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3. 요역
  • 1) 요역의 용례

1) 요역의 용례

고려시대에서 요역을 뜻하는 말로 사용된 용어로는「力役」「役」「賦役」「差役」「徭」「課役」등이 있었다. 이러한 용어들 중에는 요역의 의미도 있지만, 요역 이외의 직역 또는 수취일반을 뜻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우선 그 혼란을 피하기 위해 용어에 대한 문제부터 검토해 보기로 한다.

신분에 관계없이 국가에서 의무적으로 노동력을 징발하는 경우,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말은 力役이 아닐까 싶다. 역역이 요역의 뜻으로 사용된 예로는, 성종 원년(982)의 기록에 “제사의 비용이 백성의 고혈과 역역에서 나온 다”1173)≪高麗史節要≫권 2, 성종 원년 6월.라든지, 또 공민왕 23년(1374)조에서 “중앙과 지방의 백성이 역역에 시달려 三農의 시기를 놓쳤다”1174)≪高麗史≫권 120, 列傳 33, 尹紹宗. 라고 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비록 역역이 요역과 같은 뜻으로 통용될지라도, 법제상으로 요역의 대상이 아닌 사람을 사역시키는 경우에도 흔히 사용되고 있으므로1175)예컨대≪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정종 11년 5월조에 의하면, “군인이 扈駕나 內外力役을 하지 않는 것이 없다”라 하고 있다. 징발대상의 신분과 관련시켜 세심한 사료상의 검토가 필요하다.

다음으로「役」이라는 용어가 있는데, 이 역시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말로서 양반에서 노비에 이르기까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통용되며, 특히 직역의 뜻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1176)“…又公私處久遠接居之內 人吏之避役者 勿論久近 皆還本役”(≪高麗史≫권 85, 志 39, 刑法 2, 禁令 충렬왕 11년 3월). 그러나 역이라는 용어는 성종 7년의 기사에서 “누리의 피해로 수확량의 손실이 4分 이상일 때는 租를, 6分 이상일 때는 租와 布를, 7分 이상일 때는 租·布·役 모두를 면제해 주도록 하라”1177)≪高麗史節要≫권 2, 성종 원년 6월.고 한 것을 보면 요역의 뜻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역이 주로 조·포와 함께 지칭될 때는 요역의 의미가 확실한데 그 외의 경우는 사료의 검토가 문제된다.

한편「賦役」의 용례는 다음의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공양왕 원년(1389)의 “경기 8현은 과렴이 고르지 않고 부역이 한도가 없으므로 민이 안심하고 살 수 없다”1178)≪高麗史節要≫권 34, 공양왕 원년 12월.는 기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요역을 뜻하는 경우이다. 둘째는 충렬왕 4년(1278)에 “權貴가 민을 모아 處干이라 하여 三稅를 포탈하니 이들을 파하여 부역을 맡기도록 하라”1179)≪高麗史節要≫권 19, 충렬왕 4년 7월.는 사료에서 요역을 포함한 수취 일반의 뜻으로 사용된 용례이다. 셋째는 賦를 동사로 해석하여「부과된 역」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는데, 공민왕 5년(1356)의 기사에서 “향리·역리와 공사노예가 부역을 피해 함부로 승려가 되니 호구가 날로 줄어든다”고1180)≪高麗史≫권 85, 志 35, 刑法 2, 禁令 공민왕 5년 6월. 한 것이 그 예이다. 이와 같이 부역의 용례가 당나라에서는 세제 전반을 지칭하고1181)唐의 경우≪大唐六典≫권 3에서 “凡賦役之制有四 一曰租 二曰調 三曰役 四曰雜徭”라 한 것처럼 부역은 조·역·조 모두를 지칭한다. 다만 당에서의 役은 고려와 달리 중앙정부의 명령으로 동원되는 役만을 지칭하며, 지방관부의 명령으로 동원되는 것은 잡요라고 하였다. 또 다른 기록에서 “…三曰役 四曰課”라든지 “…三日役 四曰課”라 한 것을 보면(曾我部靜雄,≪均田法とその稅役制≫, 1954, 254쪽) 고려에서 사용되는 요역이나 과역의 용례는 三과 四가 결합된, 다시 말하자면 중앙적인 역과 지방적인 역이 포함된 것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와 같이 고려의 요역은 ‘力役’ ‘差役’을 제외하고는 모두 唐의 용례 및 명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내용상은 다소의 차이가 있는데, ‘役’이나 ‘徭’의 경우 고려에서는 중앙 주체의 것인지 지방주체의 것인지 구별되지 않으며, 본문에서 후술하겠지만 ‘課役’의 경우도 요역과 수취일반으로 혼용하여 사용되었다. 수취일반의 용례는≪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賑恤 災免之制 숙종 7년 3월조 참조. 조선 전기의 경우는 요역과 거의 동일하게 사용된 데1182)有井智德,<李朝初期の徭役>(≪朝鮮學報≫30, 1964), 65쪽. 비해, 고려시대의 경우는 여러 가지 용례가 있으므로 사료를 다룰 때 주의가 필요하다.

「差役」의 용례는 고려 후기에만 나타나며, 요역의 용례와 역을 부과하는 뜻의 두 가지로 사용되고 있다.1183)‘差役’은 중국 唐이나 宋 모두 요역이 아니라 직역을 의미하는 용례이다(≪文獻通考≫職役考). 고려에서 차역이 역을 差定하는 의미로 쓰인 것은≪高麗史≫권 84, 志 38, 刑法 1, 職制 공민왕 20년 12월 기사 참조. 차역이 요역의 뜻으로 사용된 것은 우왕 원년(1331)에 “閑散人이 요역을 피하여 민의 勞逸이 고르지 못하니 차역을 부과하라”1184)≪高麗史≫권 85, 志 39, 刑法 2, 禁令 우왕 원년 2월.고 한 데서 알 수 있다.

「徭役」은「徭」라고 약칭되기도 했는데, 이는≪高麗史節要≫성종 5년(986)의 기사에서 민을 다스리는 관원은 농상을 장려하고 ‘輕徭薄賦’하라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때의「徭」는 요역을,「賦」는 조세를 의미하고 있다.

마지막으로「課役」의 용례는 唐에서는 요역의 뜻만으로 사용되었으나, 고려에서는 요역만을 지칭하기도 하고 수취 일반을 뜻하기도 했다. 과역이 요역으로 사용된 예는≪高麗史≫형법지 1, 戶婚條에 가장이 호구를 위조하여 과역을 면제받도록 한 것을 들 수 있다. 다음에 언급하겠지만 고려에서 요역의 부과는 丁男의 다과를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여기서의 과역은 곧 요역임을 알 수 있다.1185)과역이 세제 전반을 의미하는 사료는≪高麗史節要≫권 6, 숙종 7년 3월 참조.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고려에서 요역의 뜻으로 사용된 말은「力役」 「役」「賦役」「差役」「徭」「課役」등이 있었는데, 차역 외에는 전시기에 걸쳐 쓰이고 있다. 요는 요역과 동일하게 사용되었으나, 역역·역·부역·차역·과역의 용례는 요역만을 뜻할 때도 있지만 요역 외의 역 또는 수취 전반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특별히 사료의 검토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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