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Ⅰ. 전시과 체제
  • 5. 전시과 체제 하의 토지지배관계에 수반된 몇 가지 문제
  • 3) 전결제
  • (2) 고려 전기의 결부제

(2) 고려 전기의 결부제

위에서 신라 결부제의 발생 및 법제화의 시기 그리고 그 특징 등을 살펴 보았으나, 그 구체적인 내용을 밝혀 줄 수 있는 자료는 찾아볼 수 없었다. 결부제의 구체적인 내용에 관하여는 고려 전기의 자료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신라의 결부제와 고려 전기의 그것은 동일한 내용의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먼저<駕洛國記>를 살펴 보면 같은 토지의 면적에 대하여 각각 시대를 달리하는 세 기록이 보이고 있다.0926)≪三國遺事≫권 2, 駑洛國記.

먼저 龍朔 원년 즉 신라 문무왕 1년(661) 3월에 문무왕이 즉위한 다음 그의 어머니 文明皇后의 시조인 首露王을 위하여 陵廟에 王位田 30경을 바친다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三國史記≫에 의하면 문무왕이 즉위한 것은 그 해 6월로 되어있어 이 부분에는 약간의 착오가 있음이 분명하나 그렇다고 해서 이 기록 전체를 불신할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된다.≪三國遺事≫에 실린<가락국기>는 고려 문종대(1047∼1083)에 金官知州事인 文人이 기록한 것이므로 날짜나 용어상의 착오가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문무왕대에 수로왕릉의 능묘에 30경의 토지를 기증한 것은 사실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다음 淳化 2년 즉 고려 성종 10년(991)에 이 지역을 측량한 量田使가 수로왕릉에 소속된 토지가 너무 많으므로 그 반인 15결만 그대로 능묘에 소속시키고 나머지는 金海府의 役丁들에게 분급해 줄 것을 청하여 허락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성종∼문종 사이의 어느 시기에 수로왕릉에 속한 토지의 면적을 측량한 결과 실제 면적은 11결 12부 9속으로0927)인문에는 “才一結十二負九束”이라 되어 있으나 이는 “十一結十二負九束”의 誤記임이 확실하다. 이는 15결에서 3결 87부 1속이 부족한 것이었음을 확인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라 문무왕대의 30경의 토지와 고려 성종대의 30결이 동일한 면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기록의 30경은 30결로 고쳐 보아야 하며, 나아가 신라의 결부제와 고려 초기의 결부제는 그 내용상 동일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두 시기의 결부제의 내용이 동일하였다는 것은 1결의 면적을 산출하는 방식 즉 量田式과 기준 尺度의 길이가 같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우선 고려 초기의 양전식에 대해 살펴 보고자 한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고려 전기의 양전식은≪高麗史≫食貨志에 전하는 바와 같이 사방 33步가 1결이었다. 그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문종) 23년에 量田의 步數를 정하였다. 田 1결은 사방 33보이다[6寸이 1分이 되고 10분이 1尺이 되며 6척이 1步가 된다]. 2결은 사방 47보, 3결은 사방 57보 3분, 4결은 사방 66보, 5결은 사방 73보 8분, 6결은 사방 80보 8분, 7결은 사방 87보 4분, 8결은 사방 90보 7분, 9결은 사방 99보, 10결은 사방 104보 3분이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經理 문종 23년).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田 1結은 사방 33步이다”라고 한 아래에 “6寸이 1分이 되고 10분이 1尺이 되며 6척이 1步가 된다”라는 細註 부분이다. 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6寸=1分, 10分=1尺, 6尺=11步로 곧 1步=6尺=60分=360寸이 된다. 즉 1척=60촌이라는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이 때의 기준척을 여러 척도 중 가장 짧은 周尺으로 보아도 1결의 면적이 17,000평 이상이 되므로 이는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어떤 착오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데 이는 가운데 구절의 ‘分’, ‘一’, ‘尺’ 중의 한 글자가 잘못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0928)朴時亨, 앞의 글(1957).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가운데 구절은 ‘十分爲六尺’ 또는 ‘十分爲一步’, 아니면 ‘十寸爲一尺’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선 위 식화지의 기록에서 1결에서 10결에 이르는 면적을 모두 ‘方-步-分’의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어 보 아래의 척의 단위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만약 1보가 6척이고 1척을 10분으로 한 量田尺을 사용하였다면 결의 면적은 당연히 ‘方-步-尺-分’의 형식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혹시 계산상의 결과 우연히 척의 단위가 빠진 것이 아닌가 할 수도 있겠으나, 아래<표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10분을 1척으로 본다면 실제 면적과의 차이도 10분을 1보로 한 것보다도 훨씬 크게 나타난다.

