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Ⅰ. 전시과 체제
  • 5. 전시과 체제 하의 토지지배관계에 수반된 몇 가지 문제
  • 1) 토지국유제설의 문제
  • (2) 화전일랑 등의 토지국유제설에 대한 비판

(2) 화전일랑 등의 토지국유제설에 대한 비판

和田一郞의「土地國有制論」은 아직 근대적 토지사유의 제도가 미숙한 당시의 우리 나라 사회실정에 편승해서 농민들에게 갑자기 근대적 토지소유법 이론을 적용시킴으로써 그들로부터 토지를 빼앗아 방대한 국유지를 설정하려고 했던 조선총독부의 이른바 토지조사사업의 목적·이유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수립된 것으로, 당시 토지소유관계의 실태를 순수히 학문적으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분석한 결과 얻은 결론은 물론 아니었다. 더구나 그것은 공전제도가 통일신라기 이래로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별다른 발전의 계기를 보이지 않은 채 거의 그대로 존속했다고 생각한 비역사적 관찰이었으며, 또 公田·私田·民田에 대한 그의 이해도 사실과는 맞지 않는 잘못된 것이었다.0869)旗田巍, 앞의 글(1964;앞의 책, 304∼305쪽).
姜晋哲, 앞의 글, 331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은 의외로 컸었던 것이지만, 196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부터 여러 학자에 의해 다각도로 그의 이론에 관한 비판이 가해지기 시작하였다. 그와 같은 비판은 우선 고려의 전시과체제 내에도 자손에게 상속이 허용된 양반영업전으로서의 공음전시와 직역의 세습을 통해 이루어지는 향리·군인의 영업전과 같은 사유지적 성격의 토지가 존재하였다는 실증으로,0870)李佑成,<高麗의 永業田>(≪歷史學報≫28, 1965, 4∼10쪽;≪韓國中世社會硏究≫, 一潮閣, 1991). 한 큰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어서 사전은 田租의 귀속 문제와 함께 토지 그 자체가 사유지적 성격이 농후하다는 의미도 지닌다는 견해가 제시되었고,0871)姜晋哲,<高麗前期의 公田·私田과 그의 差率收租에 대하여-高麗 稅役制度의 一側面->(≪歷史學報≫29, 1965), 26∼27쪽. 공전 또한 국가의 직영지 뿐 아니라 단순한 국가수조지도 포함하는 등 다양한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0872)旗田巍,<李朝初期의 公田>(≪朝鮮史硏究會論文集≫3, 1967;앞의 책).
―――,<高麗의 公田>(≪史學雜誌≫77-4, 1968;위의 책).
종래의 이해 방식은 수정을 면치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토지국유제론에 대한 비판은 무엇보다도 일반백성들의 소유지인 민전의 실체가 드러남에 따라 더욱 본격화하게 되었다. 고려 때는 신라의 帳籍文書에 보이는 烟受有田畓과 계통을 같이하는 광대한 토지가 존재하였는데, 그것이 곧 민전으로서 이는 백성들이 조상 대대로 전래하여 오는, 글자 그대로 人「民」의「田」이었다. 이와 같은 민전의 존재가 확인되기 시작한 것은 역시 1965년 경부터였거니와,0873)姜晋哲, 앞의 글(1965), 16쪽 및<高麗時代의 土地制度>(≪韓國文化史大系 Ⅱ-政治·經濟史-≫, 高大民族文化硏究所, 1965), 1303쪽. 이에 앞서 深谷敏鐵도 관심을 보였지만(<高麗時代의 民田에 대한 考察>,≪史學雜誌≫69-1, 1960) 그의 연구는 民田의 실체를 해명하는 일보다 오히려 均田制의 존재를 실증하려는 데 중점이 두어진 것이었다. 그것의 주된 경작자는 보통 白丁으로 알려진 농민층이었다는 점도 곧 밝혀졌다.0874)旗田巍,<高麗의 民田에 대하여>(≪朝鮮學報≫48, 1968;앞의 책, 168∼171쪽). 즉 고려시대에는 白丁農民들이 자기네의 소유지인 민전을 경작하여 국가에 일정한 양의 조세를 납부하고 그 나머지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된 것이다.

