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Ⅰ. 전시과 체제
  • 5. 전시과 체제 하의 토지지배관계에 수반된 몇 가지 문제
  • 3) 전결제
  • (1) 신라의 결부제

(1) 신라의 결부제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地積의 단위로는 파종량을 기준으로 하는 斗落只·石落只 등의 斗落制와, 하루에 농우 1마리가 갈 수 있는 면적을 기준으로 하는 日耕이 있고 땅의 절대 면적을 나타내는 頃畝制, 그리고 結·負·東·把를 단위로 하는 結負制가 있었다. 파종량을 기준으로 하는 두락제는 지금도 관행상 널리 쓰이고 있는 지적의 단위이며, 이미 신라에서도 이와 관련된 기록이 있음으로 보아 이미 삼국시대부터 이러한 관습적인 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경에 관한 기록은 고려시대의 土地賜與文書 등에 보이는데,0914)旗田巍,<新羅·高麗の田券>(≪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法政大學出版局, 1972), 197∼198쪽. 이러한 지적 단위가 법적인 효력을 갖는 공식 문서에 쓰이고 있음으로 보아 이미 고려시대에 널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일경에 의해 토지 면적을 나타내는 것은 소가 농경에 쓰인 이래 관습화된 것이라 생각되는데, 소를 농경에 이용한 것은 신라 지증왕대의 일이므로0915)≪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지증마립간 3년. 이 또한 삼국시대에 비롯한 제도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락제나 일경에 의한 지적의 표시는 어디까지나 관행적인 것이었고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채택한 법제적인 제도는 결부제였다. 다만 고구려의 경우 量田에 관한 유일한 기록이 유리왕대에 보이고 여기에서 頃畝를 단위로 하였으므로0916)“賜祭須金十斤 田十頃”(≪三國史記≫권 13, 高句麗本紀 1, 유리명왕 37년). 경무제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나, 이 기록을 근거로 고구려에서 전국적인 규모의 양전이 행해졌다거나 또는 경무제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고구려의 세제는 인신을 매개로 한 인두세적 성격이 강한 것이었기 때문에 국가의 입장에서 양전을 행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0917)金基興,≪삼국 및 통일신라 세제의 연구≫(역사비평사, 1991), 59∼69쪽. 아마도 유리왕대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이는 중국 군현의 영향을 받은 고구려에서 경무를 단위로 하는 지적의 제도가 일부 사용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신라에서도 경무를 단위로 토지의 면적을 나타낸 기록이 몇 개 보이나, 이는 이미 지적된 것처럼 결·부라는 용어에 대신하여 경·무라는 글자를 사용한 것에 불과한 것이지 경무제가 시행된 것은 아니었다.0918)朴時亨, 앞의 글(1957). 이에 대하여 간단히 그 근거를 밝히자면 다음과 같다. 뒤에서 살펴 보는 바와 같이≪三國遺事≫의 駕洛國記에서는 경과 결을 혼용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경과 결이 동일한 것임을 알려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그리고 경무에 관한 기록은 모두 8군데에서 찾아진다.0919)고려 이전의 경무제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① “賜祭須金十斤 田十頃”(≪三國史記≫권 13, 유리명왕 37년).
