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Ⅲ. 수공업과 상업
  • 2. 상업과 화폐
  • 1) 국내상업
  • (2) 지방상업

가. 장시

개경 등에서의 도시상업이 상설점포를 가진 시전을 중심으로 발전한 데 비해 지방상업은 주로 비상설적인 장시를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고려시기의 장시는 대개 方午에 열렸고 교역에는 화폐를 사용하지 아니하고 다만 쌀이나 베를 사용하였다.1374)≪宋史≫권 487, 列傳 246, 外國 3, 高麗. 방오는 正南으로 낮 午時이며 日中이다. 일중에 장이 열린다는 것은 교역자가 개시처 근처에 거주하는 사람들이었음을 의미한다. 하루 왕복거리 안에서 생활하고 있는 이들이 모여 교역하므로 아침에 나와서 장을 보고 저녁까지는 귀가할 수 있도록 일중에 出市가 열렸던 것이다.1375)白南雲, 앞의 책, 735쪽.
李景植,<16世紀 場市의 成立과 그 基盤>(≪韓國史硏究≫57, 1987), 76쪽.
이러한 장시의 모습은≪高麗圖經≫에 좀 더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서긍은 고려의 풍속에는 居肆가 없고 오직 일중에 墟가 서며, 남녀노소·관리·工技들이 각기 자기 가진 것으로써 교역하고, 泉貨를 사용하는 법은 없으며, 오직 저포·은병으로 가치를 표준하여 교역하고, 日用의 세미한 것으로 疋이나 兩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쌀로 錙銖를 계산하여 상환하고 있지만, 백성은 오랫 동안 그런 풍속에 익숙하여 스스로 편하게 여긴다고 하였다.1376)≪高麗圖經≫권 3, 城邑 貿易. 서긍은 장시를「허」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 허는 본래 중국 송대에 양자강 이남 강남지방에서 열리던 촌의 정기시장 즉 출시를 일컫는 것이었다.1377)李景植, 앞의 글, 76쪽.

중국의 경우 상품을 교환하는 장소로서의 시장은≪周易≫繫辭傳下의 “日中爲市”라고 한 것처럼 그 기원이 오래되었다. 그런데 송대에 강남지방의 농업·교통·산업개발이 진행됨에 따라 지방에서도 교환이 발달하여 허시·亥市·촌시·산시·야시·초시·소시·朝市·早市 등 다양한 명칭의 村市가 나타나게 되었다. 다양한 명칭의 촌시 중「墟市」는 촌락의 시로서 교역이 영세한 것이 특징이며, 직접적인 것은 아니지만 시의 개최가 정기 간헐적이라는 속성도 지니고 있다.1378)斯波義信, 앞의 책 337∼343쪽.

고려에서 일중에 장이 선다는 표현은≪周易≫의 ‘日中爲市’를 그대로 옮긴 관념적인 표현인지 알 수 없다. 어쨌든 서긍은 고려의 장시가 자기 나라인 송나라의 촌시인 허시와 같다고 인식하고 있었다.1379)李景植, 앞의 글, 76쪽.

농촌사회에서 사회적 분업이 진전됨에 따라 농민들 사이에는 자신이 생산한 농산물이나 가내제품의 일부를 가져와 필요한 생활품을 구입하는 교역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교역은 개인 사이에서 필요에 따라 이루어지기도 하였으나, 교역이 증대함에 따라 특정한 장소에 모여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高麗圖經≫에 나타나는 촌시는 비록「有無相遷」식의 교역수준을 보이지만, 그 규모는 단순한 물자교환 단계를 넘어서 송대의 강남지방 촌의 정기시장에 비견될 정도였다.1380)남원우,<15세기 유통경제와 농민>(≪역사와 현실≫5, 1991), 79∼80쪽.

이 장시는 농민만의 교역처는 아니었다. 서긍의 표현처럼 장시에는 농민·수공업자 등 직접생산자 외에 관리 등 여러 층이, 그리고 남녀노소 등 모든 연령층이 참여하여 교역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고려에서는 상하 모두가 상업에 종사하여 이익을 추구한다고 하였다.

