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Ⅲ. 수공업과 상업
  • 2. 상업과 화폐
  • 1) 국내상업
  • (1) 도시상업

(1) 도시상업

고려시기의 상업은 크게 국내상업과 대외무역으로 나뉘어지며, 국내상업은 다시 도시상업과 지방상업으로 나눌 수 있다.1348)劉敎聖,<韓國商工業史>(≪韓國文化史大系≫Ⅱ,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65).
姜萬吉,<商業과 對外貿易>(≪한국사≫5, 국사편찬위원회, 1975).
도시의 성격은 역사의 변천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려우나, 비농업적인 인구의 대취락이란 공통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국내 최대의 도시는 수도이므로 개경은 군사상·행정상의 중심지인 관아도시인 동시에 상공업 중심지인 경제도시였다.1349)河炫網,<古代-高麗時代 都邑의 形成과 그 性格->(≪都市問題≫2-8, 1967).
趙璣濬,<經濟發展과 韓國都市成長에 관한 硏究>(≪東洋學≫7, 1977).
고려시기의 도시는 수도인 개경을 비롯하여 서경, 동경, 남경 및 牧의 소재지 등 행정 거점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1350)白南雲,≪朝鮮封建社會經濟史≫上(東京;改造社, 1937), 727쪽. 개경 이외 다른 지역의 도시상업 실태는 자료의 제약으로 파악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따라서 개경의 시전상업을 중심으로 도시상업 실태를 살펴 보고자 한다.

수도 개경은 태조 2년(919)에 건설된 계획도시였다. 수도를 개경에 정하고 궁궐과 관아를 지으면서, 수도를 5부(중·동·서 남·북부)로 나누고 그 밑에 坊과 里의 행정구역을 두었다. 5부 방리제는 태조 2년 처음 실시된 후 성종 6년(987)에 개편되었다가, 현종 15년(1024)에 5부 35방 344리 방리제로 체계가 정비되었다. 이 때 제정된 방리의 수와 방명을 보면<표 1>과 같다.1351)≪高麗史≫권 56, 志 10, 地理 1, 王京 開城府.
李基白,≪高麗史 兵志 譯註≫(경인문화사, 1969), 33쪽.

부명 방수 방 명 리수
동부
남부
서부
북부
중부
7
5
5
10
8
안정·봉향·영창·송령·양제·창령·홍인
덕수·덕풍·안흥·덕산·안갑
삼송·오정·건복·진안·향천
정원·법왕·흥국·오관·자운·왕륜·제상·사내·사자암·내천왕
남계·흥원·홍도·앵계·유암·변양·광덕·성화
70
71
81
47
75

<표 1>개경의 5부 방리제

고려시기 도시상업의 가장 대표적인 형태는 개경의 관설시장인 시전상업이었다. 市廛은 주현의 場市와 구별되는 상설시장이며, 어용시장인 점에서 대표적인 시장조직이었다. 시전은 도시민의 생활품을 판매하기도 하지만, 관수품을 조달하고 조세와 공납품 등 국고의 잉여품을 처분하는 기능과 외국사신과의 互市場, 대외무역의 결제기관으로서의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1352)姜萬吉, 앞의 글, 196쪽.
白南雲, 앞의 책, 733∼734쪽.

그러므로 5부 방리제에 의해 도시를 정비하면서 동시에 시전을 설치하였다. 개경에 시전이 처음 설치된 것은 “태조 3년 봄 정월에 송악의 남쪽에 도읍을 정하여 궁궐을 지었다. 3성·6상서를 두고 9시를 설관하였으며 시전을 세우고 방리를 갈라 5부를 나누고 6위를 두었다”1353)≪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3년 정월.고 한 것처럼, 태조 2년 수도를 개발할 때였다.

그러나 중앙군 조직인 6위는 성종 14년(995)에 처음 정비되었으므로 6위 가 태조 2년에 설치되었다는 것은 잘못이다. 이는 고려의 중요한 제도가 이미 건국 초에 완비된 것처럼 보려는≪高麗史≫편찬자의 윤색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시전이 태조 2년에 설치되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건국 후 오래지 않아 설치된 것만은 어느 정도 확실하다.1354)李基白, 앞의 책, 13∼14쪽.
北村秀人,<高麗時代の京市の基礎的考察-位置·形態を中心に->(≪人文硏究≫42-4, 1990), 289쪽.
朴龍雲,≪高麗時代史≫上(一志社, 1985), 238∼239쪽.

태조 2년에 설치되었다는 시전은 어용상인의 영업구역으로서 특정한 장소가 할당되어 있는 이른바「坊市」를 의미하는 것이었다.1355)白南雲, 앞의 책, 731쪽. 그런데 徐兢은≪高麗圖經≫에서 “왕성에는 본래 방시가 없었다”1356)≪高麗圖經≫권 3, 城邑 坊市.고 하였다.

