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Ⅰ. 전시과 체제
  • 5. 전시과 체제 하의 토지지배관계에 수반된 몇 가지 문제
  • 2) 균전제의 시행여부에 관한 문제
  • (2) 균전제설에 대한 비판

(2) 균전제설에 대한 비판

종래의 균전제설에 대한 의문은 우선 고려에는 국가로부터 토지를 지급받지 못하는 백정농민층이 광범하게 존재하였다는 연구가 진행되면서 제기되었다. 경작자인 농민 전체를 상대로 토지를 균등하게 분급해 준다는 균전제 아래에서 그것을 지급받지 못하는 백정이라는 농민충이 존재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점이 지적되자,0904)旗田巍,<高麗時代의 白丁-身分·職役·土地->(≪朝鮮學報≫14, 1959;≪朝鮮中世社會史의 硏究≫, 法政大學出版局, 1972, 375쪽). 곧 이어 과거의 균전제론자들이 근거로 들었던 자료(A사료)는 토지를 다시 측량하여 면적의 다과와 토질의 膏塉에 따라 課役을 새로이 책정함으로써 농민의 부담을 고르게 하자는 의미였다고 해석하고, 고려시대에 있어서 토지의 급여는 國役을 담당하는 계층에 한정되었다는 점을 들어0905)李佑成,<高麗의 永業田>(≪歷史學報≫28, 1965, 7쪽;≪韓國中世社會硏究≫, 一潮閣, 1991, 19쪽). 역시 균전제론이 부인되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전형적인 균전제 국가인 당의 수취체계는 조·용·조가 농민 한 사람당 얼마씩이라는 일정한 양으로 균등 고정화되어 있었는데, 고려의 경우에 있어서는 이러한 수취량이 균등·고정화된 흔적은 보이지 않고 전조의 수취는 매 결당 얼마씩이라는 일종의 누진세법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는 점과, 고려 군인의 원천이 당과 같은 균전농민이었다면 응당 당제와 같이 조·용·조의 면제를 조건으로 병액을 확보하는 것이었을텐데 그렇지 않고 군인전을 따로 설정하고 있었다는 점 등 몇 가지 이유를 들어0906)姜晋哲,<高麗時代의 土地制度>(≪韓國文化史大系 Ⅱ-政治·經濟史-≫高大民族文化硏究所, 1965), 1305∼1310쪽. 균전제론에 반대하는 입장이 표명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균전제설은 점차로 부정되어 가게 되었지마는, 그러나 아직 종래의 균전제론자들이 그 논거로 들어 왔던 자료를 구체적이면서도 종합적으로 재검토하는 단계까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균전제의 시행을 부정하는 이상 그것은 불가피한 작업이었다. 그러므로 균전제 부정론자들은 이어서 종래 균전 사료라고 여겨져 왔던 기록들을 면밀하게 분석·검토하여 역시 재래의 해석은 잘못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먼저 A사료부터 보도록 하자. 그 중 ① 사료는 상주 관내의 中牟縣과 홍주 관내의 橻城郡, 장단현 관내의 臨津縣·臨江縣 등 몇몇 군현에 있는 민전의 多寡와 膏塉이 균등하지 않아 문제가 발생한 경우인데, 우선≪高麗史≫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상주 관내에는 모두 24개의 속군현이 있었는데 중모현은 그 가운데 하나이며, 橻城郡은 홍주 관내의 14개 속군현 가운데 하나였고, 임진현·임강현은 장단현 관내의 7개 속현 가운데 일부였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많은 속군현 가운데 유독 위에 열거한 몇몇 군현만이 문제가 된 것은 당해 군현이 어떤 사유로 인해 이상사태에 처하게 되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 어떤 사유란 ② 사료에 보이는 見州의 예처럼 설치한 지가 오래되어 그 간에 여러 차례 홍수와 가뭄 등을 겪은 경우 등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리하여 전토의 多寡와 膏塉 등이 불균·부동하게 되어 백성들의 식생활이나 조세 부담 등에 곤란을 겪는 이상사태를 상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때 조세 부담 등은 특히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홍수나 가뭄 등으로 인해 소유 토지의 다과와 고척에 큰 변동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오래 전에 작성된 量案 또는 課稅臺帳에 의거하여 조세를 거둔다면 그것은 백성들의 커다란 불만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도 잠시 지적한 일이 있듯이 “사자를 보내어 量田하여 그 食役을 고르게 하라”거나 “均定하라”는 상소는 이러한 측면에서 해석하는 것이 역시 옳을 듯하다. 그렇다면 A-①·② 사료가 균전제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게 된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A-①·② 사료를 종래의 해석처럼 민전의 균등화를 도모한 기록이라고 볼 수 있는 여지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설령 그와 같이 해석한다 하더라도 균전화 정책이 시도된 지역은 일부 군현에 한정된 것이었다. ② 사료의 見州는 楊州 界內의 많은 속읍 가운데 하나였거니와, ① 사료의 중모현 등도 여러 속군현 가운데 하나였다 함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저들을 근거로 전국에 걸쳐 토지를 균등하게 분급한다는 균전제를 말하기는 어렵다.