지금 말했듯이 민전의 소유자는 주로 백정농민층이었다. 그러나 한편 그렇다고 하여 이 민전의 소유자층에서 양반이나 향리들을 빼놓을 필요는 없다. 이들도 分給收租地 이외에 家産으로 전해오는 토지를 가지고 있었고 거기에서 얻은 수확의 일부를 국가에 조세로 납부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인데, 그렇다면 그 토지도 곧 민전이라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姜邯贊이 軍戶에 寄進한 田 12결과0875)≪高麗史≫권 94, 列傳 7, 姜邯贊. 李承休가 외가로부터 전해 받은 田 2결0876)李承休,≪動安居士集≫雜著, 葆光亭記. 및 李奎報의 소유토지0877)洪承基,<奴婢의 土地耕作과 그 社會經濟的 地位 및 役割>(≪韓國學報≫14, 1979;≪高麗貴族社會와 奴婢≫, 一潮閣, 1983, 90∼92·96∼101쪽). 등은 양반의 민전이었다고 생각되며, 또 외방의 人吏들이 권세가에게 뇌물로 주었다는 所耕田0878)≪高麗史≫권 85, 志 39, 刑法 2, 禁令 충렬왕 11년 3월 下旨. 역시 향리의 민전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와 같이 민전은 양민 뿐 아니라 양반과 향리, 심지어는 노비층까지도 소유하고 있었는데,0879)有井智德,<高麗朝에 있어서 民田의 所有關係에 대하여>(≪朝鮮史硏究會論文集≫8, 1971), 41∼46쪽.
金容燮,<高麗時期의 量田制>(≪東方學志≫16, 1975), 89쪽.
이들의 토지를 한결같이 민전으로 파악한 것은 국가의 견지에서 보아 그 소유층 모두가「民」으로 인식되었던 데 기인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민전은 사적 소유권이 보장되어 있는 토지였다. 이 점은 물론 수취와 관련이 깊은 것이겠지만 民田主가 그 토지의 주인으로서 토지대장인 양안에 명시되고0880)金容燮, 위의 글, 87∼91쪽. 그리하여 각자의 소유권이 국가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는 사실에서 잘 엿볼 수 있다. 민전은 이와 같이 사적 소유지였으므로 그에 대한 매매나 증여·상속 등 관리 처분권도 소유주의 자유의사에 맡겨져 있었다. 토지를 매매한 실례로는 고려 말에 閑散軍으로 뽑힌 농민이 마필을 구하기 위해 땅을 판 이야기와,0881)≪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신우 3년 6월. 鄭仲夫의 반란 때에 화를 면한 林椿이 湍州에서 땅을 사게 되는 이야기0882)林 椿,≪西河集≫권 4, 寄山人悟生書. 이 실례는 일찍이 李佑成, 앞의 글(1965b), 19쪽;앞의 책, 30쪽에서 지적된 바 있다. 등 다수가 찾아진다. 그런데 이러한 토지 매매는 이미 신라 때부터 관행되어 온 것 같다. 당시의 예로는 뒤에 설명하는 바 원성왕의 능역을 조성하기 위하여 땅을 사들인 이야기와, 전남 담양 소재의 開仙寺址 石燈記에 보이는 買田券을 들 수 있다.0883)旗田巍,<新羅·高麗의 田券>(≪史學雜誌≫79-3, 1970;앞의 책, 177∼184쪽).

다음 증여의 사례로서, 신라 때의 것으로는 귀족승려 智證이 자기 소유의 田莊 12區 500結을 사찰에 기진한 사실이 알려져 있고,0884)李佑成, 앞의 글(1965a), 222∼223쪽;앞의 책, 9쪽. 고려시기의 것으로 는 金剛山麓의 호수인 三日浦의 埋香碑에 전하는 寄進田券을 통해 살필 수 있다.0885)旗田巍, 앞의 책, 190∼196쪽. 그리고 위에 든 강감찬이나 외방 인리의 경우도 유사한 예라 하겠다.

상속에 관한 사료는 더욱 많이 전해지고 있다. 현재 그들 자료의 해석과 관련하여 상속의 형태에 대해서는 논자간에 얼마간의 이견이 노정되어 있기는 하지만,0886)武田幸男,<高麗 田丁의 再檢討>(≪朝鮮史硏究會論文集≫8, 1971).
崔在錫,<高麗朝에 있어서의 土地의 子女均分相續>(≪韓國史硏究≫35, 1981;≪韓國家族制度史硏究≫, 一志社, 1983).
李羲權,<高麗의 財産相續形態에 관한 一考察>(≪韓國史硏究≫41, 1983).
申虎澈,<高麗時代의 土地相續에 대한 再檢討>(≪歷史學報≫98, 1983).
하여튼 민전이 자자손손에게 상속되는 토지였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이는 달리 祖業田·世業田·父祖田 등으로도 불리었던 것이다. 역시 이러한 명칭으로 불리운 토지 중에는 功蔭田 등도 포함되어 있었겠지만 대개의 경우 그것은 민전을 지칭하는 말이었다고 생각된다.

민전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이 民産의 근본이었지만 국가 재정의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토지였다. 국용과 녹봉의 재원이 이 곳에서 거두어들이는 조세로서 충당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위해서 대략 20만 결 정도의 민전이 배당되어 있었지마는,0887)姜晋哲,<高麗時代의 農業經營形態-田柴科體制下의 公田의 경우->(≪韓國史硏究≫12, 1976;앞의 책, 221∼223쪽). 이들 이외에 순수히 군수에만 충당되던 양계지방의 민전과, 지목은 다르나 그와 성격을 같이하는 토지까지를 합하면 전체 면적 중에서 민전이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 다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이처럼 고려 때는 전국의 토지 가운데에서 민의 소유지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수조권의 이론에 의할 때 공전이 되었지만, 소유권의 측면에서 보면 사전이었는데, 매매나 증여·상속 등 관리 처분권은 위에서 설명했듯이 민전주가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성격의 민전이 광범하게 존재한 이상 和田一郎과 그의 추종자들이 주장했던 바 일체의 토지는 국유·공유였다는 토지국유제설이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은 저절로 명백해진다. 앞머리에서 밝힌 것처럼 公田制度=土地國有制理論은 잘못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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