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5. 조운과 조창
  • 3) 조운제의 동요와 세곡의 육운
  • (1) 조운제의 동요

(1) 조운제의 동요

왕조의 지배력이 강화되면서 확립된 조운제는 고려 중기에는 비교적 정상적으로 운영되었다. 각 지에 설치된 조창은 세곡을 수납하고 보관하며 운송함에 있어서 그 기능을 충실히 발휘하였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 이르면서 정치적·사회적·경제적 변동과 관련하여 조운제는 차츰 동요되어 갔다.

먼저 조운의 대상인 세곡의 물량에 변화가 생겼다. 세곡의 수취는 조운의 전제 조건이었다. 그런데 12세기 후반 무신정권이 수립되고, 이어서 몽고의 침입과 내정간섭이 계속되면서 정치가 문란하여 고려 토지제도의 중심을 이룬 田柴科 제도가 무너지기 시작했는데, 이를 전후하여 권문세족들의 농장이 도처에 생겨났다. 권문세족들은 토지를 국가로부터 합법적으로 급여받거나 개간에 의해 소유지를 확대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 불법적으로 토지를 점유하여 농장을 경영하였다. 이들 귀족의 대토지사유화 현상은 산천을 경계로 하고, 군현을 단위로 할 정도로 광대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들 농장은 국가의 각종 조세와 역을 기피하고 있었다. 그 결과로 국가에서의 세곡 수취도 자연히 감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권문세족의 수탈에 견딜 수 없게 된 농민들은 농장에 의탁하거나, 고향을 떠나 유랑하게 되니, 국가의 세원 기반 자체가 위축되어 갔다. 따라서 운송 물량이 감축되고 있는 상황에서 조운의 기능은 당연히 약화되어 갔다.

군현제의 변동 역시 조운제의 운영에 영향을 끼쳤다. 즉 12세기 이후 농토를 잃고 유랑하는 무리가 전국적으로 광범하게 발생하면서, 이를 방지하고 국가의 통제력을 강화하고자 중앙정부는 종래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던 행정구획에 지방관을 파견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대다수의 속읍에 監務라 불리우는 지방관을 파견하고, 그들로 하여금 동요하고 있던 농촌사회를 진정시키도록 하였다.1304)河炫綱,≪高麗地方制度의 硏究≫(韓國硏究院, 1977), 94쪽. 또 군현의 하부 행정구획을 이루고 있던 향·부곡 등을 현으로 승격시키거나 촌·리로 개편하여 갔다. 이러한 움직임은 곧 전통적인 고려 군현제의 구조와 성격이 변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는 나아가 군현의 하부 행정구획이었던 조창에도 영향을 끼쳤다. 아산의 河陽倉이 慶陽縣으로 승격된 것이 그 구체적 사례이다.1305)≪高麗史≫권 56, 志 10, 地理 1, 楊廣道 稷山縣.

하양창이 경양현으로 바뀌었다고 하여서 그 지방의 세곡이 조운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조운은 계속되었으며, 하양창에서 담당하던 세곡의 운송은 이제 경양현이 맡게 된 것이다. 이는 다른 조창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본다. 즉 조창의 기능이 약화되자 바다나 하천에 인접한 군현은 각자가 독자적으로 선박을 구비하고 세곡을 운반하기에 이른 것이다.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세곡의 운송을 주관하던 조창에 대신하여 군현이 직접 세곡을 경창에 납입하는 형세에 이르렀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군현 중심의 조운활동이 전개된 것이다. 그에 따라서 세곡 운반에서 중앙정부의 역할이 줄어 들고, 종래 조운제가 지니고 있던 집약성·획일성이 점차 약화되어 갔다.

