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2. 공부
  • 2) 품목과 수취방식

2) 품목과 수취방식

고려 전기의 수취제는 토지제, 역제, 군현제와 밀접한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즉 군현은 일반 군현제 지역과 부곡제 지역으로 구분되며 군현민에게 조, 포, 역(租, 調, 庸) 삼세를 부과하였던 데 반해, 부곡민에게는 삼세 이외에도 특수한 역이 부과되었다.1100)朴宗基,<高麗時代의 收取體制와 部曲制>(≪高麗時代部曲制硏究≫, 서울大出版部, 1990). 또한 군현민은 다시 丁戶, 白丁으로 구분되어 정호계층에는 과전분급을 매개로 직역을 부과한 데 반해 백정호에 대해서는 국가적 토지분급이 없는 한편 요역을 지게 하였다. 그리고 국가는 이를 모두 군현 단위의 정액제로 수취하였다. 그러므로 군현의 공부(현물세공)는 주로 현물세의 부담을 지고 있었던 일반 군현민과 부곡지역민의 납공물로 충당될 수밖에 없었다.

가령 靖宗 7년 정월에 외관들이 소관하는 州府의 세공액을 정한 사료에 의하면, 각 군현의 한해 납공물은 米 300碩·租 400斛·黃金 11兩·白銀 2斤·布 50匹·白赤銅 50斤·鐵 300斤·鹽 300碩·絲綿 40斤·油蜜 1碩으로 되어 있다.1101)≪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그런데 이 사료에서 外官員僚 所管州府의 稅貢이라는 것이 어떤 내용의 부세이며 그 세공액이 군현의 규모와 관계없이 일정한 액수로 규정된 까닭은 무엇인가 하는 점 등은 분명히 알 수 없다. 이에 대해 姜晋哲은 세공을 稅와 貢으로 구별하여 米·租는 稅에, 기타 품목은 貢에 해당하는 것이라 보았으며 이 때 공은 원칙적으로 관원이 비축하여 중앙에 상납하는 것으로 민들이 부담하던 공물과는 다른 것이었다고 하였다(앞의 책, 1980). 조선시대의 경우 공물은 官에서 자력으로 조달하는 官備貢物과 민호로부터 조달하는 民備貢物이 구별되어 있었다. 고려의 경우도 충분한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으나 “諸官司貢賦”(≪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賑恤 恩免)라든가 “各司貢物” (≪高麗史≫권 84, 志 38, 兵 3, 貢役軍) 등의 기록으로 미루어 조선에서와 같이 관사가 스스로 마련하여 납공하는 공물부담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국가에서는 관비공물을 제정하여 민이 스스로 마련하기 어려운 특정 항목의 공물을 관에서 마련하여 바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시대 관비공물의 사례는 모두 후기의 것으로서, 국가의 용도에 필요한 각종 물품들을 각 所의 생산품으로 수취할 수 있었던 고려 전기의 경우 역시 별도로 관비공물을 규정하고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오히려 위의 세공액의 내용을 보면 미·포의 경우는 군현 내의 일반민들이 부담하던 품목이며, 나머지는 대부분 당시 所에서 전업적으로 생산되던 품목들이다. 따라서 군현민들이 부담하기 어려운 특종 산물을 관사에서 마련하여 바치던 관비공물과는 차이가 있어 보인다. 필자의 견해로는 위의 세공물은 관비공물이었다기보다는 일반 군현에 분정된 군현농민과 所民들의 납공품이라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 것은 주·부의 세공액이 군현 규모에 관계없이 일률적으로 규정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高麗史≫의 기록 가운데 “貢賦已有定額”(≪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貢賦 충렬왕 22년 6월)이라든가 “巡訪計定使 蔡洪哲等所定貢賦 視州郡殘盛 均定其額(≪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貢賦 충숙왕 원년 윤 3월) 등의 기사들을 볼 때 이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물론 현재로서 그 이유를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諸道外官員僚 所管州府의 稅貢이란 고려 전기 군현제의 특성상 개별 군현의 세공액이 아니라 외관이 관할하던 主縣(領郡) 또는 그 관할 하 수개 군현의 세액을 규정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럴 경우 100여 개의 군현에 파견된 외관들이 각각 관할하던 소관 군현의 규모는 수취상 거의 무시해도 좋을 만큼 큰 차이가 없는 것이었으며, 위의 세공액은 외관들의 任內의 군현에서 수취하여 납공해야 할 최저액에 대한 규정이 아닌가 생각되기는 하나 단정하기는 어렵다. 이 품목들을 살펴보면 황금·백은·백적동·철·염 등은 모두 전국 각 군현 내의 所에서 전업적으로 생산되던 물품이었으며, 일반 군현 내의 농민들이 부담할 수 있었던 품목은 미곡과 포류 정도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서도 미곡은 주로 조의 수취품목이었을 것이므로 일반민의 공물은 포류가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민의 삼세인 租·調·庸이 흔히 租·布·役으로 지칭되어 布가 調를 대치해 쓰이며1102)<표 1>高麗稅目對照表 참조. 調布1103)≪高麗史≫ 권 80, 志 34, 食貨 3, 賑恤 恩免 현종 21년 6월., 貢布1104)≪高麗史≫ 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정종 7년 4월.라는 명칭이 보이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려 전기 군현 공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품목은 군현 내 농민들이 납공하고 있었던 포류와 소의 거주민들이 납공하였던 각종 전업적 생산품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려시대에는 이와 같이 一歲一貢하게 되어 있었던 常貢과 아울러 別貢이라는 명목의 수취가 별도로 이루어지고 있었다.1105)일례로 예종 3년 2월 判을 보면 군현과 所에는 각각 나름대로의 상공과 별공의 부담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貢賦). 이 가운데 상공은 일정한 기준에 의해 품목과 액수가 정해져 있었으나, 별공은 임시세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만큼 수시로 징수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품목도 토산공물 등 다양한 물색이 수취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1106)姜晋哲, 앞의 글, 278∼279쪽.
金載名, 앞의 글, 90∼92쪽.