  1변의 길이 1결의 면적 指數(1결=100)
60分=1步의 경우 10分=1步의 경우 60分=1步 10分=1步
1결
2결
3결
4결
5결
6결
7결
8결
9결
10결
33步
47步
57步 3分
66步
73步 8分
80步 8分
87步 4分
*90步 7分
99步
104步 3分
1,089.00 平方步
2,209.00 平方步
3,254.70 平方步
4,356.00 平方步
5,348.48 平方步
6,421.35 平方步
7,580.60 平方步
8,121.01 平方步
9,801.00 平方步
10,826.40 平方步
1,089.00 平方步
2,209.00 平方步
3,283.29 平方步
4,356.00 平方步
5,446.44 平方步
6,528.64 平方步
7,638.76 平方步
8,226.49 平方步
9,801.00 平方步
10,878.49 平方步
100
202.8
298.9
400
491.1
589.7
696.1
745.7
900
994.2
100
202.8
301.5
400
500.1
599.5
701.4
755.4
900
998.9

<표 1>≪高麗史≫食貨志 문종 23년조의 양전척에 대한 검토

※ *는 93步 3分으로 고쳐야 계산이 맞는다.

그러므로 위에 든 식화지의 세주 부분은 착오가 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부분을 어떻게 수정하든지 간에 그 결과는 母尺 6척이 1보가 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인데, 그렇다면 왜 세주에서 단순히 6척을 1보로 한다고 하지 않고 6척을 10등분한 분이라는 단위를 설정했는가 하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분명히 계산상의 편의를 위하여 그렇게 설정했을 것인데, 이와 유사한 예를 일본의 양전척에서 찾을 수 있다. 1837년(일본 天保 8년)에 나온≪算法地方大成≫에는 “間竿(量田用 자)은 6寸을 1分으로 하고, 10分을 1間으로 한다. 둘레 4寸 정도의 대나무를 2間 길이로 잘라 마디를 없애고 양쪽 끝을 구리로 싸고, 가운데에 1間을 새겨 넣고 또 1分의 눈금을 새긴다”고 하였는데, 이는 앞서 살펴본 식화지 문종 23년조의 세주를 수정한 것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즉 1보를 10분으로 나눈 것은 단순히 보와 척만을 사용할 때 야기되는 분 수 계산의 불편함을 덜고 보다 정확한 면적을 계산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실제 보 이하에 척만을 사용한 경우에 야기되는 계산상의 어려움이 상당한 착오를 유발한 예를 살펴보면 이러한 이해가 올바른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世宗實錄≫세종 10년(1428) 10월 신사조의 기록에 의하면0929)≪世宗實錄≫권 42, 세종 10년 10월 신사. 세종 10년 이전의 기사년 즉 공양왕 원년(1389)의 양전에서는 1부를 사방 3步 3尺의 면적으로 측량하고 1결은 사방 33보의 면적으로 측정하였다는 것인데, 이는 측량 방법상에 잘못이 있다. 즉 1결의 1/100의 면적인 1부는 한 변이 33보의 1/10인 정사각형이 되는데, 33보의 1/10인 3.3보는 3보 3척이 아니라 3보 1척 8촌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보 3척, 즉 3.5보 사방으로 1부를 측정한 것은 1보=6척이라는 단위가 가져 오는 계산상의 어려움 때문에 이를 착각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착오가 발견되어 그 다음 을유년(태종 5년, 1405)에는 이를 바르게 정정하여 3.3보 즉 3보 1척 8촌 사방으로 하였는데, 그 결과 1결의 면적이 전기의 기사년에 비해 12부 4속이나 감소한 것이 되어 결과적으로 농민의 세 부담이 그 만큼 더 늘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세종 10년에는 농민들의 이러한 불만을 해소하고 減稅의 은전을 베푼다는 의미에서 3보 3척 사방을 1부로 하고 또 이에 정확히 부합하도록 1결을 35보 사방으로 변경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1결의 면적은 1,089平方步에서 1,225평방보로 약 12.4% 증가하였으며 따라서 농민의 세 부담은 그 만큼 줄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보와 척을 단위로 토지를 측량한다는 것이 계산상 매우 번거로운 것임을 알 수 있다. 33보의 10분의 1인 3.3보는 3보 1척 8분이 되어 이를 제곱한다는 것은 매우 번거로운 일이고 또 착각이 따르기 쉬운 수치이다. 1부를 3보 3척 사방으로 잘못 계산하게 된 발단은 바로 3.3보의 소수점 아래 자리인 0.3보를 3척으로 착각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되는데, 한 번 이렇게 잘못된 것은 그것이 잘못인 줄 알면서도 농민들에게는 유리한 것이었으므로 관행상 그대로 시행되기 마련이고 마침내 법제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는 結로써 負를 측정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이며 결부제가 결을 단위로 시작되어 점차 부·속·파의 단위로 세분되어 갔음을 나타내는 증거라 생각된다.

