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5. 조운과 조창
  • 1) 포 중심의 조운

1) 포 중심의 조운

고려시대 국가재정의 토대는 농민들이 국가에 대하여 부담한 세역이었다. 국가에서는 이들 세역을 바탕으로 나라의 재정을 꾸려 갔다. 그 중에서도 토지에서의 생산물에 부과되던 租稅가 가장 중요한 재정 수입원이었다.

대체로 쌀·보리·콩·조 등의 곡물로 거둔 조세는, 연해안 또는 수로 연변의 적당한 장소에 보관되었다가 선박에 의해 개경으로 운송되었다. 이를 漕運이라고 하는데, 그 일을 담당한 기관이 漕倉이었다.

그런데 고려 초기에는 조운이 제도적으로 정비되어 있지 않았다. 제도로서의 조운제는 국가의 지배력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사회체제의 기반이 굳건해진 후에야 그 기능을 바로 발휘한다. 일반적으로 국가의 세곡을 운송의 대상으로 하는 조운제는, 국가 운영에서의 역할 때문에 강력한 통제하에 집약적인 형태로 조직 운영된다. 그러나 고려 초기에는 국가의 지배력이 강하지 못하였다. 고려 건국 이후 일단 국내가 통일되고 각지에 널리 산재하고 있던 호족들이 비록 고려에 귀순하기는 하였으나, 중앙의 지배력이 그들에게 미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각 지의 호족들은 제각기 독자적인 무력과 경제적 기반을 보유하고서 마치 분권적 소왕국과 같은 세력을 그대로 행사하여 그들 지방을 자치적으로 다스려 갔다.

그렇다고 하여도 호족들은 명목상 고려에 부속되어 있었고 실제로도 중앙 정부와 타협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조세와 공납 등 稅貢의 징수에 협조하였다. 말하자면 자치의 반대 급부로서 중앙정부의 세공을 징수하여 상납하였던 것이다. 이 때 중앙정부에서는 세공의 징수를 감독하기 위하여 今有·租藏이라는 임시 세납 징수관을 파견하였는데,1283)≪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外職. 이는 지방행정체계가 정비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불가피하게 취해진 조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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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1>성종조 이전의 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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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족들은 세공을 징수하여 인근에 있는 해안이나 강변에 있는 浦로 운반하였다(<지도 1>). 거기서 세공은 轉運使의 감독 하에 선박에 의해 수도로 조운되었다. 浦는 세곡을 운반함에 있어서 하나의 기점이었다. 그런데 고려시대에 있어서 포는 關·驛·江과 아울러 군현의 하부행정기구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즉 촌락을 기본 내용으로 하는 포는 본래 호족의 지배하에 州·府·郡·縣에 예속되어 있었다. 따라서 포를 통한 조운은 호족이 협조해야만 가능했던 것이다.1284)北村秀人,<高麗初期の漕運についての考察>(≪古代東アジア論集≫上, 1978), 3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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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潮浦
螺 浦
波平浦
潮陽浦
風調浦
海安浦
安波浦
利京浦
麗水浦
銀蟾浦
潮東浦
南海浦
通津浦
德 浦
崐岡浦
末 潮 浦
號 骨 浦
夫 沙 浦
沙 飛 浦
馬西良浦
麻 老 浦
冬 鳥 浦
召 丁 浦
金 迀 浦
蟾 口 前
薪 浦
木 浦
置 乙 浦
德 津 浦
白 岩 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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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 麗 浦
海 葦 浦
利 通 浦
勵 涉 浦
芙 蓉 浦
速 通 浦
朝 宗 浦
濟 安 浦
古 塚 浦
西河郡浦
利 涉 浦
風 海 浦
懷 海 浦
便 涉 浦
媚 風 浦
黃 利 浦
葦 浦
屈 乃 浦
主 乙 浦
阿 無 浦
所 津 浦
鎭 浦
無 浦
大 募 浦
豊 浦
葛 城 浦
松 串 浦
居用彌浦
打 伊 浦
夫 支 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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息浪浦
白川浦
潮海浦
靑水浦
廣通浦
楊柳浦
德陽浦
靈石浦
居安浦
慈石浦
澄波浦
安石浦
柳條浦
梨花浦
淥花浦
加 西 浦
金多川浦
省 草 浦
加乙斤實浦
津 浦
楊 等 浦
所 支 浦
召 斤 浦
居 乙 浦
甘 岩 浦
登 承 浦
犯貴伊浦
柳 頂 浦
梨 浦
花因守寺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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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嵓浦
陽原浦
花梯浦
恩波浦
虞山浦
神魚浦
尙原浦
和平浦
鹵水浦
從山浦
德原浦
深原浦
同德浦
深逐浦
丹川浦
仰 嵓 浦
荒 津 浦
花連梯浦
仇 知 津
山 尺 浦
小神寺浦
上津村浦
無 限 浦
未 音 浦
居知山浦
置音淵浦
果 州 浦
同 志 浦
下置音淵浦
亦 於 浦