요컨대 고려 전기 군현의 공물은 군현민의 포류와 소의 산물을 1세 1공하게 되어 있었던 상공과 그 밖에 필요에 따라 불시에 각종 물품이 부과되던 별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고려 후기에 오면 이와 같은 공부제에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12세기 이래 고려사회는 지배체제의 동요, 전시과의 붕괴, 군현제의 변화 등 사회 전반에 걸친 변동기를 맞게 된다. 더욱이 13세기에 들어와서는 몽고와의 장기간에 걸친 전란을 겪게 되고 이어 원의 지배를 받게 되는 등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와 같은 상황은 수취제에도 적지 않은 변화로 나타난다.

다음<표 1>의 高麗稅目對照表를 살펴보면 고려 전기 일반민에 대한 기본 수취항목이었던 조, 포, 역 삼세가 고종 이후로는 三稅·常徭·雜貢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고려 후기 수취제의 변화를 알아 보기 위해서는 우선 이러한 삼세·상요·잡공제로의 개편내용과 그것이 지니는 의미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年 次 調 常 徭 雜 貢 其 他 史料≪高麗史≫
태조 1년
성종 7년
〃 16년
현종 7년
문종 4년
숙종 7년
〃 16년
예종 16년










調

調

調





課役









常 徭


常 徭
常 徭
常 徭
常 徭
常 徭
常 徭

常 徭
常徭=庸








雜 貢

雜 貢
雜 貢
雜 貢
雜 貢
雜 貢
雜 貢
雜 貢
雜 貢
雜 貢
雜貢=調










雜 稅


柴炭貢





 
권 80 恩免
권 80 災免
권 80 恩免
권 80 恩免
권 78 踏驗損實
권 80 災免
권 84 職制
권 14 睿宗世家
권 80 水早疫癘賑
   貸之制
권 80 恩免
권 33 忠宣王世家
권 80 恩免
권 80 恩免
권 80 恩免
권 80 恩免
권 80 恩免
권 80 恩免
권 80 恩免
  ≪三峯集≫
고종 13년