A-③ 사료는 서북면의 安北都護府와 그 관할 하의 몇몇 주진이 역시 ‘量給한 지가 오래되어서’ 문제가 발생한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데, 다 아는 대로 이 지역은 고려가 건국된 이후의 영토확장정책에 따라 새로 개척·편입된 곳이다. 그리하여 이들 지역에는 사민정책이 실시되었지만, 새로운 개척지역에 들어간 그들에게 토지의 분급이 있었으리라는 예상은 충분히 할 수 있다. 이는 “오래 전에 田土를 量給했다”고 한 기록과도 합치되는 사항인데, 따라서 이 곳에서는 토지의 均給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 경우도 북방개척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배경으로 한 것인데다가 또 일부 지역에 한해서 시행된 것이므로 그것을 논거로 균전제를 주장하는 데는 여전히 많은 무리가 따른다. 이처럼 A사료를 통해 볼 때 비록 고려의 극히 제한된 일부 지역에서 임시적 방편으로 균전제 비슷한 제도가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항구적으로 전국에 걸쳐 실시된 일은 없었다고 판단되는 것이다.0907)旗田巍,<高麗時代에 있어서 均田制의 有無>(≪朝鮮學報≫49, 1968;앞의 책, 158∼160쪽).
姜音哲,<均田制 施行與否에 관한 問題>(≪高麗土地制度史硏究≫, 高麗大出版部, 1980), 355∼358쪽.

그런데 한편으로 B-③에는 선왕 때의 제도인 균전제를 다시 실시하자고 한 주장도 보여 또 다른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것은 여말에 사전을 혁파할 것인가 아니할 것인가가 가장 큰 정치적 쟁점으로 부각되었을 때 그를 혁파하자는 쪽의 주장 속에 나오는 것으로, 선왕 때 즉 고려 전기에는 균전제가 실시되었었으므로 지금 그 제도로 돌아가자는 의견인데, 하지만 이는 단순히 전제 개혁을 역설하는 과정에서 언급된 것이어서 그 같은 제도의 실재 여부는 사실 애매모호하다. 그러므로 선왕 때의 균전제 云云은 사전의 개혁을 강행하려는 논자들이 자기네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표방한 것일 뿐 그것이 실제로 고려 전기에 균전제가 실현되었다는 명확한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견도 적지 않은 것이다.0908)旗田巍, 위의 글, 152쪽.
姜音哲, 위의 글, 358∼359쪽.

다음 B-②에는 고려의 ‘중세’ 이후로 균전제와 비슷한 井田法이 실시된 듯한 언급이 보이는데, 이 역시도 의문의 여지가 많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정전법은 周에서 일정한 면적의 정방형 토지를 井字形으로 등분하여 중앙의 공전은

8家가 공동으로 경작하여 그 수확은 전부 국가에 바치고 주변의 사전은 각자가 경작하여 수익을 얻는다는 일종의 전설적인 田法이다. 이는 중국에서조차 실재 여부가 의문시되어 있거니와, 공전·사전의 수조율이 확정되어 있던 고려시대에 그 같은 정전법이 전반적인 分地制로서 채택되어 있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구자들은 공민왕의 下旨에 나오는 B-②의 ‘井地 不均’은, “무릇 仁政은 반드시 經界로부터 시작되므로 經界가 不正하고 井地가 不均하면 穀祿도 不平하게 된다”는0909)≪孟子≫권 5, 藤文公章句 上(49).≪孟子≫의 어구를 그대로 차용하여 문장을 수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공민왕 당시는 토지제도의 문란에 따라 겸병이 극심했던 때이므로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왕토사상이 강렬하게 대두되고 있었거니와, 정전법에 관한 언급도 그 한 표현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C-①에는 ‘丘井之制’가 시행된 듯한 언급도 보인다. 丘井制는 정전법을 기반으로 그 위에 성립하는 軍賦徵集의 조직을 말하지마는, 그러나 이 자료가 작성된 인종 당시에는 이미 잘 밝혀져 있는 바와 같이 軍賦의 부담은 군인전의 설정 위에 형성되어 있었으므로 그 역시도 그대로 수긍하기는 어렵다. 아마 군부의 부담과 토지의 분급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던 상황을 그 같이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정도로 이해하여 두는 게 좋을 듯 싶다.0910)旗田巍, 앞의 글(1968), 152∼154쪽.
姜晋哲, 앞의 글(1980), 359∼360·362∼363쪽.