송대 이전 중국의 도시는 기본적으로 정치·군사도시였으며 경제도시의 성격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도시의 성격은 법제적으로 市制와 坊制를 통해 관철되고 있었다. 시제는 도시 내에 관설 상업구역인「시」를 설치하여 그 내부에서만 상업을 허용하여 국가 통제 하에 두는 제도이며, 방제는 도시 내부를 가로로 구획하여 도시민을 폐쇄적인 방에 의해 규제하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제와 방제는 당 중기 이후부터 서서히 붕괴되어 송대에 들어와서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따라서 거주민은 이전과 같이 출입할 때 坊門을 경유하거나 坊正 등의 감시를 받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송대의 도시는 법제적으로는 시제와 방제의 붕괴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1357)이상은 李範鶴,<宋代의 社會와 經濟>(≪講座 中國史≫Ⅲ, 지식산업사, 1989), 179∼180쪽 및 斯波義信,≪宋代商業史硏究≫(東京:風間書房, 1968)를 요약한 것이다.

徐兢이 개경에 방시가 없다고 한 것은 송대 이전 중국 도시의 방시제와 같은 것이 없었다는 것이지, 시전 자체가 없다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개경의 시전 구조는 중국의 방제와는 다른 양상이었던 것 같다. 그러면 시전은 어디에 어떤 구조로 설치되었을까.

설치 초기의 시전 구조나 규모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하지 않아서 상세한 것을 알 수 없다. 12세기 초엽에 개경 시전의 北廊 건물 65칸이 불탔다는 기사로 보아,1358)≪高麗史≫권 53, 志 7, 五行 1, 예종 7년 9월 을축. 개경의 시전은 長廊 구조로 되어 있으며, 관부가 이를 건조하여 시전상인에게 대여했던 것이라 생각된다. 이 경우 상인들은 일정한 公廊稅를 바쳤을 것이다.1359)姜萬吉, 앞의 글, 196∼197쪽.

개경 시전의 위치나 형태를 보다 상세히 보여 주는 것은 12세기 초의 기록인≪高麗圖經≫이다.

① 왕성에는 본래 방시가 없고 오직 廣化門에서 관부 및 관에 이르기까지 모두 장랑이 있어 民居를 가리웠다. 때로 장랑 사이에다 그 坊門을 永通·廣德·興善·通商·存信·資養·孝義·行遜이라 하였다. 그 안에는 실제로 街衢나 市井은 없고 절벽에 초목만 무성하고 황폐한 빈터로 정리되지 않은 땅이 있기까지 하니 다만 밖에서 보기만 좋게 한 것 뿐이다(≪高麗圖經≫권 3, 城邑 坊市).

② 京市司에서 興國寺 다리까지와, 광화문에서 奉先庫까지의 장랑 수백 칸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민의 주거가 좁고 누추하며 질서가 없고 가지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가리워 사람들에게 그 누추함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高麗圖經≫권 3, 城邑 國城).

③ 大市·京市 2司는 남쪽 큰 거리에 있는데 동서로 마주하고 있으니, 關市의 정사를 균형있게 하기 위한 때문이다(≪高麗圖經≫권 16, 官府 臺省).

이들 기록을 종합하여 보면 시전의 위치는 대략 다음과 같다. 시전은 왕성의 서문인 宣義門에서 왕성 안으로 들어 가는 도로와 동남문의 長覇門(후의 정안문)에서 입성하는 도로가 교차하는 十字街를 남쪽 기점으로 하여, 그곳에서 북으로 이어져서 흥국사를 지나 병부의 서쪽에 이르러 왕성의 동문인 광화문에서 동으로 뻗은 도로와 만나면서 다시 서쪽으로 꺾어 광화문에 이르는 도로 즉 南大街에 위치하고 있었다. 정안문이나 선의문에서 성안으로 들어오는 도로는 국내외로부터 다양한 임무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나 각종 물자가 지나가는 왕성의 동맥이고, 십자가는 그 교차점에 해당한다. 京市는 바로 그 십자가를 기점으로 북쪽으로 이어져 있다는 점에서 경시 입지조건의 중요성을 헤아릴 수 있다.1360)北村秀人, 앞의 글, 291∼292쪽.

시전은 도로의 양편에 길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는 상설 점포인 장랑의 형태로 되어 있었다. 徐兢은 이러한 장랑이 민의 주거지가 좁고 누추하여 이를 가리기 위해 설치한 것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 장랑은 곳곳에 끊어져 있고 거기에는 장랑의 배후에 있는 방리를 출입하는 문인 방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방문에는 영통·광덕·흥선·통상·존신·자양·효의·행손과 같은 坊名을 표시하는 표찰이 붙어 있었다.1361)北村秀人, 위의 글, 267쪽.
그러나 종래 유교성·강만길·김병하·전수병·김동철·박용운·전병무 등 대부분의 고려시기 상공업사 연구에서는 영통·광덕·흥선·통상 등을 간판에 쓰여진 시전의 상호명으로 파악하였다. 북한의≪조선전사≫6(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0), 173쪽에서는 영통·광덕 등 간판을 붙인 상업지구로 홍희유,≪조선상업사≫-고대 중세-(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59), 70쪽에서는 문 위에 영통·광덕 등 현판을 단 8개의 상업지구로 파악하고 있다.

