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5. 조운과 조창
  • 2) 조창의 설치와 운영
  • (2) 조창의 운영

(2) 조창의 운영

조창은 하부 행정구획의 하나로서 조운할 때까지 세곡을 수집·보관하던 지역이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업무를 담당하던 하나의 기관 역할도 하였다. 의창·상평창과 같은 국가기관의 하나였던 것이다. 기관으로서의 조창은 세곡의 수납·보관·운송의 세 가지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1293)丸龜金作,<高麗の十二漕倉に就にて>(≪靑丘學叢≫22, 1935), 62쪽.

조운하는 곡물은 농민에게서 거두어들인 세곡이다. 세곡은 당시 국가가 토지를 소유한 농민에게 부과한 각종 부담의 하나였다. 곡물을 주요 수취대상으로 하는데, 때로는 布貨로써 대납하는 경우도 있었다.

세곡 수납의 기능을 지니고 있는 조창은, 따라서 그 수세 관할구역이 정해져 있었다.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전국의 13조창은 각지에 산재하여 각기 부근 고을의 세곡을 징수하였다. 조선시대의 경우를 보면, 세곡의 납입은 고을 단위로 이루어졌다. 예컨대 경상도에서는 通陽倉과 石頭倉에서 각기 인근 고을의 세곡을 징수하였다. 이 때 조창까지의 세곡 운반은 생산자이면서 납세자인 농민이 직접 담당하였다. 그 운반은 일종의 요역이었다.

수납한 세곡은 조운 때까지 일정 기간 조창에 보관되었다. 전천후에 대처할 수 있을 만한 선박이 구비되어 있지 않았던 당시에 있어서, 조운은 기후의 변화로 말미암은 시간적 제약을 받아야 했다. 특히 풍랑이 험하고 순조로움은 국가 재정의 생명선인 漕運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주의깊게 고려되어야 했다. 우리 나라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1년 중 6·7·8월은 풍파가 심하여 선박의 운항이 어려웠고, 파도가 일지 않고 행선하기에 가장 적합한 시기는 2월에서 5일 사이였다. 그리하여 조운을 제도화한 위정자들은 이 점에 유의하여 조선의 운항시기를 정해 놓았다. 즉 당해년의 세곡은 일단 조창에 보관하였다가 이듬해 2월부터 수송을 시작하여 가까운 조창에서는 4월까지 3개월 안에, 먼 곳의 조창에서는 5월까지 4개월 안에 조운을 마쳐야 했다.1294)≪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漕運.

이로써 볼 때 각 조창은 농민에게서 거두어들인 세곡을 이듬해 2월까지 보관하고 있었는데, 그 동안의 보관과 간수는 역시 조창에 거주하던 사람들의 공동 책임이었다. 판관의 책임 하에 고지기가 상설로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세곡을 보관하던 조창의 창고로서의 시설을 보면, 고려 때에는 倉舍를 구비하지 못하였고, 다만 흙이나 돌로 축대를 쌓은 위에 세곡을 노적한 채 비와 바람을 가리는 정도의 설비밖에는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는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어, 德興倉의 후신인 충주 可興倉의 경우 중종 때에 이르러 부근의 폐허된 절의 재목으로 창고를 지으면서부터 겨우 노적을 면하고 있다.1295)≪新增東國輿地勝覽≫권 14, 忠州 倉庫. 조창의 이러한 모습은 비단 가흥창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조창 시설이 그러하였을 것이다. 사실 개경에 있던 京倉마저도 제대로 된 창고시설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高麗圖經≫에 의하면, 당시 경창의 모습은 흙으로 쌓은 축대 위에 미곡 가마니를 쌓고 그 위를 덮개로 씌워 바람과 비를 가리고 있는 정도라고 하였다.1296)≪宣和奉使高麗圖經≫권 16, 官府 倉廩. 이로써 볼 때 각지의 조창시설은 매우 미비하였다고 보인다.

각 조창에 수납 보관되었던 세곡은 일정한 시기에 경창으로 운반되어야 했다. 세곡은 그 자체가 국가의 재원이었기 때문에, 운송에 특히 유의하였다. 세곡의 운송을 위해 각 조창에는 소정의 조선이 비치되어 있었다. 그 수는 각 조창에서 수납하는 세곡의 양과 수송거리에 따라 차이가 있었고, 선박의 규모도 달랐다. 즉 해로를 이용하던 석두창 등 10개 조창은 1천석을 실을 수 있는 哨馬船을 각기 6척씩 보유하고 있었고, 한강의 수로를 이용하던 덕흥창과 興元倉은 2백 석을 실을 수 있는 平底船을 각각 20척·21척씩 보유하고 있었다1297)≪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漕運.(<표 3>).