서긍은 상인들이 멀리 가는 것이 없고, 오직 일중에 도시로 달려가서 有無를 교역한다고 하였다.1381)≪高麗圖經≫권 19, 民庶. 이러한 표현은 문화적·경제적 우월의식에서 고려의 경제발전 단계를 낮추어 보려는 인식이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장시는 개시장소가 주현의 치소 근처인 州縣市의 성격이었다. 목종·숙종 때 주현에 주식점을 설치하여 화폐를 통용시키려고 노력하였는데, 화폐유통책은 바로 이러한 주현의 행정중심지에 설치된 장시를 기반으로 실시된 조치였다.1382)李景植, 앞의 글, 77쪽.

주현의 장시에서 통용되는 교역 매개물은 쌀과 베였다. 이들은 이미 등가기준의 화폐로서의 보편적인 기능을 하고 있었으며, 이 밖에 銀甁도 사용되고 있었다. 농민교역은 생필품의 거래가 중심이었고 거래규모도 적었으므로 쌀과 베가 중심이었다. 특히 쌀은 일용품의 소규모 거래에서 가장 소단위까지 화폐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1383)≪高麗圖經≫권 3, 城邑 貿易.
李景植, 위의 글, 77∼78쪽.
이러한 장시가 며칠에 한 번씩 열렸으며 또 전국적으로 그 수가 얼마나 되었는지 등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日中爲墟’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한 달에 일정 기간마다 일정 횟수로 정기적으로 열리는 장시는 아니었다.1384)李景植, 위의 글, 78쪽. 송대의 촌시는 10간 12지의 특정한 날에 열리는 정기시가 대부분이었다(斯波義信,<中國中世の商業>,≪中世史講座≫3, 學生社, 1982, 211∼212쪽). 전술한 것처럼 서긍이 고려의 장시를 송의 촌시와 비슷하다고 인식하였다면, 고려의 주현시도 일정 횟수의 정기성을 띠고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나, 분명하지 않다. 草市는 10일에 1∼4회 농촌의 가로상이나 공지에서 열렸다. 교역된 물자는 주로 쌀, 조, 보리, 땔감, 채소, 물고기, 가축, 과실 등이었으나, 농촌가공품이나 수공업원료인 마포, 실, 기름, 옻칠 등도 거래되었다(李範鶴, 앞의 글, 181쪽).

서긍은 고려에서 민간교역이 일중에 이루어지는 원인을 주군의 토산이 모두 供上으로 들어가 상인이 먼 지역으로 나가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지적은 국가의 농민지배와 수취의 구조적인 특징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것은 한 요인에 불과한 것이었다. 보다 본질적인 것은 농민의 잉여물이 이들 장시와는 별도의 유통망에 얽혀 교역·흡수되고 있었던 데서 기인한 것이었다. 이런 교역은 사원·궁원·양반·토호들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强與·强賣·强買·强市·反同·互市로 표현되는 부등가교환을 통해, 세포·능라·갈(대)자리 등 고급 수공업품을 비롯하여 초피·송자·인삼·봉밀·황납 등 진기한 물품과 쌀·콩 등의 일용품까지 강제 매매하였다. 농민의 잉여생산물이 이들 지배세력에 의해 사적·독점적으로 추진되는 抑賣·抑買를 통해 교역되었으므로, 직접 생산자 사이의 교역은 일중에 서로의 물품을 교환하는 정도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농민·수공업자 등 직접 생산자층이 독자적인 시장기구를 형성하는 데까지 도달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1385)李景植, 앞의 글, 79∼82쪽.

억매매·호시·반동 등의 형태로 나타나는 피지배층에 대한 지배층의 강제 교역 형태는 당시에 발달한 대외무역과 연결되어 전개되었으며, 防納행위와 함께 직접 생산자층의 잉여 축적과 그에 기반한 유통경제의 발달을 억제하였다.1386)채웅석,<12, 13세기 향촌사회의 변동과 ‘민’의 대응>(≪역사와 현실≫3, 1990), 55∼56쪽. 고려시기의 장시는 조선 전기의 장시처럼 시를 이루면서 주요한 교역장소로 기능하였으나, 개시지역, 교역참여자, 출시일 등에서 완전한 농촌시장으로 성립하지는 못하였다.1387)李景植, 앞의 글, 79쪽.
남원우, 앞의 글, 79∼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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