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Ⅲ. 수공업과 상업
  • 1. 수공업
  • 3) 민간 수공업
  • (3) 민간 수공업자의 사회·경제적 존재형태

(3) 민간 수공업자의 사회·경제적 존재형태

고려시대에 수공업자들은 사회적으로 천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가혹한 수탈을 당하였다. 관청수공업장에 징발된 수공업자들과 所 수공업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수공업자들은 수공업제품들을 지방관원들에게 납부하였다. 따라서 국가는 이들을 대상으로 징수할 각종 수공업제품의 양을 규정하였다. 이런 수취의 양은 그 자체만으로도 과중한 것이었다. 靖宗 7년(1041) 정월에 三司가 왕에게 올린 글에 의하면, “각 도에서 지방관원들이 주관하는 주·부의 세공은 1년에 쌀 300섬, 벼 400곡, 금 10량, 백은 2근, 베 50필, 백·적동 50근, 쇠 200근, 소금 300섬, 명주실과 삼실 40근, 기름과 꿀 1섬씩”1339)≪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租稅.이었다. 여기서 쌀·벼·꿀 등을 제외한 금·은·동·철 등의 금속과 베·명주실·삼실 그리고 소금 등은 수공업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수공업제품들이다. 명주실과 삼실 같은 것은 농민들의 가내수공업에서 생산된 제품이 납부된 것이었으나 나머지 수공업제품들은 전업적 수공업자들의 몫이었다. 또한 이 중에는 금소·은소·동소·철소·사소·염소 등으로부터 수취한 것들도 부분적으로 있었으나 대부분은 민간수공업자들로부터 수취한 것이었다.

국가는 정종 7년에 함경도에서만도 5만 209필의 베를 공물로 수취하였으며,1340)위와 같음. 선종 3년(1086)에는 왕태후 책봉을 축하한다는 구실로 각 도의 군현들로부터 10여만 필의 베를 수취하였다.1341)≪高麗史≫권 88, 列傳 1, 后妃 1, 文宗 仁睿順德太后 李氏. 여기에서 국가는 항상 규정된 액수만을 수취하는 것이 아니라 정액 이상의 양을 수취하였음을 알 수 있다.

수공업자들은 자기들의 노동생산물을 공물로 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수시로 각종 부역노동에 징발되어 기술노동을 국가에 무상으로 제공해야만 했고 또한 군대에 복무하는 의무도 져야 했다. 수공업자들은 고려 초기 이래 계속 진행된 수도의 성과 궁전 건축에 수시로 징발되었다. 당시에는 수도 개경의 도성건축을 비롯하여 서북·동북지방의 국방경비를 위하여 많은 성들이 축조되었다. 덕종 2년(1033)에는 서쪽 압록강구로부터 함경남도 정평 도련포에 이르는 1,000여 리 장성이 축조되었는데 이러한 축성사업에는 방대한 인원의 청장년들과 수많은 수공업자들이 징발되었다. 이러한 축성사업에 얼마나 많은 수공업자들과 백성들이 동원되었는가 하는 것은 개경의 나성 축조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高麗史≫권 56, 지리지에 의하면, 수도 개경의 나성은 약 20년 간의 세월을 거쳐 현종 20년(1029)에 완성되었는데 이 공사에는 30여만 명의 장정과 8,458명의 공장들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고려시기에 수공업자들은 귀족층의 불교숭상 때문에 끊임없이 진행되던 사원 축조에도 자주 징발되어 부역노동을 강요당하였다. 이러한 건축공사는 단시일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랫 동안 진행되었기 때문에, 수공업자들은 육체적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의 생계를 위한 수공업경영마저 지탱할 수 없었다. 선종 1년(1084)에 대운사와 대안사를 건축했을 때는 수많은 청장년들과 공장들이 징발되어 농사를 망치는 형편이었다고 한다.1342)≪高麗史≫권 6, 世家 6, 문종 2년 3월 경자. 대운사나 대안사와 같은 비교적 짧은 기간의 토목공사에 징발된 수공업자들의 생활형편이 이러한 상태였다는 것을 고려할 때, 12년간의 긴 세월에 걸쳐 문종 2년(1067)에 완성된 2,800칸에 달하는 홍왕사 건축같은 대규모의 토목공사에 이르러서는 수공업자들의 생활이 얼마가 곤궁했을까는 상상하기가 어렵지 않다.

고려시기의 수공업자들은 또한 일품군이란 명목으로 지방군에 포함되어 공역군으로 복무하였다. 고려시기의 주·현에는 지방군이 조직되어 해당 지방의 경비를 담당하였다. 해당 주·현군의 부대편성은 중앙군과 마찬가지로 보승·정용 등이 있었으며 그 밖에 일품군이 있었다. 주·현의 지방공병부대로서의 일품군은 북계·동계를 제외한 중부 이남의 이른바 5도의 주·군·현에 배치되어 있었다. 일품군 외에 또한 2, 3품군이 있었는데 이들은 70세 이상의 부모를 모신 외독자들로서 자기 마을에 그대로 있으면서 향토보위도 하고 부모봉양도 하게끔 편성된 공역군이었다. 그러나 부모가 죽으면 일반 일품군과 마찬가지로 주현의 공역군으로 복무하여야 했다.1343)≪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工役軍. 고종 23년(1236)에 강화도에 수도를 옮긴 무신정권은 각 주·군의 일품군들을 징발하여 강화도 연안의 제방을 중축하려 한 일이 있었다. 또한<淨兜寺石塔記>에도 일품군들이 돌탑건립에 참가한 사실들을 전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일품군은 군대라고는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축성, 건축 등을 담당한 노역부대인 공역군들이있다. 그러므로 일품군에는 생산에 종사하고 있던 지방 수공업자들이 주요한 구성원을 이루고 있었다.

지방의 일품군에 대하여 보면, 고려에서는 44개의 주·군·현에 무려 19,882명의 수공업자들이 일품군에 망라되어 공역군으로 복무하고 있었으며,1344)≪高麗史≫권 83, 志 37, 兵 3, 州縣軍 京畿. 동계에서는 14개 주·현·진에 14경의 공장 혹은 전장들이 공역군으로 징발되어 복무하였다.1345)≪高麗史≫권 83, 志 37, 兵 3, 州縣軍 東界. 안변부의 예에 따라 1경을 33명으로 계산하더라도 약 500명의 수공업자들이 공역군으로 복무한 것이다. 여기에 북계의 所丁 및 雜尺 1,268명을 합하면 고려시기에 약 2만여 명의 수공업자들이 공역군에 망라되어 토목·건축·축성 등의 노동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물론 일품군의 모두가 다 수공업자였다고 볼 수는 없으나 일품군 가운데는 수공업자가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였다고 보인다. 또한 공역군에 있어서도 공역군 전부가 수공업자는 아니었으나 많은 부분이 수공업자였다고 인정된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민간수공업자들은 그들이 생산한 노동생산물을 공물이란 명목으로 현물 그대로 수탈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품군, 공장, 전장이란 명목으로 군대에 끌려나가 공역군으로서 고된 기술노동을 강요당하였다. 특히 각 주의 일품군은 2교대로 나뉘어 가을에 맞교대를 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품군에 징발되면 공농일치의 원칙에 기초하여 생활하던 수공업자들은 농사철을 잃기 마련이었다. 이렇게 최소한의 생활도 영위할 수 없었던 수공업자들의 생활형편은 매우 비참했다. 그러나 직접 생산자인 민간수공업자들은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자기들의 생산활동을 계속하였고 그 과정을 통해서 적지 않은 기술을 개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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