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Ⅰ. 전시과 체제
  • 5. 전시과 체제 하의 토지지배관계에 수반된 몇 가지 문제
  • 1) 토지국유제설의 문제
  • (4) 왕토사상의 실상

(4) 왕토사상의 실상

앞서 밝혔듯이 토지국유제설은 “넓은 하늘 아래에 왕토 아닌 것이 없다”는 왕토사상에서 유래한 면도 있었다. 하지만 그 같은 왕토사상에도 불구하고 광범한 민전의 존재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역사적 사실은 그와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과연 왕토사상의 실상은 어떤 것이었으며, 또 그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까.

왕토라는 말이 보이는 기록 가운데 현재 우리가 대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자료는 신라 말기의 것들이다. 즉, 崔致遠이 撰한<雙谿寺 眞鑑禪師碑>의 것이 그 하나인데, 거기에 “國王으로부터 傳命이 있어 멀리 法力을 祈祝하여 올 때마다 眞鑑禪師는 무릇 王土에 居하는 佛子로서(凡居王土而戴佛日者) 누가 護念하는 마음을 기울여 왕을 위해 貯福하지 않을 자가 있겠습니까”라고0895)<雙谿寺眞鑑禪師大空塔碑>(≪朝鮮金石總覽≫上, 朝鮮總督府, 1919), 66쪽. 했다는 구절이 보이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땅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王者의 권위를 느낄 수는 있다. 그러나 왕토에 살고 있는 불자이기 때문에 왕에게 護念하는 마음을 기울인다고 했을 때의 그 왕토는 단순히 왕의 영역을 뜻했다고 이해된다. 왕토라는 말은 이처럼 소유의 문제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이 단순하게 왕의 영역이라는 정도의 의미로 쓰이기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0896)해석에 대해서는 李佑成, 앞의 글(1965a, 219쪽;앞의 책, 5쪽) 참조.

다음의 기록도 유사한 예일 것 같다. 역시 최치원이 찬한<鳳巖寺 智證大師碑>에는 그가 헌강왕 5년(879)에 莊 12區의 田 500結을 사원에 희사한 사실이 전하지마는, 그 경위에 대해 “비록 나의 田地이기는 하나 또한 王土에 있는 것이므로(雖曰我田 且居王土) 여러 당로자를 거쳐 왕의 동의를 얻어 시행하였는데, 왕은 그곳의 僧統으로 하여금 희사된 땅을 標識하여 사원 소유의 경계를 확실하게 했다”는 것이다.0897)<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朝鮮金石總覽≫上), 88쪽. 얼핏보면 이 경우의 왕토는 실질적인 의의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내용인즉 왕토에 있기 때문에 왕의 동의가 필요했던 게 아니라 실은 신라정부가 이전부터 백성들이 사원에 토지를 기진하는 행위를 금하고 있었으므로 그런 절차가 필요했던 것이었다. 그것은 智證의 말처럼 ‘나의 田地’ 즉 그의 사유지였으므로 토지의 기진에 대한 금령이 없었던들 왕의 허가라는 절차상의 문제가 발생함이 없이 아마 소유주의 자유 의사에 의해 처분되었으리라 예상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왕토라는 말은 역시 관념적인 표상에 지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생각되는 면이 많은 것이다.0898)李佑成, 앞의 글(1965a, 222∼234쪽;앞의 책, 9∼11쪽).

그 같은 측면은 다음의 자료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역시 최치원이 찬한 경주 소재의<崇福寺碑>에, “九原(陵)을 이룩한 곳이 비록 왕토라고는 하나 실상 공전이 아니므로(雖云王土 且非公田) 이에 부근 일대를 일괄하여 후한 대가를 주고 구하였다. (그리하여) 사 보탠 것이 丘壟 200여 결이요 그 가격은 稻穀 2,000苫이었다”는 기록이0899)<崇福寺碑>(≪朝鮮金石總覽≫上), 120쪽. 그에 대한 해석은 李佑成, 앞의 글(1965a, 219∼222쪽;앞의 책, 5∼8쪽) 참조.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신라 원성왕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능역을 조성하는 일과 관련된 기사로, 그곳이 비록 왕토이기는 하였지만 공전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값을 치루고 구입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공전은 국유지 혹은 왕실소유지라는 뜻으로 쓴 듯 이해되거니와, 그렇지 못한 개인의 사유지는 비록 왕토로 인식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에서 자유로이 처분할 수 없었음을 분명하게 알 수가 있다. 동양의 전통적인 왕토사상은 관념적인 산물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토지국유제의 하나의 관념적인 擬制였을 뿐 현실적인 토지소유관계를 말한 것은 아니었다.

왕토사상과 그로 말미암은 토지국유의 원칙은 거듭 말하지만 역사적 사실과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당시의 지배층들이 가끔 사료에 보이는 바와 같이 그것을 표방하고 또 강조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는 아마 토지를 매개로 하여 국가의 재정을 확보하려는 수취체계와 관련이 깊었던 듯하다. 즉 실제에 있어서는 농민의 사유에 속하는 토지를 국가의 것으로 관념하여 그것을 농민에게 給付해 주는 형식을 취하고, 이 급부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조세·공부·역역 등 각종 수취를 수행하려 했던 것이다.0900)姜晋哲, 앞의 글(1980), 351쪽.
―――, 앞의 글(1965b), 1304∼1305쪽.
왕토사상과 그에 입각한 토지국유제 원칙의 실상은 이와 같이 재정적 의제로서의 기능을 그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朴龍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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