② “近廟上上田三十頃 爲供營之資 號稱王位田”(≪三國遺事≫권 2, 駕洛國記).
③ “山下有田三十畝 下種三石”(≪三國遺事≫권 2, 文虎王 法敏).
④ “田一萬頃 納於寺”(≪三國遺事≫권 3, 栢栗寺).
⑤ “今浦縣稻田五頃中 皆米顆成穗”(≪三國遺事≫권 2, 惠恭王).
⑥ “仍許職左丞 賜田一千頃”(≪三國史記≫권 50, 列傳 10, 甄萱).
⑦ “許職左丞 賜田一千頃”(≪三國遺事≫권 2, 後百濟 甄萱).
⑧ “坐父母陰取金剛寺水田一畝”(≪三國遺事≫권 5, 善律還生).
이 중≪三國史記≫의 것은 위의 고구려 유리왕대의 기록과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멸한 후 공을 세운 英規에게 1,000경의 토지를 하사하였다는 기록 뿐인데, 이는 각각 고구려와 고려의 일이고 신라에 있어 경무에 관한 기록은 오직≪三國遺事≫에만 보인다. 즉 금석문이나≪三國史記≫에는 신라에서 경무제가 사용되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는데, 이는 신라의 법제적인 양전의 단위가 결부임을 확인해 준다. 따라서 이러한 기록들은 신라에서 경무라는 표현을 사용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지만, 이를 근거로 경무제가 실시되었다고 볼 수 있는 적극적인 증거는 되지 못하리라 생각된다. 경무라는 중국식 명칭이 결부에 대신하여 쓰이기도 한 것은 아마도「경」과「결」,「무」와「부」의 발음이 비슷하고 또 양자가 모두 1:100의 비례 관계에 있다는 이유에서일 것이다. 즉 신라에서는 결·부에 대신하여 경·무라는 글자가 쓰였으나, 경무제의 내용이 도입된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결·부·속·파의 단위로 토지의 면적을 나타내는 결부제는 우리 고유의 것으로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제도이다. 이러한 결부제가 언제부터 우리 나라에서 사용되었는가는 확실하지 않으나 문헌 기록상으로 최초의 것은 가야에서 결을 단위로 토지를 측량한 것이 확인된다. 즉 ≪三國遺事≫의<駕洛國記>에 의하면 가락국의 제8대 왕인 金銍王이 元嘉 29년(452, 신라 눌지왕 36년)에 王后寺를 창설하고 여기에 平田 10결을 기증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결부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데, 이 기록만으로 가야에서 이미 결부제가 시행되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가락국기>가 고려 문종 대에 쓰여진 것이므로 가락국에서 쓰던 어떤 딴 제도를 고려시대의 토지 단위인 결부로 표현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점과, 위의 기록에서 보는 바와 같이 평전 10결의 땅을 왕후사라는 절에 기증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과연 이 시기에 가야에 불교가 들어왔다고 볼 수 있을까 하는 점 때문이다. 따라서 위의 기록을 근거로 결부제가 가야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리라 생각된다. 아래에서 살펴 보는 바와 같이 결부제에 관한 자료는 거의 모두 신라에 집중되어 있으므로 결부제는 신라에서 발생하여 발전된 것으로 생각되고 또 가야에서는 신라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 많으므로,0920)<駑洛國記>에는 신라의 관등명인 大阿于·沙于·角于 등이 보이는데 이는 신라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리라 생각된다. 결·부 등의 단위도 신라의 제도를 받아 들여 사용한 것이라 봄이 타당할 것이다.

