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Ⅰ. 전시과 체제
  • 5. 전시과 체제 하의 토지지배관계에 수반된 몇 가지 문제
  • 1) 토지국유제설의 문제
  • (3) 유물사관 학자들의 토지국유제설에 대한 비판

(3) 유물사관 학자들의 토지국유제설에 대한 비판

유물사관 학자의 대표격인 白南雲은 일제하라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우리 나라의 역사가 세계 여러 나라와 유사한 사회발전단계를 거쳤다는 논리를 폄으로써 일제 관학자들이 내세운 정체성론을 정면으로 부정하였을 뿐 아니라 한국사의 체계적 인식에도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의 논리가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두고 세워진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많은 비판 역시 받고 있다. 그의 이론은 구체적인 역사 사실들을 검토한 기초 위에서 얻은 결과가 아니라 史的 唯物論에서 말하는 사회발전단계설을 먼저 받아들인 후 우리의 역사를 거기에 뜯어 맞춘 매우 도식적인 것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그가 거론하고 있는 토지국유제설에 대해서도 동일한 비판이 가능할 것 같다. 백남운이 토지국유제설을 펴게 된 것은 앞서 설명했듯이 마르크스의 동양사회론 즉 “아시아사회에 있어서의 토지사유의 결여, 국가가 최고의 지주이며 조세와 지대는 일치한다”는 명제를 그대로 수용한 데서 비롯하였을 뿐, 그것을 뒷받침할 사실의 검증 부분은 매우 소홀하게 다루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벌써 백남운의 토지국유제설은 취약성을 지니지마는, 그렇다면 그가 전제로 한 바 국가가 최고의 지주이며, 조세와 지대는 일치한다는 명제의 타당성 여부는 어떠한가. 과연 고려 내지는 그를 전후한 사회에서 국가가 전국적인 규모에 걸쳐 최고의 지주로 군림한 시기와 또 조세와 지대가 일치한 시기가 현실적으로 있었을까. 이 점에 있어서도 결론은 역시 부정적이다.

앞 대목에서 지적한 대로 고려시대의 토지 지목 가운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일반 민의 소유지인 민전이었다. 거기에 지목은 다르지만 민전과 동질적인 토지 위에 설정되었다고 생각되는 군인전이나 왕실·궁원·사원의 莊·處田을0888)姜晋哲, 위의 글. 아울러 염두에 두고 보면 그 비중은 한층 커지게 된다. 이러한 토지들은 규정된 액수의 租만 납부하면 소유자인 민전주가 그것을 경영·관리 또는 처분하는 데 있어서 국가로부터 어떤 중대한 통제를 받지는 않았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토지에 대해 국가가 지주적 위치에 있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갈 줄로 안다.

물론 고려 때에도 국가적 토지소유의 범주에 속하는 토지는 존재하였다. 公廨田과 屯田·學田·籍田 등 국가의 직속지=공유지에 설정된 토지가 그에 해당하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지목에 속하는 국가공유지는 전체의 토지 면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별로 큰게 아니었다. 전시과에 의해 분급되던 양반 과전에 대하여는 현재 국유지=공유지 위에 설정되었다는 학설과 민전 위에 설정되었다는 학설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지마는, 비록 전자의 입장을 취한다 하더라도 그 역시 전체의 토지 가운데에서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못되었다. 통일신라나 조선시대에도 대개 그러하였지만 고려 때에는 국가공유지의 비율이 이처럼 비교적 미약한 편이었다. 국가가 지주의 행세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이 비교적 적은 면적의 공유지에 한하였을 뿐 전국적인 규모에 걸친 토지에 대하여 그러한 위치에 군림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음 조세와 지대가 일치했느냐의 문제도 비슷한 사정이었던 것 같다. 먼저 민전의 경우 고려 때는 대체적으로 소농민들이 자가경영의 형태를 취하여 경작을 하고 있었으며, 그리하여 거기에서 얻은 수확물 가운데 규정된 액수의 조세를 국가에 납부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지대가 아니라 지세에 해당하는 것이었다.0889)地代 및 地稅에 대해서는 姜晋哲,<高麗前期의 地代에 대하여-田柴科體制下에서의 ‘地代’의 意義와 그 比重->(≪史學≫52-3·4, 1983;≪韓國中世土地所有硏究≫, 一潮閣, 1989) 참조. 당시의 민전은 이와 같이 국가에 대하여 단순히 지세를 내는 토지였거니와, 이들이 전체 면적 중에서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함은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다. 물론 민전주 중에는 자기가 경작할 수 있는 양을 초과하여 소유했거나 또는 어떤 개인사정으로 인해 남에게 소작을 주어 경영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소작제경영이 이루어졌을 때 양자 사이에는 1/2조를 수취하는 지대가 성립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民田主와 借耕者 사이의 관계인 것이며, 이 때에도 국가는 다만 민전주가 지대로 받은 전조의 일부를 지세로써 수취했을 뿐이었다. 국가가 민전에서 거두어들이는 조세는 지대와 일치하지 않는 것이었다.

