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Ⅰ. 전시과 체제
  • 4. 사전의 여러 유형
  • 9) 식읍 및 기타의 사전
  • (1) 식읍

(1) 식읍

고려시기 食邑은 귀족의 경제기반의 하나였다.0826)고려시기 식읍제에 관해서는 아래의 논문이 참조된다.
河炫綱,<高麗食邑考>(≪歷史學報≫26, 1965;≪韓國中世史硏究≫, 一潮閣, 1988).
姜晋哲,≪高麗土地制度史硏究院≫(高麗大出版部, 1980), 164∼172쪽.
李景植,<古代·中世의 食邑制의 構造와 展開>(≪孫寶基博士停年紀念 韓國史學論叢≫, 1988).
식읍을 수여하는 것은 왕실의 本支를 돈독히 하고 왕가의 蕃屛으로서 공고한 위치를 갖게 한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0827)李景植, 위의 글, 134쪽. 식읍은 왕자·왕손 등 종친이 주된 수여대상이었고, 왕실의 척신이나 공로가 큰 고위관료들에게도 지급되었다. 식읍을 받는 대상은 다음 표와 같이 작위에 따라 지급액이 규정되어 있었다.0828)≪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3, 爵.

작 위 식 읍 품 계
國 公
郡 公
縣 侯
縣 伯
開國子
縣 男
3,000호
2,000호
1,000호
700호
500호
300호
정2품
종2품
정5품
정5품
정5품
종5품

식읍 지급 규정표

그런데 이 규정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예컨대 문종대 文正은 長淵縣 開國伯에 봉해지면서 식읍 1,000호 食實封 200호를 받았고,0829)≪高麗史≫권 95, 列傳 8, 文正. 또 예종대 尹瓘은 鈴平縣 開國伯에 봉해지면서 식읍 2,500호 식실봉 300호를 받았다.0830)≪高麗史≫권 96, 列傳 9, 尹瓘. 이것 은 위 표의 백에 대한 식읍 지급규정과 다르다. 또한 같은 개국백이면서 사람에 따라, 또는 시대에 따라 지급되는 식읍수는 차이가 매우 심하였다.0831)國伯 食邑 食實封表(河炫綱, 앞의 글, 356쪽).

年 代 食貨 食實封例 出 典
현 종
숙 종
문 종
예 종
예 종
원 종
원 종
(淸河縣 開國) 伯 식읍 700호
樂浪郡 開國伯 식읍 1,000호 식실봉 200호
長淵縣 開國伯 식읍 1,000호 식실봉 200호
鈴平縣 開國伯 식읍 2,500호 식실봉 300호
邵城郡 開國伯 식읍 2,300호 식실봉 300호
翼陽郡 開國伯 식읍 1,000호 식실봉 100호
慶源郡 開國伯 식읍 1,000호 식실봉 100호
고려사 권 94 崔士威
고려사 권 97 金景鏞
고려사 권 95 文 正
고려사 권 96 尹 瓘
고려사 권 127 李資謙
고려사 권 130 金 俊
고려사 권 102 李藏用

식읍을 받았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명목에 그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예컨대 광종대 王輅이 송에 갔을 때 宋帝에게서 ‘食實封 300戶’를 받은 경우,0832)≪高麗史≫권 2, 世家 2, 광종 16년. 또 서희가 송에 갔을 때 宋帝가 국왕에게 식읍을 더해 준 경우는0833)≪高麗史≫권 2, 世家 2, 광종 23년. 명목상의 것으로서 실제로는 지급되지 않은 虛封이었다. 그 밖에 숙종의 왕자인 帶方公 俌가 ‘推忠廣義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保 守司徒兼尙書令 帶方公’에 책봉되면서 식읍 3,000호 식실봉 300호를 받았고, 죽은 뒤에 식읍 5,000호, 식실봉 500호를 받았는데,0834)≪高麗史≫권 90, 列傳 3, 宗室 1, 帶方公 俌. 이는 현실적 의미가 없는 영예에 불과한 것이었다.

