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5. 조운과 조창
  • 2) 조창의 설치와 운영
  • (1) 조창의 설치

(1) 조창의 설치

浦 중심으로 운영되던 조운은 그 후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지배력이 한층 강화되면서 국가의 제도로 정비되어 갔다. 조운의 국가적 제도화는 포에 대신하여 漕倉이 조운의 기점이 된 데서 구체화된다. 국가가 조창을 설치하고 운영하면서 이제 조운은 중앙정부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었다.

조창제는 왕조의 지배력, 보다 구체적으로 군현제의 정비와 더불어 성립하였다. 성종 때부터 본격화한 군현제는 현종 때에 이르러 4도호부·8목·56군·28진·20현으로 정비되고 있는데,1288)≪高麗史節要≫권 3, 현종 9년 2월. 이를 전후하여 지금까지 지방에서 큰 세력을 갖고 거의 자치적으로 군림하던 지방호족들은 향리로 개편되어 중앙 정부의 행정 보조자로서의 지위로 전락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호족이 관장하던 조운도 국가의 통제 하에 조창제로 성립된 것이다.

고려 때 조운을 맡아 본 조창은 모두 13개였다.≪高麗史≫식화지에 의하면「國初」에 12개를 설치하고,1289)≪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漕運.
12조창의 설치 시기인「國初」의 구체적인 시기에 대하여는 여러 견해가 있다. 丸龜金作은 成宗朝로, 孫弘烈은 太祖朝로, 그리고 北村秀人은 靖宗朝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하여 姜晋哲·崔完基는 지배체제의 강화와 연결시켜 설명한 北村秀人의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그 후 문종 때 西海道에 1개를 추가하였다고 한다(<표 3>). 13조창은 포와 마찬가지로 해로나 수로를 이용할 수 있도록 서해 및 남해의 연안과 한강 연변에 설치되었다.

13조창의 분포를 보면, 경상도에 2개, 전라도에 6개, 충청도에 3개, 강원도에 1개, 서해도에 1개이다(<지도 3>). 연해안과 강변으로 살펴 보면, 연해안에 11개, 강변에 2개 설치되었다. 해창은 남해안에서 서해안에 걸쳐 분포되었고, 강창은 오로지 한강변에만 존재하였다. 요컨대 조창의 분포는 선운이 보다 쉽고 가능한 지역에 한하여 나타나며, 특히 해창의 분포는 포의 분포에서처럼 한반도의 서해와 남해를 잇는 반월형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각 조창에는 判官이라는 감독관리가 주재하였다.1290)≪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漕運. 이들은 외관의 대우를 받아 미곡 20석의 녹봉을 지급받았다. 그런데 조창은 단순한 창고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군현과 같은 내용의 존재였다. 즉 관할 영역과 주민, 치소와 행정기구를 가진 일종의 행정구획이었다.1291)北村秀人,<高麗時代の漕倉制について>(≪朝鮮歷史論集≫上, 1979), 410쪽. 이는 조창의 전신이었던 포가 군현제의 일환을 이룬 일종의 행정구획이었다는 데서 비롯한다. 조창은 포가 있던 곳에 설치되었다. 군현의 하부 행정구획이었던 포에서 개편된 조창 역시 군현에 예속된 하부 행정구획이었다. 따라서 그러한 조창은 물론 촌락을 기본구조로 하고 있다.

판관은 그러한 조창의 감독관이었다. 그런데, 고려 때에는 군현제가 실시되었다고 하여도 지방관이 파견된 것은 군·현·진에 한하였고, 그러한 경우에도 모든 군현에 획일적으로 파견된 것이 아니라 지방관이 파견된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하급 행정구획의 일환을 이루고 있던 조창에는 물론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다. 조창의 판관은 지방 행정관은 아니었다. 판관은 각 조창에 상주하면서 세곡을 수납하고, 그것을 조운토록 하는 직임을 띠고 있었다.

그럼에도 조창의 감독관이 중앙에서 파견되었다는 것은 조운에 대한 중앙정부의 지배력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즉 조창은 행정면에서는 군현에 예속되었지만, 조운면에서는 중앙정부가 직접 관할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고려 시대에는 국가 권력의 최말단에서 행정실무를 담당하던 향리가 있었다. 다른 행정구획에서와 마찬가지로 조창에도 色典이라 불리우는 향리가 존재하였다.1292)≪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漕運. 이들은 본래 호족 출신으로서 포를 관장하였는데, 중앙정부의 지배력이 강화되면서 조창의 향리로 개편된 존재들이라고 여겨진다. 색전은 漕船을 몰고 가는 梢工·水手의 선원들과 더불어 사고가 일어나면 책임을 져야하는 보상의 주체였으므로, 조운 수행에 있어서 실제적 책임자였다. 또 운송한 세곡을 京倉에 입고시키는 것도 색전의 직무였다. 즉 조창 소속의 색전은 판관의 지휘 하에 세곡을 조창에 수납하고, 이어서 조선에 승선하여 조운을 감독하며, 그리고 개경에 도착하여 세곡을 경창에 납입시키는 임무까지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행정구획으로서의 조창에는 판관·향리 외에도 초공·수수 등 조운에 관계된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호족이 세곡을 운송할 때는 賃運의 성격을 띠고 있어서 농민으로서는 수경가를 부담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조운을 국가가 직영하게 되면서 세곡의 운송은 役制를 바탕으로 하여 수행되었다. 조운을 위해 특별히 설정했으리라고 보이는 전담 선인의 신역에 의했던 것이다. 초공·수수는 그러한 조창의 주민으로서, 조창에 속한 조선을 부리며 조운에 종사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시대의 조운제는 기본적으로 조창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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