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Ⅲ. 수공업과 상업
  • 2. 상업과 화폐
  • 2) 대외무역
  • (4) 일본과의 무역

(4) 일본과의 무역

대일무역은 사절의 왕래를 통한 進奉무역이 중심이었다. 양국 사이의 사절 내왕은 일본측 기록인≪日本紀略≫에 태조 20년(937) 8월 高麗國牒을 열어 보았다고 한 것이 처음이다. 태조 22년 3월에는 太宰府가 고려 사자를 돌려보냈다고 하였다.1426)中村榮孝,≪日鮮關係史の硏究≫上 (東京;吉川弘文館, 1965), 136쪽.
森克己,<日·宋·麗交通貿易年表>(≪日宋貿易の硏究≫, 東京;國立書院, 1948).
일본 사절이 고려에 온 것은≪日本紀略≫에 의하면 광종 25년(974) 윤 10월에 交易使가 고려에 다녀왔다고 한 기록이 처음이다.1427)羅鍾宇,<高麗前期의 麗·日貿易>(≪圓光史學≫1, 1981), 41∼42쪽.
金庠基, 앞의 책, 197쪽.
그러나 이 때 온 교역사의 성격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양국의 교역관계가 기록에 뚜렷이 나타나는 것은 문종 10년(1056)에 藤原朝臣 賴忠 등 30명이 金州(김해)에 왔던 때부터이다. 이 때 어떤 물품이 교환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김해에는 일본 사절을 위한 客館이 있었다.1428)姜萬吉, 앞의 글, 215쪽. 일본 사절의 명칭을 보면 日本國使·薩摩州使·對馬島使·壹岐島勾當官 등으로 중앙 정부와 지방정권의 사절들이 입국 진헌하였다.1429)李鉉淙,<高麗와 日本과의 關係>(≪東洋學≫7, 檀國大, 1977), 248쪽.

일본 무역선이 고려에 온 것을 명시한 것은 문종 27년(1073) 7월 일본인 王則貞과 松永年 등 42명이 나전·鞍橋·칼·鏡匣·硯箱·櫛·書案·畫屛·향로·弓箭·수은·나갑 등을 바치기를 청하였으며, 壹岐島勾當官도 藤井完國 등 33명을 보내어 방물을 바치려 하니, 고려에서는 이들이 뱃길로 개경까지 올 수 있게 허락한 기록이 처음이다.1430)≪高麗史≫권 9, 世家 9, 문종 27년 7월.
靑山公亮,<日麗通商管見>(≪白鳥博士還曆記念 東洋史論叢≫, 岩波書店, 1925), 118쪽.
王則貞은≪朝野群載≫에 의하면 상인이 분명하며, 문종 33년에도 매매차 고려에 왔었다.1431)靑山公亮, 위의 글, 121∼122쪽.
三浦圭一은, 王則貞이 宗像氏와 緣戚을 맺은 왕씨 일족일 가능성이 있으며, 또 太宰府에 예속된 贄人집단이 11세기에 동아시아무역의 담당자로 활약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중에는 松永法師란 이가 있었는데, 그와 松永年의 관계는 분명하지 않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양자의 관련성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三浦圭一,<10世紀∼13世紀の東アジアと日本>,≪講座日本史≫2, 東京大出版會, 1970, 258∼262쪽).
상인의 명칭도 일본상인·일본상객·筑前州商客·太宰府商客 등 다양하였으며,1432)李鉉淙, 앞의 글, 348쪽. 특히 九州지방의 호족과 무역함으로써 양국의 교역관계가 활발하였다. 문종에서 의종 때까지의 일본인의 입국 횟수를 보면 다음<표 2>와 같다.

구분 문종 순종 선종 헌종 숙종 예종 인종 의종 합계
재위
기간
1046∼
1083
1083∼
1083
1083∼
1094
1094∼
1095
1095∼
1105
1105∼
1122
1122∼
1146
1146∼
1170
 
일본 14   6     2   2 24
43   6 5 12 5 4 20 95

<표 2>11세기 후반∼12세기 후반 일본상인 입국 횟수1433)森克己,<鎌倉時代の日麗交涉>(≪朝鮮學報≫34, 1965), 65쪽 참조.

양국 간의 무역은 11세기 후반 문종 때 가장 빈번하였다. 특히 문종 29년 윤 4월에 상인 大江 등 18명, 6월에 朝元·時經 등 12명, 7월에 상인 59명 등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그러나 송상의 내왕과 비교해 보면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고려의 일본에 대한 태도를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문종 때 문물이 정비되고 송과의 무역이 성행하였으므로, 일본 상인에게도 자극이 되었다고 생각한다.1434)羅鍾宇, 앞의 글, 44∼46쪽. 당시 일본은 장원영주나 博多의 상인들이 스스로 무역선을 만들어 적극적인 해외무역을 한 시기였다. 그러나 조선술·항해술이 遺唐使시대보다 퇴보한 때였다. 따라서 상선의 해외활동은 지역적으로 가까운 고려를 무역 상대국으로 택하였던 것이다.1435)森克己, 앞의 글(1965), 64∼65쪽.≪朝野群載≫에서 “상인이 고려국을 내왕하는 것은 고금의 상례”라고 할 정도였다.1436)靑山公亮, 앞의 글, 117쪽.

헌종 이후 교역이 부진한 것은 여진 정벌,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등 고려 국내사정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으나,1437)靑山公亮, 위의 글, 125쪽.
森克己, 앞의 글(1965), 66쪽.
오히려 保原의 난(1156), 平治의 난(1159)과 같은 일본 국내사정에 기인한 것 같다.1438)羅鍾宇, 앞의 글, 46쪽.

무역품을 보면 일본에서 고려에 진상한 물품은 수은·유황·진주·법라·나갑·삼재·해조 등 원료품, 경갑·연상·서안·향로·화병 등 공예품, 도검·궁전·갑주·보도 등 무기류, 감귤·감자, 소·말, 채단 등이며, 호초·단목·沈香·서각·소목 등 남방산 물품도 있었다. 진헌품에 대한 고려의 하사품은 인삼·사향·홍화·호표피·면주·전적·대장경·미곡 등과, 송에서 수입한 약재·견직물·전적 등이었다.1439)李鉉淙, 앞의 글, 251쪽.
羅鍾宇, 위의 글, 49∼50쪽.

대일무역은 시종일관 제한적이고 거절적인 태도로 일관한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금주에 객관을 설치하고 진봉선은 1년에 한 번 2척으로 제한하였다.1440)≪高麗史≫권 35, 世家 25, 원종 4년 4월. 일본인이 고려왕에 대해 토산물을 진헌하고 이에 대해 고려왕이 회사하는 進獻下賜 무역이 중심이었으며, 일본 상인들은 이를 통해 이윤 추구에 주력하였다.1441)靑山公亮, 앞의 글, 127쪽.

이러한 진헌하사 무역의 성격에 대해서는 사헌무역,1442)森克己,<日·宋と高麗との私獻貿易>(≪朝鮮學報≫14, 1959), 551쪽. 太宰府체제에서 조공 무역 형식을 취한 형태,1443)三浦圭一, 앞의 글, 257쪽. 공무역1444)羅鍾宇, 앞의 글, 49쪽. 등 다소 다른 견해들이 있다. 양국 간의 무역은 왜구의 약탈만행이 심각해지면서 점차 쇠퇴하여 갔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