문제는 신라의 결부제가 어느 시기에 발생한 것인가 하는 점인데 이를 밝혀 줄 수 있는 자료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위의<가락국기>의 기록이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고 또 이미 추측한 바와 같이 가야에서 신라의 결부제를 모방하여 사용한 것이라면, 5세기 중엽에는 이미 신라에서도 결이 지적의 단위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부제에 관한 기록은 통일을 전후한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신라의 결부제에 관한 기록을 연대순으로 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진평왕 3년, 613) 이 때에 시주 여승이 있어 占察寶에 밭을 바쳤는데 지금 東平郡의 밭 100결이 이것으로 옛 토지문서가 아직도 보존되어 있다(≪三國遺事≫권 4, 圓光西學).

② (문무왕 3년, 663) 金庾信에게 밭 500결을 하사하였다(≪三國史記≫권 42, 列傳 2, 金庾信).

③ (성덕왕 4년, 705) 眞如院의 서쪽으로 6천 보 떨어진 牟尼岾과 古伊峴 밖에 이르는 곳에 땔나무 산판(柴地) 15결과 밤나무 숲 6결과 집 지을 터(坐位) 2결을 주어 농장 집을 세우도록 하였다(≪三國遺事≫권 3, 臺山五萬眞身).

④ (성덕왕 15년, 716) 成貞王后를 궁에서 내보내는데 비단 500필, 밭 200결, 租 1만 석과 저택 한 구역을 하사하였다(≪三國史記≫권 8, 新羅本紀 8).

⑤ (경덕왕 14년, 755?) 논은 모두 102結 2負 4束인데 이 중 烟受有畓이 94결 2부 4속이고, 밭은 모두 62결 10부 5속이다(<新羅村落文書>, 沙害漸村).

⑥ (혜공왕 15년, 779) 혜공대왕이 이 사실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대신을 보내 제사를 지내 사과하고 또 鷲仙寺에 밭 30결을 주어 金庾信의 명복을 비는 비용에 충당하게 하였다(≪三國史記≫권 43, 列傳 3, 金庾信).

⑦ (혜공왕 15년, 779) 公을 위하여 功德寶田 30결을 鷲仙寺에 내주었다(≪三國遺事≫권 1, 味鄒王竹葉軍).

⑧ (경문왕 12년, 872) 田畓柴 田畓은 합하여 494結 39負, 坐地가 3結, 下院代가 4結 72負, 柴는 143結, 豆原地 鹽分이 43結(<寂忍禪師照輪淸淨塔碑>,≪朝鮮金石總覽≫上, 120쪽).

⑨ 乾符 6년(헌강왕 5년, 879)에 莊 12구역과 밭 500結을 희사하였다(<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朝鮮金石總覽≫上, 93쪽).

⑩ 龍紀 3년(진성여왕 5년, 891)…
常買其分石保坪大業渚畓四結〔畦△△ △△△〕
〔土南池宅土西川 東令行土北同〕奧畓十結〔畦田南池宅土 △東令行土西北同〕(<開仙寺石燈記>,0921)≪朝鮮金石總覽≫에는 이 두 행의 순서가 바뀌어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旗田巍, 앞의 글).≪朝鮮金石總覽≫上, 87쪽).

⑪ (진성여왕대, 887∼896) 비록 왕의 땅(王土)이기는 하나 公田이 아닌 까닭에 부근의 땅을 모두 좋은 값에 사들여 언덕진 땅(丘壟) 200結을 더 보태었다(<崇福寺碑>,≪朝鮮金石總覽≫上, 121쪽).

⑫ 長興 2년(931) 두 사람의 부모 제사 비용에 충당하도록 堗白寺에 田畓 몇 結을 주었다(≪三國遺事≫권 5, 明朗神印).

