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3. 요역
  • 4) 수취체제

4) 수취체제

다음은 요역대상자를 사역시킬 때 어떤 순서로 했는지, 出丁의 기준은 어떠했는지 戶等制와 관련시켜 검토해 보고, 그 외 사역기간이나 장비문제 등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우선 역민의 사역은 중앙→주현→민호의 순으로 이루어졌다. 즉 고려 전기에는 도가 아직 군현의 상급기구로서 중앙과 군현의 중간기구의 기능을 못하고,1227)邊太燮,<高麗前期의 外官制>(≪高麗政治制度史硏究≫, 一潮閣, 1971), 130∼133쪽. 중앙에서 직접 주현 수령에게 역이 분정되었다. 따라서 요역의 수취과정은 중앙→군현, 군현→민호라는 두 단계로 파악할 수 있다. 고려의 군현은 주지하듯이 태조 23년(940), 성종 14년(995)의 개편을 거쳐 군현제의 기반을 확립한 현종 9년(1018)에는 520개로 편성되었다. 이들 군현제 영역은 주현과 속현으로 구성되었고, 주현과 속현은 각기 치소, 직할촌, 향·소·부곡·장·처·진·역 등의 부곡제 영역을 포함하고 있었다.1228)朴宗基, 앞의 책, 93∼101쪽. 각 군현은 邑格의 고하나 주현·속현에 관계없이 독자적인 통치구역을 가지고, 독립적인 행정단위를 이루었다.1229)李羲權,<高麗의 郡縣制度와 地方統治制度>(≪高麗史의 諸問題≫, 三英社, 1986), 250∼251쪽. 따라서 속현도 주현과 같이 부세나 양전의 수취단위로 운영되었으며, 이것은 부곡제 영역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요역을 감면할 때도 속현이나 향·부곡 등은 주현과 같이 독립된 수취단위로 운영되었던 것이다.1230)朴鍾進, 앞의 글(1987), 8∼9쪽. 그러나 속현이 독자적 수취단위이긴 해도 행정적으로는 역시 주현을 통해 중앙에 연결되는 만큼 요역의 내용상 주현과 일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컨대 관개용수를 공급할 때 상류에 있는 속현의 농지는 수몰되고 관개의 이익은 하류에 있는 주현에만 돌아가 속현민의 불만이 상승했던 사례에서 보듯이1231)巍恩淑,<12세기 농업기술의 발전>(≪釜大史學≫12, 1988), 93∼94쪽. 요역징발에서도 불공평했을 것이다. 또 속현이 거의 소멸된 조선 전기만 하더라도 속현인은 주현의 요역에 동원되기도 하고, 주현의 관리가 속현민을 마음대로 사역시켜 괴롭히는 예가 많으므로 直村化하자는 상소를 할 정도였다.1232)≪世宗實錄≫권 100, 세종 25년 5월 경오. 이와 같이 군현 내의 요역부담의 불균형은 속현민의 저항을 일으켜 監務를 파견하고1233)≪高麗史節要≫권 7, 예종 원년 4월. 主邑으로 승격시키는 등의 조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현 단위로 분정된 요역은 민호에 부과되었다. 고려에서 요역은 16세 이상 60세 이하의「丁」을 사역하였지만, 직접 정에 부과하지 않고≪高麗史≫刑法志 戶婚條에 “編戶는 人丁의 많고 적음으로써 9등으로 나누어 부역을 정하였다”라고 한 바와 같이「戶」를 대상으로 부과하였다. 또 여기서의 호는 자연호가 아니라 인정의 다과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눈 편호였다. 그런데 최근 인정기준의 9등호제는 고려 초의 행정체계가 미비된 시점에서 시행된 임시적·과도적 성격을 지닌 것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으나1234)金基興,≪三國 및 統一新羅期 稅制의 硏究≫(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1), 124∼126쪽. 이에 대해서는<공부와 요역>(≪한국사≫19권, 1994 간행예정)을 참조하기 바란다. 수긍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따라서 고려의 9등호제는 신라 통일기의 9등호제와 관련시켜 질적 변화라는 측면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다. 즉 신라 통일기의 9등호제는 당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토지와 인정을 기준으로 편제되었으며, 이와 같이 편제된 호등에 일정한 기준수를 설정하여 집계한 計烟을 바탕으로 조·용·조가 부과되었다.1235)李仁哲,<新羅統一期의 村落支配와 計烟>(≪韓國史硏究≫54, 1986), 10∼14쪽. 그런데 나말려초를 경과하는 동안 상경 농법의 확대로 平田의 상경화가 이루어지고 농업생산량이 증대되면서1236)魏恩淑,<나말여초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그 주도세력>(≪釜大史學≫9, 1985), 125∼126쪽. 상대적으로 토지의 중요성도 더욱 높아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조세의 부과기준은 신라 통일기와 달리 토지만으로 바뀌고 토지의 전품도 정해져서, 조의 세율은 토지의 전품에 따라 차등적으로 정해지게 되었다.1237)田品에 대해서는 金容燮,<高麗前期의 田品制>(≪韓㳓劤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1)가 참고된다. 이에 비해 인정의 노동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요역은 人丁의 다과로만 기준을 삼는 호등제를 채택하였다. 결국 토지와 丁이 결합된 호등제로 세제를 수취하던 형태에서, 조세와 요역의 부과기준이 분화되는 형태로 바뀌게 된 것이다.