漕 倉 名 위 치 보유 조선수
興 元 倉
德 興 倉
江原道 原城郡 管內
忠淸北道 中原郡 管內
平底船 21척
〃  20〃
河 陽 倉
永 豊 倉
安 興 倉
鎭 城 倉
芙 蓉 倉
海 陵 倉
長 興 倉
海 龍 倉
通 陽 倉
石 頭 倉
安 瀾 倉
忠淸南道 牙山郡 管內
     〃
全羅北道 扶安郡 管內
  〃  沃溝郡 管內
全羅南道 靈光郡 管內
  〃  務安郡 管內
  〃  靈岩郡 管內
  〃  麗川郡 管內
慶尙南道 泗川郡 管內
  〃  馬山市 管內
黃海道 長淵郡 管內
哨馬船 6척









<표 3>高麗朝 漕倉의 위치 및 보유 조선수

이로써 볼 때, 1회 조운된 세곡의 수량은 초마선 60척을 비치한 해창에서는 1천석×60척=6만 석, 평저선 41척을 비치한 강창에서는 200석×41척=8천 2백 석으로서, 도합 6만 8천 2백 석에 安瀾倉 운송분의 세곡이 포함된다. 그런데 녹봉을 지급하던 左倉의 경우 그 세입액은 약 14만석에 이르렀고, 또 왕실 경비를 맡은 右倉, 그 밖에 경창에 납입되는 세곡도 그와 비슷하였다 하면, 비치된 조선으로 1년에 4회 조운되어야 국가 재정이 유지되었을 것이다.

세곡을 조창으로 조운함에는 초공·수수·잡인들이 동원되었다. 이들은 색전, 즉 향리의 지휘 하에 해로 또는 수로를 잘 살펴 가면서 조선을 난파시키지 않고 세곡을 목적지인 경창까지 조운하였다. 조운의 노역을 담당한 이들은 일반 군현의 농민이 아니라 조창에 거주하는 漕倉民으로서, 조운 자체는 그들의 신역이었다. 요역의 일환으로서 노동력이 징발된 것이다.

조운의 역은 해상활동을 전제로 하는 것인 만큼 항상 생명의 위협을 수반하는 고된 역이었다. 조운의 역은, 역 그 자체가 가혹하였을 뿐 아니라 운송 도중에 세곡에 손실이 생기면 보상을 해야하는 의무까지 부과되어 있었다. 그들은 조선 초기의 예로 미루어 세습적으로 조운의 역에 강제로 예속되어 있는 존재로, 사회적으로도 賤類에 가까운 신분이었다.

이와 같이 조운 활동이 정부의 통제 하에 역제를 바탕으로 선인들이 동원되고, 국가가 직접 조선을 건조하여 직영하였기 때문에 조창의 건설비, 조선인들의 생활비, 조선의 건조비, 그 밖의 잡비 등이 모두 국고에서 지출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따라서 조운제 하에서는 운송비가 별도로 징수되지 않았다. 전세에는 운송비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조창제가 성립되기 이전, 호족이 조운을 관할하고 있었을 때에는 운송비로서 수경가가 있었다. 즉 조선을 장악하고 있던 포의 호족들은 수송거리에 따라서 운송비를 받았다. 그 비용은 호족의 세력이 컸던 초기에는 호족의 임의로 정해졌다. 그리하여 지방 통제가 강화되던 성종 때에는 이를 국가적으로 규제하기도 하였다.

