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3. 요역
  • 3) 부과의 대상

3) 부과의 대상

요역 징발의 주된 대상은 주지하듯이 일반농민층인데, 이들은 군현체제를 통하여 고려정부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고려의 군현체제는 일반 행정구역인 5도체제, 군사적 특수지역인 양계체제, 개경 주위의 경기체제로 구성된 3원적인 체제였다. 또한 5도지역은 크게 군현제 영역과 부곡제 영역으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요역의 징발대상이 일반농민층이라 하더라도 이들은 다양한 군현체제 하에 포섭되어 신분적 혹은 지역적인 특성에 따라 존재양상이 달리 나타나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농민층이라는 막연한 대상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살펴 보기 위해서 군현체제와 관련시켜 좀 더 검토해 보기로 한다.

요역의 징발대상으로 가장 광범한 계층은 역시 군현민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향·소·부곡·처·장·역·진 등에 예속된 민의 요역부담은 어떠했는지가 문제이다. 향·부곡민의 요역에 대한 것은 동경 관내의 주·군·향·부곡의 19곳이 오랜 가뭄이 들었으니 그 손실이 7분 이상일 때는 과역을 면제하도록 三司가 상주한 사례에서 알 수 있다.1202)≪高麗史節要≫권 6, 숙종 7년 3월. 이에 비해 소민의 요역부담에 대한 직접적인 사료는 거의 없다. 그런데 소민은 군현제 하의 촌락민으로서 국가기관이 필요로 하는 물품생산을 위한 역에 동원되었던 존재이다. 물품생산을 위한 역은 앞의 요역의 내용에서 살핀 바 있는 貢役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소민의 요역은 지리적 특성상 주로 공역의 부담을 졌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소민이 공역에만 종사하고 일체의 다른 역은 짊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점은 의문이다. 만일 소민이 공역에만 동원되었다면 조세 공물·요역을 모두 부담하는 일반 촌락민보다 苦役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민은 공역을 부담하지 않는 대부분의 기간에는 생산활동에 참여하면서 稅布를 부담하든지, 대규모의 노동력이 필요한 토목공사의 역에 동원되기도 했을 것이다. 고려 후기의 사례이지만, 충렬왕 4년(1278)에 嘉林縣人이 “현의 촌락 중에서 金所만 남아 있었는데, 지금 迷刺里가 또 金所를 빼앗아 소유하니 우리들이 홀로 賦役을 부담할 수 있느냐”라고1203)≪高麗史≫권 89, 列傳 2, 忠烈王 齊國大長公主. 말한 내용이 참고된다. 여기서의 부역은 가림현의 일반인이 부담한 것으로 보아「부과된 역」이 아닌 요역이나 세제 전반을 의미하고 있다. 所 제도가 변질되어 가는 고려 후기의 사례이긴 하지만 소민은 요역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다만 공역이 있을 때나 물품생산의 역이 시급할 경우 당연히 면제되었을 것이며, 또 역에 모든 민이 일시에 징발되는 것은 드물고 몇 개 지역을 번갈아 사역하는 형태가 보편적일 것이므로 우선적으로 배려의 대상이 되었으리라 본다.

다음 莊·處民은, 조세는 궁원과 사원에, 요역과 공물은 국가에 납부하는 존재였다.1204)≪高麗史≫권 28, 世家 28, 충렬왕 4년 7월. 그러나 장·처민은 국가에만 요역을 납부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고려 전기부터 궁원 소속의 莊戶가 요역이 무거워 살아가기 어려울 정도로1205)≪高麗史≫권 5, 世家 5, 현종 20년 9월. 궁원과 사원에 조의 납부 뿐만 아니라 일체의 요역과 공물까지 침탈당하였던 것이다.