한편 각 호의 出丁 기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지만, 조선 초기의 경우에는 10정 이상의 大戶를 기준으로 1명 내지 2명을 내는 등 역사의 규모에 따라 달랐던 것 같다.1238)≪太祖實錄≫권 2, 태조 원년 9월 임인 및 권 6, 태조 3년 7월 무오. 아마 고려의 경우도 통일신라의 9등호를 참작하여 6丁=仲上을 기준으로 정했지만1239)計烟 산정의 기준은 仲上烟으로, 計烟 1에 해당되는 것은 丁男數 6人과 토지 18결이었다는 점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李仁哲, 앞의 글, 18쪽). 때에 따라서 출정수는 달랐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수령이 주현의 요역을 관장하였지만, 각 호에 인정을 징발하여 역을 수행하는 것은 향리였다. 그렇기 때문에 역의 출정 기준이나 순서 등이 구체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는, 향리가 뇌물을 받아 부강한 호는 면제해 주고 빈약한 호에만 부과하여1240)≪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戶口 우왕 14년 8월. 하층민의 유망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사역기간에 대해서는, 조선시대 세종조의 기록에 의하면 古制에 따라 春節에는 민을 사역시키지 말고 10월에 역사를 시작하며 20일을 기한으로 풍흉에 따라 일을 가감토록 하고 있다.1241)≪世宗實錄≫권 50, 세종 12년 11월. 여기서의「古制」가 상징적 의미일 수도 있지만, 인력동원에 관한≪三國史記≫의 기록이 2월에 집중되었다가 연대가 내려올수록 가을에 많아진다든지,1242)李基白,<永川 菁堤碑의 丙辰築堤記>(≪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7), 307쪽. 통일신라의 사역기간이 1개월 정도라는 견해를1243)金基興, 앞의 책, 109∼110쪽. 감안하면 혹시 古制는 고려를 뜻하는 게 아닐까 싶다. 실제로 사역기간이 지켜졌는지의 여부는 별문제로 하고 법제적인 면에서는, 삼국시대의 2개월에서 신라통일기의 1개월→고려시기의 20일→조선시대≪經國大典≫의 6일로 점차 축소되는 추세로 이해된다. 그러나 중앙정부 주체의「役民式」에서는 이러한 규정이 있었다 하더라도, 지방 주체의 잡다한 요역 종목에 한정된 군현민을 사역시키기 위해서는 日限의 규정에 따를 수 없었을 것이다. 또 고려 후기의 사례이기는 하지만 採金하는데 역부를 70일간 사역시켰다든지,1244)≪高麗史≫권 19, 世家 19, 충렬왕 3년 2월의 기사에는 金을 채취하기 위해 國學直講을 보내어 70일을 사역시켰다고 했는데, 이 때 役夫가 교대로 동원된 경우도 있었겠지만, 계속 사역된 역부의 수도 상당히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姜晋哲, 앞의 책, 295쪽). 役徒가 3년이나 역사에 동원되어 하루도 쉴 수가 없을 정도로1245)≪高麗史≫권 29, 충렬왕 6년 4월. 사역 기간이 상당히 길었던 때도 있었다. 중앙정부 주관의 역사에서 사역기간이 3년이나 되는 경우는 특수한 예이겠지만, 70일 정도 사역시키는 일은 간혹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중앙적인 요역이나 특히 지방적인 요역에서 수령은 필요할 때마다 군현 내의 민호에 요역을 부과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개별 민호에게 돌아오는 부담은 부정기적이며 不定量的이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赴役할 때의 경비에 대해 살펴 보면, 작업시의 도구는 당연히 백성이 지참하였으며, 공물이나 목석을 운반할 때는 우마를 부담하여 민의 원망이 심했다.1246)≪高麗史≫권 119, 列傳 32, 鄭道傳. 식량부담에 대해서는 징발된 지역의 원근에 따라 달라서 근지에서 징발되는 경우는 자급이었고 먼 곳에서 민을 징발할 때는 국가에서 지급했던 것 같다.1247)≪高麗史≫권 18, 世家 18, 의종 21년 3월조의 기사에 의하면 亭子를 만들 때 한 가난한 役卒이 양식을 自給하지 못하자 그 妻가 머리채를 잘라 팔아서 음식을 마련해 왔다고 한다. 교통이 불편했던 당신에 妻가 음식을 가져올 정도라면 역졸의 집이 정자에서 가까웠다는 것이다.≪高麗史≫권 19, 世家 19, 원종 15년 2월조에서는 “…又竊念 自正月十五日始役 其工匠人夫三萬五十名 計人一日三時糧 比及三朔 合支三萬四千三百一十二碩五斗”라 하여 세끼 식량을 지급하고 있다. 아마도 지방주체의 役事는 近地에서 징발하므로 식량은 자급했겠지만, 장기간이 소요되는 대규모의 역에는 국가에서 지급하는 것이 원칙이었을 것 같다.

<李貞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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