고종 42년
충선왕 즉위
충렬왕 24년
 〃  〃
 〃  〃
 〃  〃
 〃  34년
공양왕 12년
 〃  14년
조선  태조
三  稅

三  稅




三 大 貢
轉  稅
三  稅

<표 1>高麗稅目對照表

기존의 연구에는 삼세를 일반적 부세로서의 조·용·조 삼세로 보는 경우와1107)李惠玉, 앞의 글, 1980.
朴鍾進,<忠宣王代의 財政改革策과 그 性格>(≪韓國史論≫9, 서울대, 1983).
단순히 田租로 보는 견해가1108)今堀誠二, 앞의 글(1939), 35쪽. 있다. 또한 최근에는 ‘三稅之田’1109)≪高麗吏≫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신우 원년 2월.에 주목하여 이를 국가 수조지로서 3대 재정원이 되는 국용전·녹봉전·군수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삼세는 여기서 수취되는 전조를 뜻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1110)朴京安,<14世紀 甲寅柱案의 運營에 대하여>(≪李載龒博士還曆記念 韓國史學論叢≫한울, 1991), 230∼233쪽.

그러나 세제상에 있어 흔히 삼세라 하면 조·용·조를 지칭하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에, 하필 조세의 한 항목을 삼세로 개정했다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더욱이 충렬왕대의 삼세는 조·용·조를 의미하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1111)≪高麗史≫권 28, 世家 28, 충렬왕 4년 7월 을유. 아울러 재정 용도로 쓰이던 국용·녹봉·군수전의 전조를 수치상의 세목인 삼세와 연결시켜 이해하는 것도 선뜻 납득이 가지 않는 견해이다.

또한 상요·잡공에 대해서도 이를 고려 전 시기를 통해 공부를 구성하고 있었던 현물세로 보는 견해와1112)姜晋哲,<농민의 부담>(앞의 책)을 비롯하여, 李貞熙와 金載名의 앞의 글이 그러하다. 그러나 김재명은 잡공을 貢賦 속에 포함시키고 상요를 요역의 일부로 파악하여 강진철·이정희와 부분적으로 다른 견해를 보인다. 고려 후기 어느 때 삼세 외에 부가된 현물세로 보는 견해들이 있다.1113)李惠玉, 앞의 글(1980) 및 朴鍾進, 앞의 글(1991). 그러나 전자는 충숙왕 원년에 공부가 재조정될 때 공부 이외에 잡공이 상정되고 있기 때문에 수긍하기 어렵다.1114)≪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貢賦 충숙왕 원년 정월. 따라서 고려 후기의 삼세는 결국 조·용·조를 지칭하는 것이 되며 상요·잡공은 그 이외의 부가세였다고 볼 수밖에 없겠다.