B-① 사료의 내용, 즉 “先王이 내외의 田丁을 제정하여 각각 직역에 따라 평균, 분급해 민생에 資케 했다”는 기사도 종래 균전제설을 뒷받침하는 유력한 논거로 들어왔던 것인데,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사료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직역은 좁게는 군인·서리·공장 등이 국가에 대하여 부담하는 신역을 말하며, 넓게는 양반들이 담당하는 관직과 군인 등의 신역을 아울러 지칭하였거니와, 위 사료는 이렇게 직·역을 부담하는 인원들에게 그 대가로 전정, 즉 토지를 분급하여 주었다는 기사이다. 그리고 ‘평균 분급’했다는 것도 양적인 균등화를 의미한 게 아니라 직·역 담당자의 계급에 따라 공평하게 분급해 주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 기사는 국가에 대하여 지는 일정한 직역이 없고, 따라서 국가로부터 토지도 분급받지 못하는 백정농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며, 동시에 균전제와도 연관시킬 수 있는 자료가 아니었다.0911)旗田巍, 위의 글, 156∼157쪽.
武田幸男,<高麗 田丁의 再檢討>(≪朝鮮史硏究會論文集≫8, 1971), 11∼12쪽.
姜晋哲, 위의 글, 360쪽.
과거의 해석은 잘못된 것이었다고 보는 게 온당할 듯싶은 것이다.

宋側 기사인 C사료에서는, “官·吏·民·兵은 등급의 고하에 따라 授田하 였다”고 한 것과, “民이 나이 8세에 投狀射田하는데 結의 수에 차이가 있었다”고 한 것, 그리고 “나라에 사전이 없고 민은 口를 계산해 授業하였다”고 한 대목 등이 문제가 되는 부분인데, 이 중 “민이 나이 8세에 投狀射田하였다”는 대목은 ‘投狀射田’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아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두어야 할 것 같다. 그 나머지 가운데 관·리·병과 함께 등급의 고하에 따라 수전한 민의 존재는 균전제와 관계가 깊은 듯 짐작되기도 하나, 그 아래에 이어지는 (國)官·兵·吏·驅使·進士·工技 등과 연결시켜 고찰해 볼 때 그 민은 진사·공기를 뜻했던 것 같다. 같은≪高麗圖經≫의 권 19에 민서조가 있지만 거기에 보면 진사·공기는 農商·民長·舟人과 더불어 民庶로 파악되고 있기 때문이다. C-① 사료의 受田 대상에 속한 민은 일반백성을 말한 게 아니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고려 때의 진사와 공기가 그들의 지위나 服勞에 따라 전토를 지급받은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다. 아울러 “計口 授業하였다”는 C-② 사료의 민도 그 아래의 기사와 연관시켜 볼 때 역시 일반 민이 아니라 군인들을 뜻한 것으로 이해된다.0912)旗田巍, 위의 글, 154∼155쪽.
姜晋哲, 위의 글, 361∼362쪽.
C사료도 고려에서 균전제가 시행되었음을 입증하여 주는 자료는 아니었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요컨대 종래 균전제의 시행을 말해주는 자료라고 들어져 온 사료들을 재검토한 결과 실내용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거듭 말하거니와 고려 때는 극히 제한된 일부 지역에서 임시적 방편으로 균전제 비슷한 제도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인정되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국에 걸쳐 항구적으로 실시된 일은 없었던 것 같다. 토지국유제론과 표리관계를 이루면서 대두되었던 균전제설은 잘못된 이해였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朴龍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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