津·驛人의 경우는 요역과 신역을 이중으로 부담할 수 없으므로, 향리와 마찬가지로 차역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요역은 직접 人丁에 대해서가 아니라 호에 부과되는 것이므로 驛丁戶의 소속 인정이 전부 면제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역민과 마찬가지로 身役의 담당자인 군인의 예를 보면, 州鎭에 입거한 군인에게는 본관의 잡역을 면제시키도록 규정하고 있다.1206)≪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인종 22년에 “西京東西州鎭入居軍人 蠲本貫雜役”이라는 기사가 있다. 잡역은 각 신분층의 定役 이외의 모든 잡다한 役을 총칭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李惠玉, 앞의 글, 1984, 23∼24쪽), 조선 전기처럼 잡다한 종목으로 구성된 요역의 특징을 반영하는 용어로도 생각된다. 즉 요역을 ‘雜泛徭役’이라고도 하듯이 잡역은 요역을 뜻하며(尹用出, 앞의 글, 15∼16쪽), 여기서는 본관이라는 말과 결부시켜 보던 지방 주체의 요역으로 볼 수 있겠다. 이 때의 잡역을 면제하는 규정이 군인 본인에 대한 것인지, 가족에 대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군인 본인에 대한 혜택이라는 점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고려 후기 別抄의 경우이긴 하지만, 防戍 중인 군인조차 요역을 부담하기 위해 먼 거리를 왕래하느라 피곤하여 도망하므로, 연해 군민에게 요역을 면제하는 대신 방수에 충당시키고 먼 지역의 민으로 하여금 방수에 가지 않는 대신 그들의 요역을 대신 부담토록 교서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1207)≪高麗史≫권 82, 志 36, 兵 2, 宿衛 공민왕 5년 6월. 따라서 군인의 사례에서 본다면 津이나 驛戶의 경우도 신역 담당자 본인만 면제되고, 나머지 소속 人丁에게는 당연히 요역이 부과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요역의 부과는 군사적 특수지역인 양계의 주민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예컨대 서북 주진의 남자가 요역에 피곤하다든지,1208)≪高麗史≫권 95, 列傳 8, 崔冲. 동북면의 文·湧州가 수해를 만났으니 부역을 감소시켜 달라고 한 것1209)≪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3, 賑恤 災免之制 문종 8년 11월.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5도와 양계지역이 모두 요역의 대상이 되고 있었는데, 이 외에 경기 8현과 도성 五部坊里의 요역은 특히 무거웠다. 경기지역은 앞의 요역의 내용에서 지적한 바대로 지리적인 특성상 요역징발이 번거로울 수밖에 없으며, 이는 오부 방리도 마찬가지여서 제방을 쌓다가 군졸의 힘이 다하자 당연히 방리의 丁夫를 징발할 정도로1210)≪高麗史≫권 19, 世家 19, 의종 24년 6월. 빈번하게 동원되고 있었다.

이상에서 군현제와 관련시켜 요역징발의 대상을 살펴 보았는데, 남은 문제는 일반군현민과 특정한 역의 부담자인 부곡민과의 사이에 어떤 차별성은 없었는가 하는 점이다. 부곡민이 천민이라는 종래의 견해는 별로 설득력이 없는 듯하다. 이에 대해서는 다른 부분에서 거론될 성질의 것이므로 언급할 처지가 못되지만, 천인설의 실증적인 근거로 간주되어 왔던 여러 규정이 신분적 규제의 차원에서 제정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역 부담자층인 부곡제 주민의 역을 확보하려는 고려정부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는 점은1211)朴宗基,≪高麗時代 部曲制硏究≫(서울大出版部, 1990). 인정된다. 그러므로 위에서 살폈듯이 부곡민은 군현민과 같이 요역을 부담하는 公役 부담자층이었다. 그리나 부곡민은 역의 부담정도에 있어서 군현민과 차이가 있었다. 예컨대 장·처민의 경우는 공적인 요역 외에 궁원, 사원에 대한 역의 부담 때문에 요역이 무거워 살아가기 어려울 정도였다. 驛丁戶의 가족은 요역 징발의 대상일 뿐 아니라 일반촌락과 마찬가지로 조세의 부담도 있었고, 특히 연료를 마련하는 공물인 柴炭貢을 내야 했다.1212)≪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賑恤 충렬왕 24년 1월. 이들은 직접적인 身役 담당자는 아니더라도 驛에 거주하는 자체만으로 일반 군현민과 달리 지역적인 사정상 관리의 숙식제공, 조세나 공물수송, 말의 관리 등에 따른 보조역으로서 노동력 수취를 더 부담했을 것이다.