그러므로 문제가 되는 것은 고려 전기의 조·용·조가 삼세로 통합되고 상요, 잡공이 부가세로서 함께 부과된 배경과 이와 같은 세제 변화가 담고 있는 내용이 어떠한 것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현상의 하나가 고려 후기의 사료에 나타나는「三稅之田」의 존재이다.1115)≪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신우 원년 2월. 여기서「三稅之田」의 실체를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표현상 삼세가 수취되는 토지였다고 보는 데에는 별 무리가 없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고려 후기의 삼세가 일반적으로 조, 용, 조 삼세를 지칭하였던 만큼,「三稅之田」이란 표현은 당시 삼세가 토지를 매개로 수취되었음을 강력하게 시사해 준다. 이는 고려 후기의 공부가 토지를 매개로 수취되고 있었다는 사실로도 뒷받침된다. 예컨대 충렬왕·충숙왕대의 기록에 의하면 荒田1116)≪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충숙왕 5년 5월 下敎. 또는 賜給田을1117)≪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貢賦 충렬왕 22년 6월. 매개로 공부(공물)를 수취한 사실이 보이며 貢賦田1118)≪高麗史≫권 78, 食貨 1, 田制 功蔭田柴 충숙왕 5년 5월.의 존재도 공부가 토지를 매개로 수취되었음을 알려 준다. 토지를 매개로 공물을 수취하던 현상은 이미 12세기부터 나타난다.1119)≪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賑恤 恩免 예종 3년 2월. 즉 예종 때에는 토지(田丁)를 매개로 布稅를 징수하였던 모습이 보이는데, 이는 고려 전기 군현공부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던 調가 민호를 대상으로 하여 포로 수취되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1120)고려 전기의 調가 戶를 대상으로 수취되었던 것은 租稅는 田을 대상으로 수취하고, 征賦는 戶를 대상으로 賦絲를 수취하였다는 태조 원년 7월의 기록 등을 통해 알 수 있으며, 또한 調布, 貢布 등으로 불리웠던 데서 그 내용이 주로 布의 수취였음을 알 수 있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또한 숙종 때부터 기록에 나타나는 徭貢도1121)≪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賑恤 恩免 헌종 원년 숙종 즉위 詔 및 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附 沆 고종 37년과 권 80, 志 34, 食貨 3, 賑恤 恩免 충렬왕 4년 4월 敎. 고려 후기 삼세의 변화와 관련하여 상당히 관심을 끄는 稅目이다. 요공은 종래 상요·잡공의 약어로 보는 견해가 있다.1122)姜晋哲, 앞의 책, 李貞熙, 앞의 글 및 金載名, 앞의 글.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충선왕 교서가 주목된다.

(충렬왕) 24년 정월 충선왕이 즉위하여 下敎하기를 1) 哈丹이 京內를 침입함에 州郡이 소문만 듣고도 지레 항복하였는데 原州만이 홀로 적의 예봉을 꺾었으니 그 邑의 常徭·雜貢을 마땅히 3년 동안 면제할 것이며 2) 開京은 祖鄕이니 三大貢이 외의 常徭·雜貢을 면제할 것이며 3) 여러 州·府·郡·縣의 稅 및 常徭·雜貢으로 지난 해에 거두지 못한 것은 금년의 徭貢과 아울러 면제하도록 할 것이며… 4) 入朝하는 길목인 西海道에는 三稅大貢 이외의 常徭·雜貢 및 각 驛의 柴炭貢을 금년에 한하여 전부 면제하라(≪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賑恤 恩免).

위의 기사 가운데 3)의 기록은 요공을 상요·잡공의 약어로 보는 유력한 근거로 이용되고 있는 부분이다. 즉 ‘금년 요공’의 요공을 상요·잡공의 약어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같은 교서 중 1)에서는 원주가 적의 예봉을 꺽었다는 것을 이유로 3년간의 상요·잡공을 면제받고 있고, 2)에서는 개경이 祖鄕이라는 이유로, 4)에서는 서해도가 입조하는 길목이었다는 것을 이유로 각각 상요·잡공을 면제받고 있다. 따라서 만일 위에서 면제된 주·부·군·현의 금년 요공이 상요·잡공이었다면 원주·개성·서해도의 경우만 또 다시 특별한 이유를 들어서 상요·잡공을 면제할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오히려 요공이 상요·잡공과 서로 다른 세목이었으리라는 것을 시사해 주는 좋은 근거가 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의 감면 사례 중에 전 군현을 대상으로 한 해의 공물 모두를 면제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몇몇 특정 지역이 아닌 전 군현을 대상으로 감면조치를 내릴 경우에는 田租에 대한 면제가 대부분이었다. 간혹 공물을 면제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특별한 몇몇 지역, 또는 포흠된 공물의 면제 정도에 그치는 것이었다.1123)≪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賑恤 恩免·災免. 아마도 곡물로 수취되던 조세는 이전의 축적으로도 충당이 가능하나 공물(잡공)은 품목의 특성상 그때 그때 충당되는 현물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생각된다.1124)뒤에 다시 언급되겠지만 잡공은 대체로 수공업제품, 자연채취물 등이 그 내용을 이룬다고 생각된다.

