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2. 공부
  • 4) 수취구조

4) 수취구조

공부는 조세와 더불어 국가 재정의 양대 재원이 되는 중요한 稅 항목이었다. 조선 전기의 경우 각종 공물의 수취와 지출은 각각 貢案, 橫看이라고 하는 세입, 세출부에 의해 집행되었다.1163)田川孝三,<貢案と橫看について>(앞의 책) 참조. 즉 공물은 공안의 규정에 따라 수취되고 수취된 공물은 횡간에 의해 국가의 재정 용도별로 지출되었다. 또한 정부 각 기관은 그 職掌에 따라서 취급하는 공물의 품목이 결정되어 있었으며, 지방 각 관은 분정된 공물을 수 개의 정부기관에 상납하고 정부의 각 관아는 소요 공물을 조달하기 위하여 수 개의 지방관을 그 관할 하에 두고 있었다.1164)田川孝三, 위의 책, 275쪽. 그런데 이와 같은 조선 초기의 수취구조는 대체로 고려의 제도를 답습한 것이었으므로 고려도 비슷한 방식으로 운영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중앙의 각 관사가 각각의 지방군현을 지배하는 수취방식은 다음의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신우 원년 2월에 宥旨하기를, ‘外吏가 상경함에 각 관사가 공물의 납입을 재촉하고 연체된 것을 징수함으로 인하여 私錢을 稱貸하여 그 값을 배로 물게 되니 해가 민에게 돌아가는지라…’라 하였다(≪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借貸).

공민왕 원년 2월에 宥旨하기를, ‘여러 관사의 貢賦로 아직 수송되지 않은 것은 郡人 가운데 京師에 거주하는 자에게 먼저 징수하니 住京者는 칭대하고 백성으로부터 배로 거두며…’라 하였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貢賦).

위의 기사에서 지방 군현이 서로 분리되어 중앙 각 관사에 예속되어 있었던 상황을 볼 수 있다. 또한 충렬왕대의 “안동 경산부 관내 군현 공부로서 대부·영송·소부 등의 庫에 납입하는 것 이외에는 모두 원성전에 운반하라”는 기록에서도,1165)≪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貢賦 충렬왕 4년 2월 下旨. 안동 경산부의 공부는 대부시, 영송도감, 소부시 및 원성전에 각각 분산적으로 예속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공부는 지방의 행정조직과 그 곳에 설치된 지방기구를 이용하여 촌락 농민에게 분정되고 수취되었다. 실제적인 수취과정은 군현을 기준으로 중앙에서 군현, 군현에서 촌락의 두 단계로 이루어지는데, 이는 군현이 소관 촌락내의 납공물을 수취하여 중앙으로 상납하는 중간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수취의 첫 단계인 촌락 내에서의 수취는 촌장에 의해 이루어지며, 이들에 의해 수취된 촌락의 납공물이 군현의 창고로 집적되는 과정은 향리의 소임이었다. 향리는 군현 내 촌락의 수취사무를 직접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군현 내에 분정된 세공액을 책임지고 충당해야 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충혜왕대에는 공부의 액을 채우지 못하게 된 향리가 자살한 사례까지 보이고 있다.1166)≪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貢賦 충혜왕 4년 7월. 뿐만 아니라 수취된 각종의 세공물을 각 군현 창고에 보관하거나 조창까지 운반하는 것도 모두 향리의 임무였다. 이와 같이 촌락으로부터 군현에 이르는 과정의 수취사무는 주로 향촌사회에 뿌리를 둔 훈장과 향리에 의해 수행되었던 것이다. 군현의 수취는 중앙에서 파견된 외관 즉 수령이 향리들을 감독 지휘하면서 수행하였다. 수령은 비단 소관 군현의 공물 수취 뿐만 아니라 수취 이전의 양전·답험·경작에 관련된 모든 사항을 책임지고 있었다. 따라서 공물의 수취, 상납 등의 수취사무는 수령 고과의 중요한 기준이 될 정도로 수령의 임무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지방의 각 행정기구를 통해서 수취된 군현의 각종 세공물은 조운에 의해 중앙의 京倉으로 운반된다. 세공물의 운반은 육로를 통한 수송도 생각해 볼 수 있으나,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육상의 교통로가 정비되어 있지 않던 당시로서 조운은 가장 빠르고 안전하며 비용이 적게 드는 운반수단이었다. 예컨대 원종 12년 3월에 몽고에 보낸 국서 가운데서 “경상·전라도의 공부는 육로로 수송하지 못하고 반드시 水運으로 하는데 지금 역적 삼별초가 진도에 웅거하면서 수로의 咽喉인 이 곳을 왕래하는 배들을 지나가지 못하게 한다”1167)≪高麗史≫권 27, 世家 27, 원종 12년 3월.라고 한 기사를 보면 이 시기가 대몽 항쟁기이기는 하나 경상도·전라도의 공부 수송을 전적으로 수운에 의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수로가 세공물 운반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고려시대에는 이미 국초로부터 13조창이 설치되어 있었다.1168)≪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漕運. 그 가운데 12창은 남도의 연안에 설치되고, 나머지 1창은 서해도 장연현에 설치되어 있었다. 원래 조창이란 稅米의 수송을 위하여 해로와 수로의 연변에 설치된 창고이지만, 세곡의 보관 뿐만 아니라 부근의 세곡을 수합하여 이를 경창으로 수송하던 기관이었다. 즉≪高麗史≫食貨志 漕運條에는 “州郡의 조세는 諸倉으로 운수한다”라고 하여, 각 조창이 일정한 수세구역을 가지는 한편 추수기에는 세곡을 수납하는 기능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또한 조운에는 기한이 정해져 있었는데, 다음 해 2월의 조운에는 가까운 지역의 경우 2월에 한하며, 먼 지방은 4월에 한하여 경창으로 수송을 마치도록 되어 있었다.1169)위와 같음.

한편 국방지역으로서 특별한 성격을 띠고 있었던 양계지역의 수취구조는 일반 군현과 차이가 있었다. 즉 일반 남도지역의 세공물은 조창에 수합된 뒤 다시 경창으로 수송되어 중앙정부의 각종 용도에 충당되었으나, 양계지역의 조세는 그대로 현지의 군수에 충당되는 독특한 운영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양계의 토지는 대부분 군수전에 충당되어 조세의 대부분이 防戍에 충당되었으며1170)≪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공민왕 5년 6월 下旨. 貢布도 징수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남도의 세공물을 거두어 보관하고 수송하는 기구였던 조창이 양계지방에 설치되지 않았던 것도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중앙으로 보내지지 않았던 것 뿐이지 양계 내에서도 분명히 조세를 거두어 양계 내의 군수에 충당하거나 비축하였으므로, 중앙정부로서는 이를 직접 관리하거나 감독할 필요는 있었을 것이다. 즉 양계지방에는 병마사 이외에 감창사가 파견되어 조세와 창고의 관리 감독을 맡고 있었다.1171)金南奎,<高麗 兩界의 監倉使에 대하여>(≪史叢≫17·18, 1973).

이와 같이 양계지방이 남도와 달리 특수한 수취형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일차적으로 이 지역이 특수 군사지역이었던 때문이었을 것이나, 고려의 국가 재정형태가, 전국의 공물을 정부기관이 일원적으로 수집하여 그것을 다시 각 기관에 분배하지 않고, 왕실·궁원·정부의 각 기관마다 공물을 상납하는 군현을 미리 실정에 맞추어 설정하였던 방식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李惠玉>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