조운의 기능을 약화시킨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倭寇의 노략질이었다.1306)孫弘烈,<高麗末期의 倭寇>(≪史學志≫9, 1976).
羅鍾宇,<高麗末期의 麗·日關係>(≪全北史學≫4, 1980).
왜구란 대략 13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한반도와 중국 연안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일본의 해적집단을 일컫는다. 왜구는, 당시 일본 중앙정부의 힘이 약해져 지방까지 통치력이 미치지 아니하자, 기근에 허덕이던 변경의 영세어민들이 노략질에 나서면서 문제화되었다. 그들의 근거지는 주로 對馬島와 壹岐島였다. 왜구의 침략목적은 식량의 약탈이었으므로 그들의 주된 표적은 양곡을 보관하고 있던 창고와 세곡을 운반하고 있던 조선이었다(<지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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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4>고려 말 왜구의 침입과 조운 피해
<지도 4>고려 말 왜구의 침입과 조운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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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의 조선 약탈 상황을 살펴 보면, 충정왕 때 남원·구례·영광·장흥 등지를 습격하여 조선을 약탈해 갔고, 공민왕 때도 전라도 조선 4백여 척을 탈취해 갔다. 왜구는 조선 뿐 아니라 공민왕 7년(1358)에는 임피의 鎭城倉을 노략질하여서 창고를 내륙으로 옮기는 사태까지 있었다. 동 9년에는 강화도의 창고를 습격하여 미곡 4만여 석을 약탈해 갔고, 우왕 때에는 순천·아주·서주·영광 등지의 조창이 노략질 당했다. 이와 같이 왜구가 창궐하면서 조운제는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여러가지 요인이 조운제의 변질을 촉구하였다.

조운의 기능이 약화되고 있음은 조운제의 기본 구조인 조창·조선의 운영에 잘 나타나고 있다. 국가가 직영하는 官船漕運體制에서 조운의 핵심은 조창·조선·선인의 확보에 있었다. 그런데 고려 후기에 이르러 그것은 용이하지 않았다.

먼저 13개소에 설치되어 각기 인근의 고을에서 거둔 세곡을 운반하던 조창의 정상적 운영이 곤란해지고 있었다. 예컨대 왜구의 노략질로 연해의 조창이 페허화되거나, 내륙으로 옮겨야만 했다. 전라도 임피의 진성창이 대표적 사례이고, 충청도 아산의 하양창은 아예 폐해지고 대신 아산 고을이 직접 세곡의 운송을 책임지고 있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조창의 근거지를 산성으로 옮겨 漕轉城이란 용어도 생겨났다. 왜구의 발호가 특히 심하였던 14세기 후반에 조창은 거의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漕船의 확보도 용이치 않았다. 본래 조선의 건조도 쉽지 않았는데다가, 그 관리도 쉬운 것이 아니었다. 각 조창은 소정의 조선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해창의 경우 1천 석을 실을 수 있는 큰 배 6척씩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민왕 3년 왜구는 전라도 조선 40여 척을 약탈해 갔다.1307)≪高麗史≫권 38, 世家 38, 공민왕 3년 4월. 전라도에는 6개 조창이 있었으므로≪高麗史≫식화지에 의하면 36척이 있어야 한다. 이로써 볼 때 전라도의 조선은 공민왕 3년에 모두 분실된 것이다. 약탈된 조선이 모두 조창 소속의 선박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운송기능이 상실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조선의 약탈상이 보여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고려 말 중앙정부는 조선을 거의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을 부리는 선인들 역시 온전하지 못하였다. 본래 부역제의 일환으로 강제로 사역되고 있던 梢工·水手 등 선인들은 왜구가 조창과 조선을 습격할 때 잡혀가거나 살해되었다. 그들이 살기 위하여는 도망가야 했다. 왜구의 노략질이 아니어도 선인들은 고된 노동과 천한 대우로 견딜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때 정치질서·사회기강이 문란해지면서 각지에서 농민·천민들이 중앙정부의 압제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선인들도 이 기회에 고된 노동에서 벗어나고자 조창을 탈출하였으니, 왜구의 노략질에 앞서서 조운의 운영은 이미 차질을 보이고 있었다. 삼별초의 대몽항쟁 때, 남해안 조창 소속의 조군들이 삼별초에 협조한 것은 조운의 활동이 이완되고 있음을 보인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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