또한 다음 사료는 崔怡(瑀)의 식읍인 진주의 祿轉·稅布·徭貢이 崔沆에게 직납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고종 37년에 왕이 下制하기를 ‘怡의 食邑 晋州의 祿轉·稅布·徭貢을 沆家에 직접 납공토록 하라’고 하였다(≪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附 沆).

위의 기사에 보이는 녹전·세포·요공이란 바로 이 시기 진주민이 내던 삼세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원래 녹전은 전조를 지칭하는 것이며,1125)≪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賑恤 水旱疫癘 賑貸之制. 세포는 調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徭貢은 자연히 庸(역)에 해당되는 세목이 되며, 녹전·세포와 더불어 삼세를 구성하게 된다. 그런데 ‘요공을 녹전·세포와 더불어 沆家에 직납하라’고 한 사실이 주목된다. 이는 곧 요공이 현물로 납공되는 역의 물납화 현상을 의미한다. 이러한 役의 물납현상은 이미 12세기부터 나타나는데, 명종 때 貢役이 役價로 대납되던 사례를 들 수 있다.1126)≪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貢賦 명종 18년 3월. 따라서 숙종대부터 보이던 요공은 상요·잡공의 약어라기 보다는 12세기 이래 역(용)의 일부가 현물세화하는 경향을 나타내 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 요역 징발이 전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고려 전기에는 민의 삼세를 조·포·역이라 하여 역의 직접 징발이 일반적이었음에 반해, 고려 후기에는 요공이라 하여 요역을 통한 공물 수취나 役價의 대납을 통해 역의 일부분이 물납화하는 추세로 나아갔던 것이라 생각된다.

이와 같이 고려 후기에 역이 요공의 형태로 납공되면서 점차 물납화의 추세를 보였다면, 이 역시 토지를 매개로 수취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즉 고려 전기에 이미 대납제가 보이며, 예종대에 오면 平布折納制가 제도화된다.1127)≪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貢賦 예종 9년 10월 判.

이러한 현상은 당시 농업 생산력과 유통경제의 발달에 따라 물품화폐로서의 포가 가치척도로서 보편화되었던 상황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는 것이지만, 아울러 수취상에 있어서도 대납 현상이 상당히 일반화해 갔던 상황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대납현상이 일반화되어 감에 따라 역의 일부가 米, 또는 布로 절납되면서 점차 토지를 매개로 수취되어 갔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울러 12세기 이래 부곡지역의 광범한 해체현상 역시 요역 징발에 변화를 촉진시킨 또 다른 요인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대체로 고려 전기의 부곡민들은 세입위임지의 일부를 경작하고1128)朴宗基,<高麗의 收取體制와 部曲制>(앞의 책). 국가 재정 용도에 필요한 각종 물품을 생산 또는 운반하는 등의 특정한 역을 지고 있었다. 그러나 12세기 이래 사회 경제적 변동과 더불어 부곡지역이 해체되고 민의 유망이 심화되어 감에 따라 과거 부곡인들이 지던 역의 대부분은 군현단위의 정액 수취 원칙상 일반 군현민들의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가운데에서도 고려 전기 所에서 생산되던 수공업제품을 비롯한 각종의 생산물 등은 잡공이라는 새로운 항목이 되었던 반면, 세입위임지의 경작 및 세곡의 운반 등 전세의 역은 요공 속에 포함되어 전을 매개로 수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포(調) 역의 일부가 토지를 매개로 수취되던 경향은 조선 전기 수취제에도 일정하게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조선시대의 요약은 크게 所耕徭役과 雜役으로 나누어지며, 소경요역은 다시 田稅之役과 貢賦之役으로 구분된다. 그런데 이 가운데 소경요역은 계절이나 日限 등에 특별한 규정이 없이 수시로 징발하던 잡역과 달리 전세로 간주될 수 있는 부분이다.1129)有井智德,<李朝初期の徭役>上(≪朝鮮學報≫30, 1964), 67∼100쪽. 또한 공물의 경우도 조선 초기에는 田稅貢物과 元定貢物로 구성되어, 전세공물은 지방 토산물(토공)로 수취하던 원정공물과 달리 布貨·油蜜 등 전을 매개로 수취되는 것이었다.1130)田川孝三,<貢賦について>(앞의 책). 이와 같이 조선 전기의 요역과 공물에 전세공물이나 소경요역과 같이 전을 매개로 수취되던 부분이 있었던 것은, 고려 후기 이래 布(調)와 役이 토지를 매개로 수취되던 상황을 계승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상요, 잡공에 대해서는 유일하게 鄭道傳의≪朝鮮經國傳≫에서 그 내용을 살필 수 있다.