국초로부터 무신집권기에 이르는 약 2세기 반 동안 실제로 식읍을 수여한 예로는≪高麗史≫열전에 수록되어 있는 것만도 경종 때에 崔知夢을 東萊侯로 봉하여 식읍 1,000호를 지급한 것을 비롯해서 대략 15건 정도이다. 이들 사례의 대부분은 식실봉이 없는 300호 내지 1,000호에 이르는 식읍을 받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 가운데 식실봉을 받은 것으로는 문종대의 文正(식읍 1,000호, 식실봉 200호), 예종대의 尹瓘(식읍 2,500호, 식실봉 300호), 예종대의 金景庸(식읍 3,000호, 식실봉 700호), 의종대의 金富軾(식읍 1,000호, 식실봉 400호) 등이었다.0835)姜晋哲, 앞의 책, 169쪽. 식읍은 허봉인 경우가 많았고, 식실봉의 경우에도 규정액 만큼 수여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식읍제도는 통일신라는 물론 삼국 초에도 있었으며, 기록상으로는 기원전 9년 이전으로 소급된다.0836)≪三國史記≫권 13, 高句麗本紀 1, 瑠璃明王 11년 4월. 이미 고려 이전 시기부터 식읍을 지급한 경우는 상당히 많았다. 고려시기에는 목종에서 의종 초에 이르는 약 1세기 반 동안 (대체로 11세기에서 12세기 중엽)에 가장 활발하게 식읍이 수여되었다. 무신이 정권을 장악한 이후에는 종실·척신 등에 대한 식읍의 수여가 단절되었고, 이들 대신 무신실권자(최씨·김씨)에게 식읍이 수여되었다. 충렬왕대부터는 식읍의 대부분이 왕실에 점유되었다.

그런데 조선 초에 이르러 식읍은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였다. “公·侯·伯의 이름을 혁파하니 감히 중국과 비길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0837)≪太宗實錄≫권 1, 태종 원년 2월 기유. 하여, 봉작제가 완전히 혁파된 것을 전후해서 소멸되어 갔다. 端宗 원년(1453) 10월에 首陽大君이 癸酉靖難의 元勳이란 명목으로 공신호와 함께 식읍 1,000호 식실봉 500호를 받았으나,0838)≪端宗實錄≫권 9, 단종 원년 11월 계해. 나중에 자신이 왕위에 오르자 “전에 식실봉이었던 民戶는 내년부터 각각 本役으로 돌아가게 하라”는0839)≪世祖實錄≫권 2, 세조 원년 9월 무술. 傳旨를 호조에 내렸는데, 그 이후로는 식읍 지급 기사를 찾아볼 수가 없다.

식읍은 전토나 노비와 구별되는 것이었다. 이성계가 공양왕 원년 12월에 공신호를 받고 ‘開國忠義伯’의 작위를 받으면서 식읍 1,000호·식실봉 300호·전 200결·노비 20구를 받은 사실과,0840)≪高麗史≫권 45, 世家 45, 공양왕 원년 12월. 태조 원년(1392) 9월에 裵克廉·趙浚이 식읍 1,000호·식실봉 300호·전 220결·노비 30구를 받은 사실에서0841)≪太祖實錄≫권 2, 태조 원년 9월 갑오. 역시 토지나 노비와 구별되어 식읍이 지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식읍을 구성하는 단위는 戶였다. 토지면적이 급여 단위가 아니었다. 식읍 몇 호, 식실봉 몇 호 등의 형식으로 수여되었다. 일정 고을 내의 민호 가운데 일부를 떼어 봉호로 지급하는 것이었다. 물론 식읍 기사 가운데는 고을 자체가 수여된 것으로 되어 있는 것도 있다. 甄萱에게 楊州를 식읍으로 준 것이나,0842)≪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18년. 金傅에게 慶州를 식읍으로 준 것,0843)위와 같음. 고종대에 崔怡의 식읍이 晋州였다고 하는 것0844)≪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怡.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 경우도 실제 내용은 호수로써 헤아려 지급한 것이었다. 예컨대 김부가 식읍으로 경주를 받았다고 하지만, 경주고을 전역을 그가 완전히 지배하고 수취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김부는 실제로는 경주의 호 가운데 8,000호를 받았다.0845)≪高麗史節要≫권 1, 태조 18년 12월. 8,000호의 봉호는 경주에 있던 호 전체가 아니었다. 따라서 최이나 견훤도 김부와 마찬가지로 지급된 고을의 일부 호를 식읍으로 받았을 것이다.

식읍을 구성하고 그 형태를 이루는 봉호는 자연호가 아니었다. 수양대군의 경우 단종 원년 10월 식읍 1,000호 식실봉 500호를 받았는데, 이 가운데 실제로 수여받은 봉호는 실봉으로서의 식실봉 500호였다. 이 500호는 “擇富實戶 每 一戶 一名充定” 즉 부실호로서 500호를 택하고 그 가운데서 매 호마다 1명씩을 봉호로 충당하여 정하는 형태를 취하였다.0846)≪端宗實錄≫권 9, 단종 원년 11월 계해. 조선 초는 식읍제가 완전히 소멸된 시기이기 때문에 이전 시기에도 동일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원칙은 같았을 것이다.

식읍은 국가의 행정체계 내에서 존재하였고, 행정단위인 군현 등 고을과 직접적인 관련없이 여기저기 산재되어 있었다. 한 사람의 식읍은 규모의 대소에 따라 수 개 고을 내에 여기저기 산재하는 유형도 있었고, 단지 한 개 고을 내의 일부에 그치는 형태도 있었다.

