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권력이 민을 징발하여 어떤 일에 사역시켰는지 알아 보기 위해서는 요역의 내용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런데 요역의 형태는 工役·貢役·輸役, 기타의 역으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工役이란 각종 토목공사의 역을 말하는데, 공역의 존재는≪高麗史≫崔冲傳에서 서북 州鎭의 남자는 요역으로 인해 피곤하니 城池를 수리하는 외에는 공역을 금지하라고 상주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공역의 내용으로는 궁궐·사찰·관아의 營造 및 山陵役, 築城·造船의 역, 하천·제방의 축조 등 많은 종류가 있으며, 대부분 장기간이 소요되고 대규모의 노동력이 필요한 것이므로 요역의 형태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려시기에 토목공사가 특별히 많이 영조된 배경 중의 하나는 지리도참설과 불교의 융성을 들 수 있다. 지리도참설이란 개경의 지덕이 쇠하면 길지를 택해 離京·離宮을 새로 지어야 국가의 기업이 연장된다는 일종의 延基思想인데, 이에 근거한 영조는 정종 2년(947)부터 나타나고 있다. 즉 정종이 도참설에 따라 서경에 도읍을 옮기기 위해 노역이 그치지 않았으므로 왕이 세상을 떠나자 役夫들이 기뻐 날뛰었다는 것이다.1186)≪高麗史≫권 2, 世家 2, 정종 4년 3월. 이러한 도참사상은 문종 이후 두드러지게 나타나서 이경·이궁의 설치가 유행하였으며, 이런 경향은 고려 후기까지 계속되었다.1187)문종 때 長源亭과 남경의 離宮, 서경의 左·右宮을 창건한 이후, 숙종·예종·인종을 거쳐 후기까지 도참설로 인한 營造가 자주 나타나고 있다(李丙燾,≪韓國史≫中世篇, 震檀學會, 1961, 249쪽).
또한 불교의 융성은 수많은 사찰과 불상 및 탑을 조성케 하였다. 일찍부터 태조는 10훈요에서 사원건립을 경계하고 있으나, 태조의 훈요는 도외시되어 국초부터 사원의 영조가 성행하였다. 예컨대 성종 원년 이전에 이미 세속이 소원에 따라 불사를 영조하니 그 수가 너무 많으며, 중외의 승도가 다투어 영조를 할 때 주군의 長吏가 급하게 사역시켜 민이 괴로워한다는 지적이1188)≪高麗史節要≫권 2, 성종 원년 6월. 나오고 있다. 이후에도 사원의 건립이 성행하였지만 문종 때는 더욱 심해져 12년이나 걸려 興王寺를 완성시킨 것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원을 영조했다. 이러한 현상은 고려 말기까지 계속되었으니, 공양왕 3년(1391) 기사에 의하면 즉위 초에 민가 40여 호를 부수어 절과 탑을 修廣하고, 또 불탑의 역사를 일으켜서「交州一道」는 나무를 자르고 운반하느라 사람과 가축이 모두 병이 들 정도였던 것이다.1189)≪高麗史節要≫권 35, 공양왕 3년 5월. 또 불교와 관련된 역사는 국가권력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승도가 무슨 영조를 할 때마다 반드시 권문호가의 세력을 빌려 민에게 폐를 끼친다고 할 정도로1190)≪新增東國輿地勝覽≫권 5, 開城府 下, 開國寺. 승려의 私役도 결국 민에게 요역으로 부과되었던 것이다.
고려시대는 특히 외환이 많았던 시기이므로 보국의 거점인 축성을 위해 수많은 노동력이 동원되었음은 물론이다.≪高麗史≫兵志, 城堡條에 의하면 크고 작은 城堡의 역사가 170여 회나 이르는데 거대한 축성에는 全道의 역부가 동원되었다. 현종 20년(1029)에 완성된 개경의 나성축조는 丁夫 23만 8천 명, 工匠 8천 4백 명이 동원되어 20년만에 끝난 것이었다. 이에 비하여 몇 십배나 더 큰 공사인 천리장성의 축조는 덕종 2년(1033)에 시작하여 정종 10년(1044)에 완공되었다. 이 공사에 얼마나 많은 노동력이 동원되었는지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이 없으나 전국적으로 엄청난 요역이 민중들에게 부과되었을 것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라 하겠다.1191)姜晋哲, 앞의 책, 285쪽.
한편 공역 가운데 조선의 역이 포함된 것은, 충렬왕 원년(1275)의 기사에서 전함을 수조하기 위해 장정은 다 공역에 나가고 노약자가 농사를 짓는다는 데서1192)≪高麗史≫권 28, 世家 28, 충렬왕 원년 정월. 알 수 있다. 그런데 고려에서 조세나 공부 등의 운반은 조운에 의해 이루어졌으므로 고려정부에 의한 관선 제작도 많았겠지만, 위의 충렬왕 때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元의 요구로 인해 공장과 인부 30,500명을 동원하여 300척이나 되는 전함을 만든다는 예도1193)≪高麗史≫권 19, 世家 19, 원종 15년 2월. 있는 것을 보면, 배를 만드는 역에는 특히 원의 지배 하에 있었다는 특수한 상황에서 보다 많이 징발되었던 것 같다.