나라의 賦稅의 법에 租는 모두 전토에서 나오고 이른바 상요, 잡공은 그 지역의 소출로서 官에 납부하는 것이니 대개 당의 조·용·조를 이은 것이다. 전하(태조)께서는 부세가 무거워 우리 백성들이 곤란을 겪을까 염려하여 攸司에 명하여 田賦를 바르게 고치는데…상요·잡공은 다만 관부에 내는 숫자만 정했을 뿐, 戶에 대해 某物을 내어 調라 하고, 身에 대해 某物을 庸이라 하는가를 분명히 하지 않았다. (이에) 稅吏들이 약점을 이용하여 간계를 써서 함부로 수탈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더욱 곤궁해지고 豪富之家는 갖가지 방법으로 規避하니 (국가의) 재용이 도리어 부족해지고 있다. 전하께서 백성을 사랑하여 부세를 정한 뜻을 아래에서 강구하지 않으니 攸司의 책임이다. 다행히 무사하고 한가한 때를 당하여 강구하여 시행하여야 할 것이다(≪三峯集≫권 3, 朝鮮經國傳 上, 賦典 賦稅).

이에 의하면 상요·잡공은 용·조에 해당하는 세목이며 身과 戶를 매개로 하여 토지의 소출로 납부하는 현물세였음을 알 수 있다.1131)이러한 사실은 정도전이 당시의 부세제도를 말한 내용 가운데에 보이는 기록이다. 따라서 이는 선초의 부세제를 설명한 것으로 고려 후기의 세제(주로 상요·잡공부분)와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것이라 하여, 이 사료를 통해 고려 후기의 상요·잡공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 의문을 표하는 견해가 있다(朴鍾進, 앞의 글, 212∼223쪽). 그러나 필자의 견해로는 위의 기사가 다소나마 고려 후기의 상요·잡공의 내용을 알려 주는 유일한 기사일 뿐만 아니라,≪朝鮮經國傳≫이 편찬된 태조 3년은 아직 조선 나름의 새로운 수취체계가 마련되기 이전이었다. 즉 태조 원년 12월 貢賦 詳定都監에서 “命臣等 考前朝貢案歲入多寡 歲支經費 斟酌損益 以祛積弊 以立常法 實生民之福也”(≪太祖實錄≫권 2, 태조 원년 10월 경신)라고 건의하여, 당시의 貢賦制는 積弊만을 제거하는 차원에서 대체로 고려시대의 제도를 답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정도전의 당시 세제에 대한 이해는 조선조에 확립된 새로운 수취체계상에서 나온 것이라기 보다는 고려의 세제에 대한 이해에 보다 가깝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 기록에서 수취의 근간으로 삼고 있는 조·상요·잡공이 고려 후기 삼세·상요·잡공과 다소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고려 말의 수취제를 반영한다는 면에서 고려 후기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이용되어도 별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된다. 조선 초의 세제를 조·용 조에 바탕을 둔 조·상요·잡공으로 설정한 것은 고려 후기의 세제를 기본으로 하되 당시 調·庸이 포·역과 잡공으로 병과되었던 현상을 개정하고자 하였던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따라서 고려 후기에는 용·조에 해당하는 세목이 이중으로 부과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고려 말기에 포 뿐만 아니라 잡공이 함께 부과되고 있었던 상황에서도 알 수 있다.1132)고려 후기에 調와 잡공이 병과되고 있었던 것은 “戶布를 신설한 것은 단지 잡공을 감면하기 위한 것으로서 前朝의 말기에 이미 호포를 거두고 있었는데 또 잡공을 징수하여 민폐가 됨이 적지 않으니 금후로부터 호포는 한 가지로 모두 감면하게 하소서”(≪太祖實錄≫권 1, 태조 원년 7월)라는 내용에서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중국 당·송대 세제 변화도 크게 참조된다. 唐 초기의 세제는 매 丁을 매개로 수취되었던 조·용·조와 잡요가 기본을 이루었다. 