조선을 국가가 조달하고 선인을 국가가 징발하면서는 수경가 대신에 耗米를 농민에게서 징수하고 있다. 이는 각 조창에서 경창까지 세곡을 운송할 때에 중간에서 생기는 손실과 결축을 보충한다는 명분에서였다. 문종 7년(1053) 이전의 모미 징수량은 세곡 1석에 1승이었다.1298)≪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그런데 문종 7년부터 세곡 1석에 7승으로 대폭 인상하였다. 당시의 1석=15두로 계산하여 보면, 문종 7년 이전에는 150석에 1석이나, 그 이후에는 22석에 1석이었다. 이로써 볼 때 문종 7년 이후의 모미 징수율은 가장 가까운 곳의 수경가 21석에 1석 비율과 비견된다. 말하자면 처음에는 모미에서 출발하였지만, 점차 모미 역시 운송비나 다를 바 없게 되었다. 국가가 운송비를 농민에게 겹으로 전가시킨 것이다. 모미는 고려 후기에 이르러 漕輓費라 하여 합법적으로 운송비의 명칭을 갖는다. 공민왕 때, 白文寶는 경상도의 조세는 다른 지방과 다를 바 없으나 조만비가 세곡 징수량의 배나 되어 농민의 생계가 곤궁함을 밝히고 이를 시정토록 건의하고 있다.1299)≪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한편 각지에 분포된 조창과 개경의 경창 사이에는 세곡을 싣고 오가는 조선의 항로가 설정되어 있었다. 망망한 바다이지만, 선박의 운항에 있어서는 예나 지금이나 일정한 항로가 있다. 각 조창에서 출발한 조선의 목적지는 개경 가까이의 동강과 서강이었다. 동강에 도달한 조선은 그 곳에 있는 좌창, 즉 廣興倉에 세곡을 입고시키고, 서강에 이른 조선의 세곡은 일단 하역하여 거기에서 다시 육운하여 우창, 즉 豊儲倉에 입고시켰다.1300)崔完基, 앞의 글, 47쪽. 이들 경창이 조선의 종점이었다.

다시 말하면 각지의 조창에서 해로 또는 수로를 경유하여 경창에 이르는 조운로가 설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고려 때의 기항지가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지만 조선시대와 큰 차이가 없으리라고 본다.≪增補文獻備考≫에 의하면, 마산의 석두창 자리에 있던 창원의 馬山倉을 기점으로 하여 통영·한산도 사이-고성 사량도 남방-남해 창선도 북방-남해도 북방-전라좌수영 남방-고흥 나로도 북방-완도 북방-보길도 북방-전라우수영·진도 사이-무안 자라도 동방-무안 지도·임자도 사이-영광 법성진 서방-영장 위도 동방-옥구 계화도 서방-서천 연도 동방-보령 원산도 남방-서산 안흥진 서방-당진 대난지도 서방-인천 월미도·영종도 사이를 지나 강화도에 이르는 조운로가 설정되어 있었다(<지도 3>). 이들 조운로는 조운이 국가의 재정에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국가의 생명선이나 다를 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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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3>고려의 13조항
<지도 3>고려의 13조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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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당시 미숙한 항해 기술, 그리고 위험한 바닷길 등 여러 가지 요인 때문에 조운로 위에서는 해난사고가 빈번하였다. 그리하여 빠르고 안전한 뱃길을 개척하는 것이 조운의 정상화를 위해 매우 중요한 과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 대책의 하나로 논의된 것이 漕渠의 개척, 즉 운하의 굴착이었다. 그 대상 지역은 대체로 충남 서산군의 팔봉면과 태안면의 경계가 되는 곳이다. 사고가 빈번한 安興梁 앞바다의 운항을 피하려 한 것이다.

안흥량은 조선시대에도 가장 위험한 해로의 하나였다. 해안선이 복잡할 뿐 아니라 연안 일대에 작은 섬이 무수히 분포되어 있으며, 더구나 아침 저녁으로 간만의 차가 크고, 또한 파도가 매우 거친 곳이다. 해로가 험하여 難行梁이라고까지 불리운 곳이다.1301)≪增補文獻備考≫권 157, 財用考 4, 漕運. 그리하여 중앙정부에서는 인종 때 조거를 개척하려고 鄭襲明을 보내어 수천 명의 군인을 동원하여 10여 리까지 파 보았으나, 지반이 거의 암반으로 되어 있어서 공사를 계속하지 못하고 중단하였다.1302)≪高麗史≫권 16, 世家 16, 인종 12년 7월. 그 후 고려 말에 이르러 다시 조거공사가 시도되었다. 즉 우왕 14년(1388) 위화도 회군으로 실권을 장악한 李成桂는 국가 재정에서 조운이 지니는 중요성을 헤아려 조운을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는 조거의 개통이 절실함을 인식하고, 王康으로 하여금 공사에 착수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왕강은 2개월에 걸쳐 공사를 벌였으나 두번째의 운하 굴착도 성사시키지 못하였다.1303)≪高麗史≫권 116, 列傳 29, 王康. 그 만큼 지형 조건이 나빴을 뿐 아니라 당시의 기술과 장비로는 용이한 것이 아니었다. 4백리 뱃길의 위험을 제거할 수 있는 방도가 무산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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