궁원전과 사원전 같은 사전을 소작시켰을 경우에도 지대의 수취가 이루어졌으나, 이 역시 그의 소유주인 궁원·사원과 경작농민 사이에 성립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궁원전과 사원전은 국가에 내야 할 조세를 면제받는 토지였으므로 거기에는 국가의 징세권이 개입될 여지조차 없었다.

그러나 아마 양반과전이 국유지=공유지 위에 설정되었다는 학설을 따를 경우에 거기에서 징수하는 조세는 지대와 일치한다고 볼 수 있는 여지가 없지 않을 듯하다. 양반과전의 조는 본래 국가에 귀속되어야 할 것을 과전의 수급자인 양반들이 국가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대신에 수조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한 일이 있듯이 이 양반과전은 전체의 경작지 가운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다지 큰 게 아니었다.

국가의 직속지=공유지 위에 설정되었던 공해전 등의 경우 가령 소작제로 경영되고 있었다고 한다면 양반과전과 유사한 논리로써 거기서 거두는 조세는 역시 지대와 일치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도 또한 차지하는 면적의 비중이 크지 않았을 뿐더러, 그 경영방식도 소작제가 아니라 농민의 요역노동에 의한 직접 경영이 중심이었던 것 같다.0890)姜晋哲, 앞의 글(1976). 그렇다면 그 수확물은 전부가 국가 기관에 수취되었겠는데, 이것은 이른바 노동지대와 비슷한 일면도 없지 않으나 역시 그렇게 간주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경작자에게 국가 소유의 토지를 지급하고 그 지급한 토지에 대한 면세와 같은 대가의 교환이 없이 무상의 요역노동에 의하여 경작된 국가 공유지의 수확을 지대의 개념으로 파악하는 데는 무리가 따르는 것이다.

고려시대 토지제도의 역사적 사실은 마르크스가 말한, “국가가 최고의 지주이며 조세와 지대는 일치한다”는 명제와 서로 맞지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명제에서 출발한 백남운의 土地國有說도 옳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0891)이상의 설명은 주로 姜晋哲, 앞의 책, 339∼348쪽에 의거한 것이다.