그러나 8세기 중반부터는 租에 해당되는 것이 지세, 庸·調에 해당되는 것이 호세로 변하면서 夏·秋 양세로 바뀐다. 그런데 호세에 해당되는 夏稅는 금납화가 권장되다가 다시 미곡으로 절가 대납되면서 지세화됨으로써, 결국 과거의 조·용·조 삼세가 모두 토지를 매개로 수취되게 되었다. 한편 戶에 대해서는 또 다시 호세에 속했던 용이 부활하여 身丁錢이 부과되는 등 용에 해당되는 세액이 이중으로 부과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1133)河上光一,≪宋代の經濟生活≫(吉川弘文館, 1983), 90∼120쪽. 위와 같은 상황을 볼 때 고려의 수취제도 후기로 오면 송대와 비슷하게 조·용·조 삼세가 모두 토지를 매개로 수취되는 한편 호에 대해서는 다시 상요·잡공이 병과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상요·잡공의 내용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별로 밝혀진 바가 없다. 최근의 연구에서 잡공이란 주로 조선시대의 土貢과 동일한 실체로 파악되며 그 품목은 대체로 자연채취물이나 수공업제품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하는 견해가 있는데1134)金載名, 앞의 글(1991), 84∼89쪽. 이는 대체로 옳은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잡공은, 주로 고려 후기 부곡지역의 해체로 소에서 납공되던 각종 특산품들의 대부분을 군현민에게 부과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게 추측하는 근거의 하나로≪世宗實錄地理志≫나≪慶尙道地理志≫에 보이는 토공의1135)≪世宗實錄地理志≫에는 厥貢,≪慶尙道地理志≫에는 토산공물 등으로 지칭되고 있다. 품목을 살펴 보면, 어류·피혁·목기·도기·미역·철·동·은·종이 등 대부분이 고려 전기 소의 납공물들이었던 것이다. 한편 상요의 경우는 그 내용이 주로 ‘잡공의 생산에 투여되는 노동력 징발’1136)金載名, 앞의 글, 104∼106쪽. 또는 ‘貢役의 물납화 현상’이라는1137)李貞熙, 앞의 글, 10∼13쪽.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아마도 상요의 내용 속에는 양자가 모두 포함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려 후기에 상요·잡공이 함께 부과되었던 배경은 일반적으로 10, 11세기 이래의 농업 생산력의 발달, 상품 유통 경제의 발달 위에 국가의 재정확보책 이 맞물려 나타난 결과로 생각되지만, 아울러 12세기 이후 군현제 변동과 더불어 나타난 전국적인 부곡지역의 해체 현상 또한 주목할 만한 요인의 하나로 들 수 있다. 이미 알려져 있듯이 고려 전기의 군현제는, 군현제 영역과 부곡제 영역으로 편성되어 있었다.1138)朴宗基, 앞의 책. 그리고 이러한 군현제의 편성은 수취제 운영 방식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즉 국가는 일반 군현지역과 부곡지역을 구분하고 수취제 운영방식에도 각기 차별성을 두어 군현민에게는 조·용·조 삼세의 부담을 지웠던 반면, 부곡 지역의 주민들에게는 그 밖에 특수한 역을 부과하였던 것이다. 예컨대 所의 거주민들에게는 금·은·동 철·자기 등 각종 물품을 생산하여 공납토록 하였으며, 장·처민에게는 장·처전을 경작하여 전조를 납부하게 하였고, 驛·津 등에는 傳遞·知路指路의 役·曹運 등의 특수한 역을 지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 오면 부곡지역의 광범한 해체 현상에 따라, 군현 단위의 정액 수취를 원칙으로 하였던 수취제의 특성상 과거에 소로부터 충당하였던 각종 전업적 산물이나 부곡지역이 지던 특수한 역을 일반 군현에 부과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다음의 공양왕 원년(1389) 12월 조준 등이 올린 상소는 그러한 한 사례를 보여 준다.

