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Ⅲ. 수공업과 상업
  • 1. 수공업
  • 2) 소 수공업
  • (1) 소 수공업의 형성

(1) 소 수공업의 형성

고려시대의 所 手工業은 관청수공업 및 민간수공업과 함께 이 시기 수공업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으며 민간수공업에 비하여 한층 전업적인 것이었고 생산품의 질도 민간수공업품보다 우수했다.

手工業 所들은 신라의 成 수공업에 그 연원을 두고 있는 듯하다.≪三國史記≫지리지에, “方言에 이른바 鄕·部曲 등 雜所는 모두 갖추어 기록하지 않는다”1321)≪三國史記≫권 34, 地理 1.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한 이유에서인지≪三國史記≫에는 장소가 불투명한 곳을 모두 한 곳에 모아 수록해 두었다. 그 중「成」이란 것이 많이 나타난다. 이들「성」의 명칭 중에서 麗金成·濯錦成·寶劍成 등은 수공업품과 밀접하게 관련된 듯한 느낌을 강하게 준다. 따라서「성」을「소」제도의 직접적인 모태라고 볼 수는 없지만, 태조가 즉위한 후 신라의 제도를 사용하면서 신라의「성」제도를 고려에 맞게 변용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1322)金炫榮,<고려시기의 所에 대한 재검토>(≪韓國史論≫15, 서울大 國史學科, 1986).

한편 수공업 소들은 신라 말기에 개별적 호족세력들이 가지고 있던 수공업장들이 고려에 흡수되어 편성된 것으로서, 이전에는 없던 고려만의 독특한 제도가 되었다.

삼국시기에는 적지 않은 호족들이 자체의 수공업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며 신라 말기에 군웅할거하는 현상이 보편화되면서 이들의 수공업장들도 증가했을 것이다. 견훤이 신라의 수도에 침공하여 자기의 수공업장을 만들 목적으로 많은 수공업자들을 납치해 간 경우에서 그 단적인 예를 볼 수 있다.1323)≪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10년 9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해 가는 과정은, 후백제와 신라를 통합하는 과정이며, 지방의 호족세력들을 고려에 복속시키는 과정이었다. 따라서 왕건은 반항세력들을 정복한 다음에는 그 지역민들을 반역자로 낙인찍어 모두 賤役을 지게 하였다. 한편 고려에 항거하다가 역명자로 낙인찍힌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자기 고장에 그대로 결박되어 국가에 집단적으로 예속되기도 했다. 충청도 목천지방의 주민들이 왕건에게 항거한 이유로 짐승 이름의 성을 쓰게끔 강요당한 데서 그러한 사례를 볼 수 있다.1324)≪新增東國輿地勝覽≫忠淸道 木川縣 姓氏. 이러한 경우에 그 지역민들은 향·부곡민으로 전락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지방세력들이 소유하고 있던 수공업장은 수공업 소로 되었다고 여겨진다.

고려시대에는 수공업생산을 전업으로 하는 수공업 소들과 그렇지 않은 소들도 많았다. 즉 사료에 나타나는 각종 소에는 장소를 나타내는 단순한 의미로 쓰여진 것도 있다. 예를 들면 포로수용소의 성격이 짙은 歸化所나 於谷所, 바다나 강에 제사지내는 熊津溟所·德津溟所 등이 그러한 것들이다. 사료에 나타나는 모든 소를 일괄적으로 취급하면, 고려사회만의 독특한 산물인 소 제도의 규명이 어려워질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장소를 나타내는 경우와 고려사회만의 제도인 소를 구분해야 되는데,≪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제시된, “각 所의 물품을 바친다”는 것과 예종 3年(1108)의 기록에서 나타나듯이 일반 주·현과 같이 소만의 “別貢·常貢을 내는 곳”을 소의 기본성격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즉 소는 장소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특정 수공업품과 원료를 만들어 내는 생산단위인 것이다.1325)徐明禧,<高麗時代「鐵所」에 대한 硏究>(≪韓國史硏究≫69, 1990), 6쪽. 수공업 소들은 고려의 성립시기에 조성되었던 사회적 조건과 수공업생산에 대한 수취정책에 의해서 성립된 것이다.

고려는 이와 같은 사회경제적 조건 속에서 전국 군현에 金所·銀所·銅所·鐵所 등 광산물을 제련 상납하는 곳과 일용품을 생산하는 絲所·紬所·紙所·瓦所·炭所·鹽所·墨所·藿所·瓷器所·魚梁所·薑所 등을 설정해 놓았다. 이 가운데서도 자기소와 염소·어량소·곽소가 비교적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그 밖의 수공업 소들은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아니었다.

고려시대의 소 중에서 금소·동소·은소·철소는 원료와 연료 때문에 주로 산간지대에 인접한 지역과 하천 유역에 위치하였다. 이들 소 수공업자들은 삽·망치·정·삼태기·쇠스랑·고무래 등의 도구를 마련하여 생산을 도모했다. 특히 금소의 수공업자들은 당시 사금채취가 기본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모래사장에서 간단한 함지박이나 삽·괭이 등으로 모래를 일어 사금을 채취하는 고된 노동을 했다. 이러한 사실은 충렬왕 3년(1277) 국가에서 충청도의 홍주·직산 등지에서 1만여 명을 동원하여 사금을 채취한 사실로 알 수 있다.1326)≪高麗史≫권 28, 世家 28, 충렬왕 3년 4월 경신.

이 밖에도 사치품인 명주실과 명주를 생산하던 사소·주소 등도 있었으나 이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자료가 없다. 다만 그것들이 대체로 수도 개경에 인접한 지역이거나 능라전이 설치되었던 서경을 비롯하여 능라, 명주 등 견직업이 발전하였던 경주·안동·성주 등지에 설치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지소는 고려시대에 종이가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여러 곳에 설치되었겠지만,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러나 묵소는 이에 비해 언급된 사료가 종종 있다. 즉 지명에 묵장벌, 묵방리, 묵곡소, 묵장산 등이 나타나는데 아마도 이런 곳은 묵소가 설치되었던 곳으로 보인다. 자기소와 와소는 전국 각지에 설치되었다. 강진에는 대곡소, 대구소, 칠량소가 있었는데 이것들은 고려시기 자기소의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 밖에도 전라도의 부안, 황해도의 송화와 옹진, 충청도의 대전 등지에서도 고려 때 가마자리들이 발견되고 고려자기들이 적지 않게 발견되었다. 이것은 이들 지역에 자기소 또는 와소들이 설치되어 자기와 기와를 생산했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충렬왕 3년 강화도에서 유리기와를 구울 때 廣州의 義安土를 원료로 가져다 썼다고1327)≪高麗史≫권 28, 世家 28, 충렬왕 3년 5월 임신. 기록에 나오는, 의안도 자기소 또는 와소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고려시기에는 각종의 수공업 소들이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있었으며 그것은 고려시기 수공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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