위는 신라의 결부제에 관한 모든 기록인데, 이 중 ①은 진평왕대의 일을 기록한 것이기는 하나 본문에서 “지금 東平郡의 밭 100결이 이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여기의 100결이 진평왕대에 측량된 것인지 아니면≪三國遺事≫가 만들어진 고려 시기에 측량한 결과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 따라서 이를 제외한다면 결부에 관한 신라 최초의 확실한 기록은 ②의 문무왕대의 것이라 할 수 있다. 문무왕대의 사정으로 보아 전국적인 양전사업이 있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으나, 국가에서 신하에게 하사하는 토지의 면적을 결로 표시하였다는 것은 결부제가 이미 공식적인 양전의 단위로 공인되었다고 보아도 좋으리라 생각된다. 비록 결부제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아니나 신문왕 7년(687)에는 “文武官僚田을 지급하되 차등을 두었다”0922)≪三國史記≫권 8, 新羅本紀 8, 신문왕 7년.는 기사가 있는데, 관료전의 지급을 위해서는 해당 지역에 대한 양전사업이 불가피하였을 것이고 이 때에 사용된 양전의 단위는 結負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⑤의 村落文書는 전국적인 규모의 양전사업이 이미 실시되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촌락문서의 작성 연대에 대하여는 755년설과 815년설이 대립하고 있어 어느 쪽이 옳은지 단정하기 어려우나 이를 815년에 작성된 것으로 본다 할지라도 해당촌의 전답의 면적은 그 이전에 이미 작성되어 있던 자료를 토대로 기록했다고 할 수 있으므로, 촌락문서가 작성되기 이전에 전국적인 규모의 양전이 있었고 또 이를 기록한 토지대장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의 양전사업을 구체적으로 전해 주는 기록은 없으나 성덕왕 21년(722)에 “처음으로 백정에게 丁田을 지급하였다”0923)≪三國史記≫권 8, 新羅本紀 8, 성덕왕 21년.는 기록은 양전사업이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즉 성덕왕대의 정전의 지급이란 것이 비록 농민이 보유하고 있었던 토지의 소유를 국가가 형식적으로 인정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를 위해서는 전국적인 규모의 양전사업이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 때의 양전은 촌락문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결부 뿐만 아니라 束까지도 기록된 것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신라의 결부제는 아마도 삼국시대 초기에 발생하여 관행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대략 문무왕대를 전후한 시기에 법제화되어 신문왕대에는 관료전의 지급을 위한 양전사업이 있었으며, 늦어도 정전이 지급된 성덕왕대인 8세기 전반에는 전국적인 양전사업이 일단 완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신라 결부제의 특징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신라의 결부제는 조선의 결부제와 같이 田品에 따라 그 면적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전품에 관계없이 면적이 동일한 단일 면적의 것이었다는 점이다. 둘째, 결부가 단지 전답의 면적을 나타내는 데에만 쓰인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모든 종류의 토지 면적을 나타내는 데에 두루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먼저 신라의 결부제가 전품에 따른 면적의 차이가 없었다는 점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데, 이는 신라의 결부에 대한 기록 중에서 전품을 표시하고 있는 경우가 없을 뿐 아니라, 고려에 있어서도 초기의 전품 규정은 不易, 一易, 再易의 이용빈도에 따라 上·中·下의 세 등급으로 나누었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다만≪三國遺事≫<駕洛國記>에 “上上田 三十頃”이란 표현이 있으나,0924)≪三國遺事≫권 2, 駕洛國記. 이를 근거로 신라나 가야에 上上에서 下下에 이르는 9등급의 전품제가 있었다거나 또는 田品에 따라 1결의 면적에 차이가 있는 隨等異尺制가 시행되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三國史記≫新羅本紀에도「良田」이란 구절이 있으므로0925)≪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진흥왕 23년. 전품에 대한 인식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관념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아마 상상전이라는 표현 또한 다분히 관념적인 것이고 경도 결로 고쳐 보아야 옳지 않을까 한다. 왜냐하면 문무왕대 이후에 만들어진<新羅村落文書>나<開仙寺石燈記>등의 금석문에 전품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문무왕대에 전품의 구분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상전이란 가장 비옥한 토지라는 의미로 사용한 말인 듯 하며, ‘三十頃’의 경도 결을 중국식의 문자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위의 사료 ③과 ⑧에서 보는 것처럼 성덕왕대인 8세기 초엽부터 결부는 이미 柴地, 栗地, 坐位, 坐地, 下院代는 물론이고 鹽盆 등 다양한 종류의 토지의 면적을 나타내는 데 쓰이고 있다. 여기에서 시지는 산림을, 율지는 밤나무 숲을, 그리고 좌위·좌지와 하원대는 건물이 들어선 곳 즉 垈地를 말하는 것이고, 염분은 곧 염전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다양한 토지의 면적을 결부로 나타내었던 것은 당시의 결부가 고정된 면적을 나타내는 토지의 단위였기 때문일 것이다. 결부제의 이러한 특성으로 말미암아 결부는 단지 전답의 면적만을 나타내는 단위가 아니라 광범위하게 여러 종류의 토지의 면적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며, 바로 이러한 점이 신라 결부제의 특성인 동시에 후대까지도 많은 영향을 끼친 점이라 생각된다. 고려 전시과에 있어서 전지의 면적 뿐만이 아니라 시지의 면적도 결부로 나타낸 것은 바로 신라 이래의 전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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