식읍을 받은 자는 식읍주로서 봉호로 책정된 식읍민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고 수취하였다. 수취의 내용은 租·庸·調 등으로서,0847)河炫綱, 앞의 글, 372∼373쪽.
姜晋哲, 앞의 책, 170쪽.
李景植, 앞의 글, 139∼140쪽.
국가가 민인에게 부과하던 賦稅目 전부였다. 최이의 식읍에서 ‘晋州祿轉·稅布·徭貢’이 징수됨은0848)≪高麗史節要≫권 16, 고종 37년 정월. 그 예였다. 녹전은 租에, 세포와 요공은 각기 調와 庸에 해당하는 세였다. 충선왕이 雞林·福州·京山府를 자신의 식읍으로 삼고 郎將 仇煥을 파견하여 수세를 독려한 사실을 ‘督其賦稅’라 하여0849)≪高麗史≫권 34, 世家 34, 충선왕 3년 8월 경오. 부세로 표현함도 세의 내역이 이러하였기 때문이었다.

봉호의 선정은 가호의 토지·인력·기타 재산 등의 소유상태를 고려하여 국가가 집행하였다. 빈한한 가호는 물론이고, 토호나 양반관료 등 지배층의 가호는 대상에서 제외되었을 것이다. 결국 평민호 가운데 조·조·용을 감당할 수 있는 비교적 안정된 호가 중심이었을 것이다.0850)李景植, 앞의 글, 143쪽.

식읍은 봉호로서 지급되었지만, 봉호가 소유한 토지도 대상이 되었다. 장·처나 궁원 소속의 전지, 각급 행정 군사기관의 전지, 그리고 양반관료나 각종 국역 부담자의 전지 등에는 설정할 수 없었다. 충혜왕 후 5년(1344) 5월, 이제현이 都堂에 상서하여 3식읍이 설치된 후 백관 녹봉을 갖추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를 혁파하여 광흥창(좌창)에 환속시켜 군신의 봉록에 충당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했던 것도0851)≪高麗史≫권 110, 列傳 23, 李齊賢. 식읍이 토지와 관련된 사정에서 나온 주장이었다.

봉호에게서 부세를 수취하는 방식은 중앙기관을 거치지 않고 식읍주가 직접 징수하는, 곧 식읍에서 식읍주에게 직접 납부하는 형식을 처하였다. 고종 37년(1250) 정월에 국왕이 최이의 식읍인 진주의 녹전·세포·요공을 崔沆家에 직접 납부하라고 하였지만 항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고 한 기사에서0852)≪高麗史節要≫권 16, 고종 37년 정월. 이 원칙을 알 수 있다. 왕이 계림·복주·경산부를 식읍으로 삼고 낭장 구환을 보내 부세를 독촉한 사실에서도0853)≪高麗史≫권 34, 世家 34, 충선왕 3년 8월 경오.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식읍의 조세를 식읍주가 직접 수취하였지만, 행정상 해당 지방관청에서 식읍주의 조세 수취에 협조함과 아울러 그 물량을 감독하면서 수납과정에서도 직접·간접으로 독려하고 협력하였을 것이다.

식읍은 봉호수로 구성되고 설치에 따른 이해 상반도 커서, 그 소지에는 여러 제한이 따랐다. 우선 수취는 수여된 봉호의 수에 대해서만 허용되었다. 그러므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해당 호에서 새로 증가하는 인구에 대해서는 수취가 허락되지 않았다. 식읍 소지에 따른 또 하나의 중요한 제약은 그 기한이 수봉자 본인 당대에 한하고 자손의 전수는 불가하다는 점이었다.0854)李景植, 앞의 글, 144쪽.

식읍에서 들어오는 수입은 대단하였다. 조·조·용을 징수하는 것이므로 일반 수조지에서 들어 오는 수입보다 물량면에서 많았다. 식읍주는 봉호의 인력과 징수한 수입을 바탕으로 하여 식읍 내에서 자신의 사적인 경제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새 전지를 개척 개발하는 한편 전지를 매득함으로써 소유지의 규모를 확대할 수 있었고, 노비의 다량 확보도 가능하였다.0855)李景植, 위의 글, 145∼146쪽.

그러나 이러한 대부분의 식읍들은 地主佃戶制, 田主佃客制가 기본적인 토지제도로 기능하던 고려시대에는 그 경제적 의미를 상실하고 있었다. 지배층은 이미 식읍을 주된 경제기반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오히려 토지에 대한 경제적 욕구가 높았다. 식읍의 수취대상 구성단위가 호였던 것은 당초 식읍이 등장할 때의 부세 징수 단위가 人·戶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부세제는「地多人少」한 조건 곧 노동인력이 중시되고 있던 훨씬 이전 사회단계에서 시행될 수 있는 제도였으며, 인구 압박과 토지 겸병이 사회·경제·정치적 중요 현안으로 떠오른 고려시대에는 적합하지 못한 것이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