또 향·부곡인은 일반 군현인과 같이 요역에 충당되는 외에, 군사지역의 성의 수축, 신개간지 경작, 국가직속의 경작에 동원되는 역을 지기도 했다. 각 地理志에 향·부곡·소가 뒤바뀌어 나타나는 데서도 보듯이, 때로는 향·부곡이 所의 주민이 부담한 역을 대신 지기도 했고, 혹은 그 반대로 역을 부담하는 경우도 있었다.1213)朴宗基, 앞의 책, 143∼150쪽. 이와 같이 특정한 역을 더 부담한 외에도, 부곡민과 비슷한 처지에 있었던 島民에게 때를 가리지 않고 빈번하게 공역을 징발하여 일반 주군보다 공역이 무겁다는 데서 보듯이1214)≪高麗史節要≫권 2, 성종 원년 6월. 부정기적인 공물부담을 위한 노동력 징발이 군현민보다 많았던 것이다. 부곡민은 군현인과 마찬가지로 농업생산에 종사하여 조세와 요역을 부담하는 良人 신분이면서도 특정한 역에 집단적으로 동원되고, 군현인보다 가혹한 역에 시달렸기 때문에 사회경제적으로는 열악한 존재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일반 농민층 외에 양반의 요역부담은 어떠했는지 살펴 보겠다. 고려의 양반은 좁은 의미로는 9품 이상의 有職品官과 그 가족을 말하지만, 넓은 의미로는 산관이나 지방의 세력가 등도 양반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1215)姜晋哲, 앞의 책, 297쪽. 유직품관은 唐의 규정과 마찬가지로 당연히 요역이 면제되었을 것이다. 다만 농번기라든지 또는 역사의 규모가 매우 커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할 때는 品從으로서 대역케 하는 예는 있었다. 품종이란 품의 고하에 따라 부담하는 役夫를 말하는데, 품종의 사례는 고려 전기부터 존재했지만 보편적인 현상은 아니었다.1216)≪高麗史≫권 83, 志 37, 兵 3, 工役軍 충선왕 원년 3월 및 권 6, 世家 6, 정종 4년 8월. 그러나 무신란 이후 토지겸병으로 인한 유민의 증가 및 권문세족의 대규모 농장경영으로 정부에서 파악할 수 있는 노동력이 부족하게 된 고려 후기에는, 사람을 고용하는 비용을 위해 양반의 호마다 쌀과 조를 거두거나1217)≪高麗史≫권 21, 世家 21, 희종 4년 7월. 품종을 내는 사례가 자주 나타난다. 심지어 대역시킬 능력이 없을 때는 직접 역사에 동원되기도 했는데,1218)“…而兩班無僕隷者 致賣祿牌 雇傭赴役 或有躬自執役者”(≪高麗史≫권 29, 世家 29, 충렬왕 6년 3월). 이같은 사례들은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한 임시적 방편일 뿐 원칙적인 것은 아니라고 본다. 또 유직품관이 아닌 산관의 경우도 檢校職을 받은 사람은 요역의 면제 혜택이 있었다. 검교직은 문관 5·6품, 무관 4·5품 이상의 사람에게 주었는데,1219)金光洙,<高麗時代의 同正職>(≪歷史敎育≫11·12, 1969). 내외 양반이 역을 피하기 위해 검교직을 함부로 받으니 금지하라는 교서에서1220)≪高麗史≫권 35, 世家 35, 충숙왕 13년 10월. 검교직은 면역의 대상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의 내외 양반은 품관의 가족이나 지방의 세력가를 뜻하는데, 이 기사가 충숙왕 12년(1325)의 것임을 고려할 때 고려 후기에는 실직을 가진 양반마저 직접 역사에 동원되었으므로 검교직은 전기부터 면역되었다고 보인다.