…근래 역호가 凋弊하여져서 모든 鋪馬·傳遞·知路指路의 役은 주군이 그 고통을 대신 받아 유망하기까지에 이르렀으니, 주군으로 하여금 그 업을 회복시키고자 하면 마땅히 먼저 역호를 존휼해야 합니다…(≪高麗史≫권 82, 志 36, 兵 2, 站驛).

그러므로 고려 전기에는 주로 米·布만으로 단일화되었던 일반 군현의 공부에 더하여 각종 토산물이나 전업적 수공업 생산품 등을 포함한 다양한 현물 세공인 잡공을 규정하여 병과하였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려 후기에 특히 ‘不産貢物’의 수취가 크게 문제시되었던 것도 이러한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예컨대 특수한 지리적 조건 아래에서만 생산되는 인삼을 산지가 아닌 곳의 농민들에게도 부과하여 산지까지 가서 채납케 하거나1139)≪高麗史≫권 123, 列傳 36. 嬖幸 1, 曹允通. 또는 당시의 전업적인 숙련공조차도 짜기 어려운 고급 세마포인 20승 황마포를 일반 촌부에게까지 부과하였던 사례들이1140)≪高麗史≫권 123, 列傳 36, 嬖幸 1, 朱印遠. 그것이다. 20승 황마포와 같은 것은 과거 絲所에서나 생산되었음직한 품목으로 군현의 일반민들이 쉽게 납공할 수 있는 품목이 아니었다. 그래도 농민들로서는 납공의 의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京師에까지 가서 저렴한 농산물로 비싼 값의 해당 물품을 사들이지 않을 수 없었지만 높은 가격으로도 매입하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1141)≪增補文獻備考≫권 150, 田賦考 10, 貢制 1, 충렬왕 27년.

그러나 이와 같이 조·용·조 삼세제를 기본으로 하면서 용·조에 대하여 이중으로 과세하는 것은 세제 운영상 번거로울 뿐 아니라 민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정도전이 조선 초의 부세제를 조·상요·잡공으로 표현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모순을 바로 잡아 전을 매개로 수취하던 삼세를 조로 환원하고 상요·잡공을 각각 용·조에 상응하는 세목으로 하는 삼세제의 운영을 지향코자 했던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가령 앞에서 살폈던 “고려 말 호포와 잡공이 병과되는 폐단이 있어 호포를 견면하라”는 기사에서,1142)≪太祖實錄≫권 1, 태조 원년 7월조 기사(주 41) 참조. 조선 초의 調는 호포제를 폐지하고 잡공제를 지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고려 후기의 수취제에는 토지를 매개로 조·용·조를 수취하고 상요·잡공을 함께 거두는 등 적지 않은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따라서 군현의 공물수취도 공부와 잡공제로 운영되어 군현민들의 부담이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즉 고려 전기에는 일반 군현지역과 부곡지역을 차별 편제하여 공부를 수취하였는데, 군현민들에게는 주로 布를, 부곡 지역에는 전업적 생산품을 부과하였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잡공이라는 명목으로 과거 所에서 납공하던 물품의 대부분을 일반 군현민에게 함께 부과함에 따라, 공물수취는 공부와 잡공체계로 운영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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