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5. 조운과 조창
  • 3) 조운제의 동요와 세곡의 육운
  • (2) 세곡의 육운

(2) 세곡의 육운

조창이 폐허화되고, 조선과 선인의 확보가 여의치 않으면서 조운이 불통되자, 세곡에 의존하던 국가 재정은 파탄상태에 이르렀다. 국고가 고갈되면서 관료들의 녹봉을 지급하지 못하거나 또는 삭감하는 경우가 종종 나타났다. 녹봉 지급과정에서 살인 사건도 일어났으며, 개경 시중에는 미곡 가격이 폭등하기도 하였다.1308)孫弘烈,<高麗漕運考>(≪史叢≫21·22, 1977), 200쪽.

이러한 상황 속에서 탐관오리의 부정과 비리도 조운제를 변질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즉 조창에 속한 아전이나 경찰의 창관들은 그 업무와 관련하여 부정을 자행하였는데 운송하는 세곡을 횡령하고 그 책임을 선인에 전가시키는가 하면, 창고에서 수납할 때 여러 가지 구실로 지연시키면서 뇌물을 강요하였다. 또 수납할 때 사용하는 도량형에 농간을 부려 민폐를 끼치기도 하였다. 이에 선인들도 그 피해를 벗어나기 위해서나 또는 횡령하기 위하여 고의로 조선을 침몰시키고 사사로이 나누어 먹는 경우도 있었다.1309)≪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漕運. 조운제가 변질되고 실제로 조운이 거의 통하지 않는 가운데 중앙정부는 모종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세곡의 운송 없이는 국가 재정이 유지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운을 단념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 대책은 육운 뿐이었다.

공민왕 5년(1356) 나라에서는 조운이 여의치 않자 각 요소에 院館을 세워 세곡을 육운하고자 하였다.1310)≪高麗史≫권 39, 世家 39, 공민왕 5년 6월. 그러나 육로가 발달하지 못하였고, 육상 운송수단이 용이하지 않은 당시로서는 육운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 후에도 세곡의 운송은 조운에 의존하였다. 그런데 왜구의 침략은 조금도 멈춰지지 않고 더욱 창궐하였다. 조창·조선에 대한 왜구의 노략질이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정부에서는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거국적으로 노력을 기울이면서 육운을 자주 시도하였지만, 육운의 실시는 사실상 어려웠다. 공민왕 22년의 예를 보면 일부 지역에서 정부의 강력한 지시로 세곡을 육운하고 있는데, 또 다른 지역에서는 계속 해로를 이용, 조운하고 있었다. 거듭된 중앙정부의 지시에도 육운이 잘 시행되지 않고 있는 것은, 왜구의 침탈만 피할 수 있다면 조운이 육운보다 훨씬 편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운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 만큼 여건이 악화되고 있었다. 조선이 모두 약탈된 상황 속에서 세곡을 운반할 수단이 없었다. 조창의 조선은 물론 군현이 주선하던 私船들도 왜구에게 거의 약탈되고 있었다. 공민왕 4년의 기록에 의하면 전라도에서 400여 척의 조선이 왜구에게 약탈되고 있는데,1311)≪高麗史≫전 38, 世家 38, 공민왕 4년 4월. 이들 선박은 사선이었다고 보인다. 군현이 사선으로 하여금 세곡의 운송을 청부시키고자 하여도 상황은 여의치 못하였다.

마침내 우왕 2년(1376) 정부는 조운을 완전히 정지시켰다.1312)≪高麗史≫권 133, 列傳 46, 신우 2년 윤 9월. 조운에서 육운으로 바뀌면서 국가의 세입은 정상적으로 확보되지 못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취약해지고 있던 국가 재정은 보다 궁핍화되고, 이는 나아가 고려왕조의 지배력을 약화시켜, 궁극적으로 고려의 멸망을 촉진시키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국가재정의 안정을 위해서는 세곡 운송의 원활화가 보장되어야 했는데, 그 과제는 새로운 지배 세력에 기대해야 했다. 우왕 14년(1388) 위화도회군으로 새로운 실력자가 된 李成桂는 새 왕조를 세우고 국가 기반을 굳히기 위해서 군사적 기반과 아울러 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해야 했는데, 경제적 기반의 강화는 토지제도의 정비와 조운제도의 회복에서 방도가 마련되어야 했다. 따라서 당시 이성계로서는 토지제도의 정비와 더불어 조운기능의 소통이 최우선의 당면 과제였다.

<崔完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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