그러나 양반의 가족은, 서울에 거주하는 대소 인원의 자제가 요역을 피하고자 본관 친척의 호적에 올린다는 예에서1221)≪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戶口 인종 13년 2월. 보듯이 요역의 대상이었다. 또 고려 전기 뿐만 아니라 앞의 충숙왕 12년에 내외 양반이 역을 피한다는 사례도 있듯이 양반의 가족은 고려 후기까지 계속 요역이 부과되었음을 알 수 있겠다. 다만 고려에서 5품 이상의 관리에게는 음직과 공음전의 혜택이 있었다든지, 唐의 경우도 6품 이하에 대해서는 본인만 면제되고 5품 이상의 품관에 대해서는 본인은 물론 근친자까지 모두 면제된 것을 감안하면 품의 고하에 관계없이 모든 양반가족이 요역의 대상으로 파악된 것 같지는 않다. 즉 고려와 唐制에서 5품을 기준으로 같은 양반이라도 제도적으로 차등을 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에서 요역의 대상이 된 것도 6품 이하의 양반가족에게만 한정시켰다고 본다. 이처럼 양반가족에게도 요역이 부과된 것은 양반이 많은 노비를 소유하고 있으므로 별로 문제시될 것은 없었다. 왜냐하면 양반의 노비에게 요역이 부과되자, 양반의 노비는 주인의 역이 따로 있기 때문에 옛부터 公役이 없는 것이 원칙이라 하여 금지시킬 정도로1222)≪高麗史≫권 85, 志 39, 刑法 2, 奴婢 충렬왕 24년 정월. 양반의 편익을 위해 조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특혜는 조선시대에 이르면 사정이 달라진다. 비록 솔거노비는 제외되지만, 諸君·勢家의 외거노비에게 요역을 부과하지 않는 수령은 죄를 줄 정도로 사노비도 요역의 대상으로 파악되고 있다.1223)≪世宗實錄≫권 57, 세종 14년 7월 임신. 고려시기의 경우 요역이 부과되지 않던 외거노비가 조선에 이르러 요역의 대상으로 파악된 것은 노비의 사회경제적 지위의 변화라고 볼 수 있는 측면도 있지만,1224)洪承基,≪高麗貴族社會와 奴婢≫(一潮閣, 1983). 상대적으로 양반에 대한 특혜의 감소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음서의 예에서도 주지하듯이 그 범위가 고려의 5품에서 조선의 2품으로 축소되었으며, 요역의 대상도 양반 뿐 아니라 왕족과 왕후의 친척이라도 소원한 호는 요역을 면제하는 復戶의 규정에서 제외되었던 것이다.1225)≪世宗實錄≫권 100, 세종 25년 5월 무진. 따라서 조선시대에 요역 대상이 확대된 것은 그 만큼 국가권력이 강화된 때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면역 규정에 대해 간단히 살펴 보면,1226)李惠玉, 앞의 글(1984), 31∼32쪽. 원칙적으로 면역자를 제 정한 경우와, 군현을 대상으로 임시적 면역조처를 취하는 두 가지 경우가 있었다. 면역자는 丁女, 單丁, 僧侶, 楊水尺, 重病患者·不具者, 孝子, 順孫, 義夫, 節婦, 除役所의 蔭戶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주현 단위의 면역조처는 주로 홍수나 가뭄으로 인한 피해를 입었을 때 가장 많이 나타나며, 해당 주현에 1년 또는 2년의 역을 면제하거나 감면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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