<표 1>浦의 新舊名稱

그러나 성종 2년(983) 12牧이 설치되고 牧使라 불리우는 지방관이 파견되면서 고려의 중앙정부는 이들 12목을 거점으로 하여 지방에서의 지배력을 강화시켜 갔다. 중앙정부는 지방관의 파견과 아울러 종래 지방에서 실질적으로 힘을 행사하고 있던 호족들을 지배기구 안에 흡수하여 지방을 통치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호족을 鄕吏로 개편하고 지방통치의 실무 담당자로 편성하였다. 포의 명칭 개정도 바로 그러한 일련의 노력과 방향을 같이하는 것이었으니, 성종 11년 중앙정부는 종래의 포에 새로이 정한 명칭을 부여함으로써 호족의 포에서 국가의 포로서의 성격을 바꾸고 각 浦에 대한 중앙정부의 실질적 지배를 꾀하였다1285)≪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11년 11월 계사.(<표 1>).

이것은 輸京價의 제정에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났다. 수경가는 거둔 세곡을 각 포에서 개경의 京倉까지 수송하는데 동원된 선박의 船賃인데 세곡의 수송을 의뢰하는 부근의 군현에서 각 포의 선박, 즉 조선에 지불하였다. 엄밀히 말하면, 군현의 농민이 수경가를 부담하였다. 각 포의 조선은 수경가, 즉 선임을 받고 세곡을 선운하여 국가에 상납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고려 초 각 포의 조선은 그 지방 호족의 손에 장악되어 있었기 때문에, 세력이 강대하였던 호족들은 공부를 빙자하여 자의로 輸京價를 정하였고, 이는 농민 뿐만 아니라 국가로서도 이롭지 않은 처사였다. 따라서 호족에 대한 고려왕조의 지배력이 강화되면서, 즉 중앙집권적 군현제가 정비되면서 중앙정부는 호족의 수경가 징수에 통제를 가하였다. 예컨대 성종 11년 중앙정부는 세곡 운송의 비용을 운항거리에 따라 합리적으로 정함으로써 국가의 지배력을 강력히 과시하였고, 동시에 민생을 바로 잡고자 하였던 것이다.1286)≪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漕運. 나아가 조운의 기능을 원활하게 하여 국가 재정을 충실하게 하고자 하였다. 당시에 제정된 수경가는 수송거리에 따라 10단계로 구분, 최고 20%에서 최하 4.8%에 이르렀다.1287)崔完基,<高麗朝의 稅穀運送>(≪韓國史硏究≫34, 1981), 37쪽.(<표 2>).

단계 諸 浦 輸送量 船 賃 비 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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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潮浦 螺浦
波平浦 潮陽浦 風調浦 海安浦 安波浦 利京浦
麗水浦 銀蟾浦
潮東浦 南海浦 通津浦 德浦 崐岡浦 黃麗浦 海葦浦
利通浦 勵涉浦 芙蓉浦 速通浦 朝宗浦 濟安浦
古塚浦 西河郡浦
利涉浦 風海浦 懷海浦 便涉浦
媚風浦 息浪浦 白川浦
潮海浦 淸水浦 廣通浦 楊柳浦 德陽浦 靈石浦
居安浦 慈石浦
澄波浦 安石浦 柳條浦 梨花浦 淥花浦 文嵓浦
陽原浦 花梯浦 恩波浦 虞山浦 神魚浦
尙原浦 和平浦 鹵水浦 從山浦
德原浦 深原浦 同德浦 深逐浦 丹川浦
5석
6〃

8〃
9〃

13〃
15〃
21〃

10〃

18〃
20〃
1석












20.0%
16.6〃

12.5〃
11.1〃

7.7〃
6.6〃
4.8〃

10.0〃

5.5〃
5.0〃

<표 2>浦의 新舊名稱

조운이 호족의 손에 장악된 상태에서의 漕運路는 분산된 모습이었다.≪高麗史≫食貨志 漕運條에 열거된 60개 포의 위치를 분석해 보면, 거의 모두가 내륙의 한강 연안과 충청·전라·경상의 3도 연해안에 분포되어 있다(<지도 2>). 이로써 보면 당시의 세곡 운송은 한강의 수로를 이용하거나 또는 남해안 및 서해안의 연안 해로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었다. 즉 당시의 조운 항로는 한반도의 서남단을 중심으로 반월형의 모습을 보여 주는데, 이후에도 전형적인 조운항로로서 기능하였다. 이는 수도의 위치와 한반도의 지정학적 여건에서 불가피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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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2>성종조 이후의 포구
<지도 2>성종조 이후의 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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