개경의 시전은 도시민의 생활품을 판매하기도 했지만 주로 관수품을 조달하고 국가의 잉여품을 처분하는 기능을 가진 어용상점으로서 국가의 보호 아래 발전되었으므로, 시전에 대한 국가의 관여도는 매우 높았다. 따라서 시전을 감독하는 관부로서 京市署가 설치되었다.1362)白南雲, 앞의 책, 734쪽.

≪高麗圖經≫에서는 남대가에 大市司·京市司가 동서로 마주보고 있으면서, 關市의 정사를 균형있게 하고 있다고 하였다. 서긍이 말하는 경시사는 경시서를 가리키나, 대시사는 고려의 관부 명칭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대시사에 해당하는 가능성을 가진 관사로는 街衢所를 들 수 있다. 가구소는 문종 30년(1076)에 설치되었으며, 남대가의 통행을 감시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임무를 지닌 상설 관사였다. 경시서는 시전에서의 물가의 감독과 가격의 공정, 미곡 매매의 감독과 가격의 공정, 상평창미의 매매 등을 담당하였다. 따라서 경시서가 남대가의 경시로서의 측면을 관할하는 기구라면, 가구소는 남대가의 街路로서의 측면을 주로 감독하는 포괄적인 경시 감독기구라고 하겠다.1363)北村秀人, 앞의 글, 274∼282쪽.

경시서의 직제를 보면 목종 때 이미 京市署令이 설치되었으며, 문종 때 다시 확대되어 令 1인(정7품), 丞 2인(정8품), 이속으로 史 3인, 記官 2인 등을 두었다.1364)≪高麗史≫권 77, 志 31, 百官 2, 京市署. 목종 때에 비해 문종 때에는 경시서의 직제가 늘어나고 또 경시서의 장관인 경시서령의 전시과 지급 규정이 13과에서 11과로 향상된 것은 직제가 확대·강화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1365)金東哲,<고려말의 流通構造와 상인>(≪釜大史學≫9, 1985), 225쪽.

이러한 직제의 확대는 경시의 발전을 전제로 한 것이며, 경시의 번영은 鐵錢과 布幣의 병용에 의한 상품교환 관계의 발전에 따른 것이었다.1366)白南雲, 앞의 책, 731쪽. 경시서는 상위의 관사로서 어사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어사대가 경시를 감찰하고, 경시서의 職掌에 깊이 관여한 것은 고려가 경시를 중시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잘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1367)北村秀人, 앞의 글, 276·292쪽.

한편 국가는 관영상점을 개설하여 직접 상업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개경에 는 書籍店·幞頭店·大藥局, 서경에는 鹽店·綾羅店·藥店 등이 있었다. 이들은 생산과 판매를 겸한 관영 상공업체였다. 이들 관영상점은 주로 지배층을 대상으로 생산·판매활동을 하였다고 생각된다.1368)홍희유, 앞의 책, 68∼69쪽.

이 밖에도 개경에는 茶店1369)全完吉,<高麗時代의 茶文化論(其一)-茶店의 存在와 意味->(≪民族文化硏究≫20, 1987).·酒店·食味店 등 관에서 설치한 관영상점들이 있었다. 이들 상점은 화폐유통책과의 관련 하에 발달하였다. 성종 때에는 개경에 주점을 설치했으며, 목종 때에는 다점·주점·식미점에서만 종전대로 전화를 사용하게 했으며, 숙종 때는 화폐유통을 촉진시키기 위해 개경과 주현에 각각 左右 酒務와 酒食店을 설치하였다. 특히 다점과 주점은 송대처럼 茶酒 전매제를 실시하여 화폐유통을 촉진시키는 동시에 商稅 수입을 도모하기 위해 설치하였을지도 모른다.1370)蔡雄錫,<高麗前期 貨幣流通의 기반>(≪韓國文化≫9, 1988), 88쪽.

개경의 시전을 중심으로 상업활동을 하였던 시전상인들은 국가에서 시전을 대여받거나 권세가·사원세력들과 결탁하여 시전을 경영하였을 것이다. 이들 시전상인 외에도 將作監 상인과 같이 각 관부에 출입하면서 물품을 조달하는 어용상인도 존재하고 있었다.1371)蔡雄錫, 위의 글, 98쪽. 고려 후기에 공물 대납업자의 역할을 담당했던 京主人이 명종 8년(1178)에 조성된 김제군 金山寺 향로의 명문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1372)李光麟,<京主人硏究>(≪人文科學≫7, 1962), 238∼242쪽. 고려 전기에도 경주인은 공물대납을 담당하였던 것 같다. 고려 전기부터 공물대납이 나타나면서 각 관부에는 장작감 상인과 같은 공물대납을 담당하는 상인들이 존재하였다고 생각된다.1373)朴祥鎬,<高麗時期의 國內商業>(建國大 碩士學位論文, 1988), 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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