜色의 田을 정한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종전의 전적을 거두어 모두 진위를 조사하고 옛 것에 따라 損益하여 정한다는 것이다. 기준이 되고 있는 ‘舊’, 즉 옛 것이란 조준의 1차 상소에서 기준이 되고 있는≪道詵密記≫일 것이다. 이에 기재되어 있는 사찰, 즉 비보사원의 여부가 토지지급의 기준이었을 것이다. 裨補之籍에 탈법적으로 등재된 사원의 경우에는 수조지를 몰수당하였을 것이다. 비보사원이 아니면서 수조지를 점유하고 있는 경우에도 수조지를 몰수당하였다고 보인다. 결국 비보사원 여부를 고려한 수조지 재분급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소유지는 아직 과전법에서 정리되지 않았다. 사원전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은 아니었지만 과전법에서는 이처럼 일정하게 사원전이 정리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원에 토지를 시납하는 것을 금하였으며,0822)≪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또한 僧尼 자신이나 자손이 토지를 받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0823)위와 같음.

공양왕 3년(1391)과 4년에는 사원의 노비와 관련한 논의도 있었고, 그와 관련한 조치도 취해졌다. 즉 3년에는 郎舍가 상소하여 사찰에 노비를 시납하여 복을 구하는 현실을 지적하고 노비를 사원에 시납하지 못하도록 건의하여 이를 시행한 바 있다.0824)≪高麗史≫권 85, 志 39, 刑法 2, 奴婢. 노비를 사원에 시납하는 예는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일로서 시납노비는 사원의 중요한 인적 기반이 되는 것이었다. 4년에는 재차 人物推辨都監에서 奴婢決訟法을 마련하면서 사원에 노비를 시납하는 것을 엄히 금하였다.0825)위와 같음.

사원의 토지나 노비에 대한 철저한 개혁은 고려 말기까지도 실시되지 못하였다. 조선이 창업되고 나서야 비로소 본격적인 개혁에 착수할 수 있었다.

<李炳熙>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