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1. 조세
  • 2) 수조율과 조세의 감면
  • (1) 사전조

(1) 사전조

고려시대 사유지의 대표적 존재인 민전의 주된 소유 계층은 백정농민이었으며, 이들이 소유한 민전은 대부분 자신과 그 가족의 노동력만으로 경작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민전 중에는 중앙과 지방의 권세가들이 소유한 것도 적지 않았는데, 이들의 민전은 주로 가족노동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대규모의 토지였다 그리고 국가의 적극적인 보호를 받고 있던 사원이나 궁원도 사원전·궁원전으로 불리는 대규모의 사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렇게 규모가 큰 민전과 사원전·궁원전의 일부는 奴婢나 雇工의 노동력에 의지하여 경작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은 백정농민이나 외거노비 등을 전호로 하는 佃戶制(소작료)에 의해 경영되었다고 이해되고 있다.1028)民田의 所有와 經營形態에 대해서는 이 책 제Ⅰ편 2장 2절<민전>참조. 바로 이러한 경작관계에서 소작료로서의 私田租가 발생하였다. 즉 전호는 사유지의 주인에게 빌린 토지의 기능의 대가로서 일정한 지대를 지불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사전조(소작료)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전조는 수확량의 1/2이었다. 앞서 인용한 바 있는 광종 24년의 판문이 이러한 사실을 말해 주는 최초의 기록인데, 사료에서는 흔히「分半」으로 표기하고 있다. 따라서 일단 고려 초부터 사전조는 1/2이었다고 할 수 있겠는데, 사실 이것은 그 이전인 신라시대 이래의 관행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미 신라 하대에도 귀족 및 호족들에 의한 대토지소유와 함께 이의 전호제 경작이 널리 전개되어 있었으므로1029)金容燮,<高麗時期의 量田制>(≪東方學志≫16, 1975).
姜晋哲,≪高麗土地制度史硏究≫(高麗大學校出版部, 1980), 15∼16쪽.
생산량의 반을 소작료로 내는 원칙 또한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위 광종 24년의 판문은 한편으로는 이전부터 있어 온 관행을 국가적으로 확인해 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旣耕地에서와 마찬가지로 開墾地에도 같은 원칙을 적용한다는 사실을 밝힌 공식적인 절차의 의미를 지녔다고 이해된다. 盜耕을 단속한 조치도 이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즉≪高麗史≫刑法志 禁令條에 의하면, 旣耕田이나 荒田을 막론하고 도경하는 자와 강제로 남의 토지를 빼앗아 경작하는 자는 모두 소정의 벌을 받게 되어 있는데,1030)“盜耕公私田 一畝 笞三十…五十畝 一年半 荒田 減一等 强加一等”(≪高麗史≫권 85, 志 39, 刑法 2, 禁令). 이는 곧 국가가 정당한 소작과 함께「分半收取」를 보장하는 것이었다고 해석된다. 이러한 관행은 광종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3년 이상된 陳田을 개간하여 경작하면 2년 동안은 수확의 전부를 佃戶에게 주고 3년째부터 田主와 分半한다”고 하는 예종 6년(1111)의 판문에서1031)≪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私田租 分半」의 원칙은 다시 확인된다. 이 외에도 예종 때에는 전호의 존재를 전하는 또 다른 기록이 보이고 있어1032)≪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農桑 예종 3년 2월. 사유지에서의 전호제 경영과 그에 따른「분반수취」가 성행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農莊」으로 불리는 대토지소유가 더욱 발달하였던 무신 집권기와 고려 후기에도 이러한 원칙은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힘이 센 자들은 광대하게 토지를 소유하였고 약한 자들은 그들에게 빌붙어 토지를 빌려 경작하고 소출의 반을 나누었다”고 하는 鄭道傳의 설명이나,1033)鄭道傳,≪三峯集≫권 7, 朝鮮經國典 上, 賦典 經理. “前朝(고려) 말의 폐단이 아직까지 남아 품관과 향리들이 광대하게 토지를 차지하고 유망민을 불러 들여 병작반수하고 있다”고 개탄한 河崙의 啓文1034)≪太宗實錄≫권 12, 태종 6년 11월 기묘. 등이 이를 잘 말해 준다. 특히 이 시기에는 權貴들이 양인 농민을 處干으로 삼아 자기의 농장을 경작케 하는 전호제 경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국가 통치력의 약화를 틈타 당시까지 관행으로 되어 있던「분반」을 상회하는 수탈을 자행하기도 하였다. 무신 집권기 말기의 권신이었던 金俊의 농장에서 그의 家臣들이 1/2을 훨씬 넘는 양을 수취함으로써 여러 권귀들이 본받았다고 하여 지탄을 받은 사실은1035)≪高麗史≫권 130, 列傳 43, 叛逆 4, 金俊.
姜晋哲,<高麗後期의 地代에 대하여>(≪韓國中世土地所有硏究≫, 一潮閣, 1989).
金載名,<高麗時代 什一租에 관한 一考察>(≪淸溪史學≫2, 1985) 참조.
이의 좋은 실례일 것이다. 그러므로 전호제로 경영되었던 사유지, 즉 규모가 큰 권세가들의 민전과 궁원·사원이 소유권을 갖고 있던 토지에서의 수조율(소작료)은 신라 말 이래 고려 전시기에 걸쳐 1/2을 원칙으로 하였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사실 이러한 관행은 고려 뿐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1036)周藤吉之,<麗末鮮初における農莊に就いて>(≪靑丘學叢≫17, 1934).
李成茂,≪朝鮮初期兩班硏究≫(一潮閣, 1980), 337∼365쪽.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