그런데 이러한 사방 33보를 1결로 하는 양전식은 고려 문종대에 처음 생 긴 것은 아니었다. 이보다 훨씬 전인 광종대에 이미 이러한 양전식으로 양전을 한 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 고려 현종 22년(1031)에 작성된0930)旗田巍,<新羅·高麗の土地臺帳>(≪東洋學術會議論文集≫, 成均館大學校, 1975).
武田幸男,<淨兜寺五層石塔造成形止記の硏究(I)-高麗顯宗朝における若木郡の構造->(≪朝鮮學報≫25, 1962).
<淨兜寺五層石塔造成形止記>가 바로 그것이다. 그 첫 부분에 “司倉에 보관한 導行을 살펴보건대 지금부터 76년 전인 병진년(광종 7년, 956)에 量田使 前守倉部卿 藝言·下典奉休·算士 千達 등이 을묘년(955) 2월 15일에 宋良卿이 結審한 導行에 의거하여 현덕 3년 병진(956) 3월에 練立하여 작성한 안에”라고 되어 있어, 이 아래에 계속되는 代下田과 寺位同土에 대한 측량은 이미 이 문서가 작성되기 76년 전인 광종대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때에 적용된 양전식이 바로 문종대의 ‘方三十三步爲一結’과 동일한 것이었음을 아래의 대하전과 사위동토의 면적에 대한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하전의 길이는 27보, 변은 20보로서 承孔이 540이며 결로는 49부 4속이 된다고 하였는데, 승공 540이란 대하전의 가로와 세로를 곱한 수치이다. 이는 곧 평방보와 같은 것이며 540보가 49부 4속이 된다면 1결은 1,093평방보가 되는데 이는 方 33보의 1,089보와 불과 4평방보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사위동토의 경우에도 승공은 104 즉 104평방보이고 결부로는 9부 5속이 된다고 하였는데 이를 앞서와 마찬가지로 계산해 보면 1결은 약 1,095평방보가 되어 거의 비슷한 수치를 얻을 수 있다.0931)다만 寺位同土의 경우 길이가 19步 동쪽이 3步인데 承孔이 104가 된다고 하였지만, 여기서 승공 104가 어떠한 방법으로 계산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아마도 ‘犯南田’이란 표현은 땅의 모양을 나타낸 것이라 여겨지는데, 사위동토의 땅모양이 남쪽으로 튀어나온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즉 사위동토는 장방형이 아니라 부등변 사각형이나 또는 다른 모양의 땅이었던 까닭에 19×3=57의 수치로 계산될 수 없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는 ‘方三十三步爲一結’의 양전식이 이미 고려 초기부터 사용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정도사오층석탑조성형지기>에서 또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토지의 위치를 四周로 표시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러한 형식은 앞서 제시한<開仙寺石燈記>의 ‘大業渚畓’이나 ‘奧畓’에 대한 4주의 기재양식과 동일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4주로 토지의 위치를 나타내는 것은 조선시대의 토지 관련 문서에서 일반화된 것이지만, 그 기원은 이미 신라에서 비롯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9세기 말의<개선사석등기>와 10세기 중엽에 작성된 토지대장에서 동일한 書式으로 토지의 위치를 표시했다는 것은, 이 두 시기의 양전식이 동일한 것이었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종 23년의 양전 步數에 대한 규정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왜 이전부터 사방 33보를 1결로 하는 제도가 사용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종 23년에 이러한 양전식이 다시 제정되는 것인가에 대해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문종 23년의 양전식 제정의 의미는 ‘방 33보위 1결’의 규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아래의 세주 부분에 명기된 “10分을 1步로 한다”에 있는 것이다. 즉 양전의 단위로「步」아래에「分」이라는 단위를 설정한 것이 중요한 변화인 것이고, 따라서 이를 명문화하여 공포하였던 것이라 생각된다. 위에 인용한<정도사오층석탑조성형지기>에서 토지의 면적을 산출하는 근거가 된 토지의 각변의 길이는 대하전이「長 27步」와「方 20步」, 사위동토가「長 29步」와「東 3步」로 모두 보의 단위로만 되어 있고 보 아래의 척이나 분은 보이지 않는다. 이로 보아 아마도 실지 측량에 있어 보 이하의 단위는 絶削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실제 측량에 있어 토지 소유자에게 매우 유리한 반면, 국가적으로는 커다란 손실이었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이러한 폐단을 없애고 국가의 조세 수입을 늘리기 위하여 步 아래에 보의 십분의 일인 分이라는 단위를 설정한 것으로 보지 않으면 안된다. 즉 문종 23년의 양전식 규정은 이 때 ‘방 33보위 1결’의 제도를 처음 채택하였다거나, 단지 1결∼10결에 이르는 결 단위의 면적을 측량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보다 엄밀한 양전을 시행하여 국가의 조세 수입을 늘리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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