그런데 해방 이후 북한에서 활동하고 있는 金錫亨은 토지에 대한 국가의 부분적 소유권 이론을 펴고 있어0892)金錫亨,<조선 중세의 봉건적 토지소유에 대하여>(≪조선 봉건시대 농민의 계급구성≫부록, 1957;日譯本, 1960). 주목된다. 즉, 그는 양반이나 양인농민의 토지사유는 인정을 하되, 그 사유는 국가의 강력한 지배와 제약을 받는 불완전한 사유이며, 이 불완전한 사유의 제한된 부분에 대한 국가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봉건적 토지소유관계를 대별하여「봉건국가 ↔ 양인농민」의 대립으로 도식화되는 범주와「양반지주 ↔ 노비·소작농민」의 대립으로 도식화되는 범주로 구분하였다. 이 중 제1범주에 속하는 양인농민은 자기 토지를 자기가 경작하는 소유주이며, 제2범주에 속하는 노비·소작농민은 양반지주의 토지를 借耕하는 사람들로, 그 토지의 소유주는 물론 양반지주였다. 따라서 국가는 기본적으로 토지의 소유지에서 배제되는 셈인데, 그러나 국가는 양인농민 뿐 아니라 양반지주의 토지소유에 대하여 커다란 통제·제약을 가할 수 있었다. 양인농민 및 양반지주의 토지소유에 대한 봉건국가의 이러한 통제·제약의 권한을 그는 제한된 부분의 국가 소유권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기서의 토지소유권은「봉건국가+양인농민」또는「봉건국가+양반지주」라는 형태로 통일되어 2중으로 계열화된 구조를 나타낸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국가의 제한된 토지소유권을 인정하고, 그 같은 견지에서 국가의 지주적 존재를 용인하는 한편, 조세와 지대는 일치하는 것으로 파악해도 좋다는 시각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에도 역시 많은 불안이 따른다. 토지에 대한 국가의 통제·제약의 권한을 소유의 개념으로 바꾸어 놓는다는 것 자체가 무리한 논리일 뿐더러, 토지에 대한 국가의 제한된 부분의 소유를 인정한다고 해서 조세와 지대는 일치한다는 명제가 그대로 성립한다고 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른바 국가의 부분적 소유권이라는 것도 그 실질의 내용이 어떤 것이냐를 따져보면 매우 모호하다. 어떤 객체에 대한 소유권이라고 하면 그것을 임의로 사용·수익·처분할 수 있는 권리를 전제로 하는 것인데, 우리 나라의 土地所有史上 아무런 불법이나 하자가 없는 민간의 토지에 대하여 국가가 자의로 그 같은 권리를 행사했다는 기록은 잘은 몰라도 찾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김석형의 주장 역시 마르크스의 명제에 충실하려는 학문의 소치로서 우리 나라의 중세 토지소유관계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0893)이상의 논지는 아래의 논문을 참조하여 서술한 것이다.
姜晋哲, 앞의 글(1980), 348∼350쪽.
―――,<‘高麗·李朝社會論의 問題點’ 再檢討-前近代國家의 民衆支配에 대하여->(≪李丙燾九旬紀念 韓國史學論叢≫, 1987;≪韓國中世土地所有硏究≫, 一潮閣, 1989, 384∼390쪽).

한편 근자에는 종래와 해석을 달리한 다음과 같은 새로운 이론도 제기되어 또한 주목된다. 그것은 日人 학자인 中村哲에 의하여 제기된 것으로, 아시아적 예속농민이나 토지점유노예·농노 등은 모두 토지와 본원적 결합관계에 있어서, 그것을 매개로 하여 토지소유의 體現者로 존재하였다. 이들은「自己勞動에 입각하는 토지소유」의 체현자들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노동에 입각하는 토지소유의 체현자들은 생산수단과 본원적인 결합관계에 있었으므로 다시 다른 개인이나 공동체 혹은 국가에 의하여 생산수단의 일부로서 소유되어 있었다 한다. 이것이「타인의 노동의 착취에 입각하는 소유」였다. 이와 같이 전근대사회에서는「자기노동에 입각하는 소유」와「타인의 노동의 착취에 입각하는 소유」가 불가분하게 결부되어 하나의 통일된 소유를 형성하는 것이 토지소유의 일반적인 형태였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가≪資本論≫제3권 지대론에서 내세운 바, 아시아사회에서는 토지의 사적 소유가 결여되어 있고 조세와 지대는 일치한다는 명제에 관한 종래의 해석은 잘못된 것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토지사유의 결여를 주장한 것은 영주적 대토지, 즉「타인의 노동의 착취에 입각하는 소유」의 부재를 지적한 것이지, 농민의 소유 다시 말해서「자기노동에 입각하는 소유」의 부재를 含意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그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0894)中村哲,≪奴隷制·農奴制의 理論≫(東京大學出版會, 1977).
宮嶋博史,<朝鮮史硏究와 所有論-時代區分에 대한 一提言->(≪人文學報≫167, 1984), 26∼31쪽.
이들에 관한 소개는 姜晋哲,<社會經濟史學의 도입과 전개>(≪國史館論叢≫2, 1989;≪韓國社會의 歷史像≫, 一志社, 1992, 113∼115쪽) 참조.
이와 같은 토지의 중층적 소유론은 김석형이 말하는 이중구조론과도 논리를 달리하는 것으로, 종래 토지의 국유론과 사유론을 양자택일적으로 한정해서 이해하여 온 우리에게 새로운 문제점을 제기하여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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