이러한 토목공사의 역사를 수행할 때 기술적인 작업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민의 요역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런데 역사가 있을 때 목재나 석재 등의 재료를 마련하고 운반하는 것이 큰 고역인데 이를 위해서 주로 경기·양광·교주민이 징발되었다.1194)≪高麗史≫권 119, 列傳 32, 鄭道傳. 경기는 국왕 이하 문무백관이 거주하며, 종묘·궁궐·관사 등이 존재하므로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공역도 다른 지역에 비해 빈번했을 것인데 그 때마다 먼 곳의 주민을 징발하기보다 자연히 왕도에서 가까운 경기·양광·교주민을 징발하여 사역시켰다. 또 교주도는 재목이 많은 자연조건 때문에 목재를 자르고 운반하는 일에 특히 자주 징발되었으며, 당시의 미숙한 기술수준과 장비, 좋지 않은 작업조건으로 인해 사망자가 많이 생기는 등1195)≪高麗史≫권 16, 世家 16, 인종 6년 6월.
≪高麗史節要≫권 35, 공양왕 3년 5월. 부담이 가혹했다. 이처럼 道에 따라 요역부담의 불균형이 나타날 뿐 아니라 같은 道 안에서도 군현간에 지역적인 불균형이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중앙과 군현 사이에 관찰사가 존재했던 조선 전기의 경우에도 군현 내부의 효율적인 요역운영이 어려웠던 점을 감안하면,1196)尹用出,≪17·8세기 徭役制의 변동과 募立制≫(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1), 23∼25쪽. 고려 전기처럼 중앙에서 직접 600여 개에 이르는 군현에 요역을 부과하는 체제 하에서는 지방관의 자의적인 수탈이 개입되는 등으로 인해 효율적인 운영이 더욱 힘들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고려시기에는 주·부·군·현 등 지방관부를 대상으로 부과하는 공물이라는 稅가 있다. 공물은 민의 각 호를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민의 부담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공물은 수취하는 중앙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현물의 형태지만, 민의 입장에서 보면 노동력의 징발 즉「貢役」의 형태로 나타난다.≪高麗史≫식화지 공부조에 나타나는 공역의 존재로는 예종 3년(1108)의 “경기주현의 상공 외의 요역이 너무 과중하니 공역을 균등하게 하라”든지, 명종 18년(1188)의 “주·부·군·현의 백성은 각기 貢役이 있다”는 등의 사례를 들 수 있다. 공역의 내용으로는 개별적 노동으로 힘든 금·은·동 등의 광산물이나, 御墨 5,000개를 만들기 위해 민을 시켜 소나무 그을음 100斛을 채취하는 데서1197)李仁老,≪破閑集≫권 上. 보듯이 자연물의 채취 및 제조 등을 들 수 있다.
다음은 조세나 공물을 생산지에서 漕倉까지 운반하는 輸役이 있다. 조세와 공물의 수송과정은 관할구역 내의 조창에 일단 수집되었다가 조창에서 다시 京倉으로 수송되는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후자의 경우는 조창주민의 身役에 의해 수송되고, 생산지에서 조창까지는 의종조의 기사에 남경과 광주의 금년 조세의 수역을 면제하라든지, 왕이 지나온 주·부·군·현의 공물의 수역을 면제하라는 데서1198)≪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賑恤 恩免之制 의종 21년 9월·23년 4월. 보듯이 민의 요역에 의해 수송되었다.
이외에도 사신이 왕래할 때의 접대 및 그들이 가져오는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요역이 징발되었다.1199)중국과의 사신왕래는 주로 西海道民의 요역징발에 의존하였다. 또 지방에 파견되는 奉命使臣의 왕래에도 요역이 부과되었다. 이들을 맞이하는 데 곤란을 겪었다 하여 조세감면의 혜택을 내리는 예가 많았을 정도이다(≪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恩免之制 성종 16년 8월·목종 4년 11월·7년 11월·10년 10월·헌종 20년 9월·문종 11년 4월·36년 9월·원종 10년 12월 등을 비롯하여 이외에도 많이 보인다). 이 밖에 수령의 잦은 교체로 新舊官 迎送의 폐단이 많다는 데서 民戶의 요역이 징발되었음을 알 수 있다(≪高麗史≫권 75, 志 29, 選擧 3, 凡選守令). 또 연등과 팔관회에 민중이 동원되었다. 연등회와 팔관회는 태조 이후 특별히 중시되어 성대하게 베풀어졌으나 이로 인한 민중의 노역징발이 너무 심해서 성종 이후 22년간은 일이 중지되기도 했다. 연등회와 팔관회 뿐 아니라 종묘·사직·산악에 대한 제사와 星宿의 醮祭 등 많은 제사가 있었는데, 이러한 제사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민의 요역이 동원되었다.1200)≪高麗史節要≫권 2, 성종 원년 6월. 마지막으로 군현 농민의 요역은 왕실이나 국가 또는 지방 관부 소속 토지의 경작노동에 동원되었을 것이다.1201)李貞熙, 앞의 글(1984), 67∼68쪽.
이상에서 살펴 본 요역의 내용은 현물조달과 운반을 위한 공역과 수역, 토목공사의 역, 기타의 역으로 정리된다. 한편 요역의 징발은 그 주체나 범위에 따라 군현 차원의 것과 국가 차원의 것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요역의 내용은 국가 차원과 군현 차원의 징발이 상호 관련될 수 있고 또 군현 차원의 요역 동원은 거의 모든 부분에 걸쳐 다양하게 나타날 수도 있으므로 요역의 종류를 군현적인 것과 국가적인 것으로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공역과 수역은 군현 차원에서 징발하는 요역이었을 것이며, 토목공사의 역은 국가 차원의 요역 동원으로 수행되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