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Ⅲ. 수공업과 상업
  • 2. 상업과 화폐
  • 3) 화폐 및 차대법
  • (1) 화폐

가. 동전의 유통

고려시기의 화폐는 대체로 물품화폐와 금속화폐의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1447)고려전기 화폐의 일반적 성격에 대해서는 다음 글이 참고된다.
秋浦秀雄,<高麗肅宗朝に於ける鑄錢動機に就て>上·中·下(≪靑丘學叢≫7·8·9, 1932).
田村專之助,<高麗の貨幣銀甁の形態及び性質について>(≪浮田和民博士記念 史學論文集≫, 六甲書房, 1943).
金庠基,<大覺國師 義天에 대하여>(≪국사상의 제문제≫3, 國史編纂委員會, 1959).
金柄夏,<高麗時代의 貨幣流通>(≪慶熙史學≫3, 1972).
―――,<高麗朝의 金屬貨幣 流通과 그 視角>(≪東祥學≫5, 1975).
金三守,<高麗時代의 經濟思想-貨幣·信用·資本 및 利子·利潤 思想->(≪淑大論文集≫13, 1973).
奧村周司,<高麗の貨幣流通について-朝貢との關聯性->(≪早稻田實業學校硏究紀要≫10, 1975).
채태형,<10∼12세기의 국내상업과 대외무역 및 화폐유통의 발전>(≪력사과학론문집≫13, 1988).
―――,<고려시기의 금속화폐에 대하여>(≪력사과학≫2, 1987).
蔡雄錫, 앞의 글(1988).
金光植,<高麗 肅宗代의 王權과 寺院勢力-鑄錢政策의 背景을 中心으로->(≪白山學報≫36, 1989).
井上正夫,<高麗朝の貨幣-中世東アジア通貨圈を背景にして->(≪靑丘學術論集≫2, 한국문화연구진흥재단, 1992).
須川英德,<高麗から李朝初期における諸貨幣-錢·銀·楮貨->(≪歷史評論≫516, 1993).
물품화폐로 사용된 것은 주로 베와 쌀이었다. 그러나 쌀에 비해 베가 좀더 운반이 쉽고 가치의 안정성이 높았으므로, 점차 많이 쓰이게 되었다.1448)金柄夏, 위의 글(1975), 13∼14쪽. 그러므로 일반적인 교환수단으로서, 가치의 척도로서 가장 널리 사용한 화폐는 布貨였다. 이 때 포화로서 기능한 것은 주로 질이 나쁜 마포인 麤布였다. 물품 자체로서는 사용가치가 없는 추포가 교환수단인 포화로서 적절히 기능하고 있었다. 거래가 소규모이면서도 항상화·등가화되고 있는 교환시장에서 추포는 가장 적합한 화폐였다. 그러므로 농민들은 장시와 연관하여 스스로의 독자적인 화폐경제도 만들어 내고 있었다.1449)李景植, 앞의 글, 51∼52쪽. 포화는 뒤에 추포에서 5승포(5종포)로 바뀌었다. 5승포는 품질이 중간 정도 되는 베이지만 이것이 곧 화폐로서 구실하기도 했던 것이다.

고려왕조는 물품화폐 대신에 금속화폐를 사용하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성종 15년(996)에 처음으로 鐵錢을 주조하며 쓰도록 하였다. 성종 때에 최초로 실시된 화폐유통책은 추포 또는 기타 자연적인 물품화폐의 사용을 금지하면서 화폐에 대한 지배권을 국가권력이 장악하려는 중앙집권화 정책의 일환인 동시에, 六衛制의 설치나 州縣軍制의 개편 등 군사력 강화에 따른 국가재정 확보책의 일환으로 실시되었다.1450)蔡雄錫, 앞의 글(1988), 83∼86쪽. 그러나 이 때 주조된 철전은 활발하게 유통되지 못하였다.

화폐유통책을 실시한 지 불과 6년 후인 목종 5년(1002) 7월에는 풍속을 놀라게 하여 국가에 이익이 되지 못하고 백성의 원망을 일으킨다는 시중 韓彦恭의 건의에 따라 茶店·酒店·食味店 등에서만 화폐를 사용하고, 백성들이 사사로이 교역하는 것은 종전대로 베나 쌀을 사용하도록 하였다.1451)≪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貨幣 목종 5년 7월. 한언공의 화폐유통에 대한 입장은 土風에 입각하여 매우 수구적이었다. 성종 때의 화폐유통책은 그 주도세력이 우리의 여건과 기반을 도외시하고, 중국의 銅鐵錢 유통책에 일방적으로 견인되어 비주체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1452)具山祐,<高麗 成宗代의 鄕村支配體制 강화와 그 정치·사회적 갈등>(≪韓國文化硏究≫6, 1993), 139∼141쪽. 한편 蔡雄錫, 앞의 글(1988), 87∼88쪽에서는 목종 이후 중앙집권화를 지향하면서도 본관제의 자율적 기능이 강조되는 상황에서 화폐유통정책이 본관제의 습속과 융화되지 못하여 수정 완화되었다고 하였다.

숙종 때에 다시 화폐유통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주전사업이 실시되었다. 숙종 2년(1097)에 주전관을 두어 금속화폐의 유통을 장려하였다. 숙종 6년 4월에는 주전도감에서 사람들이 전폐를 사용하는 이점을 알아 편하게 여기니 종묘에 고할 것을 상주하였다.1453)≪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貨幣 숙종 2년 12월·6년 4월.

숙종 때의 화폐주조는 생산력의 증대와 교환경제의 발달, 정종·문종 때의 도량형의 정비 등에 의해, 성종·목종대에 물품화폐의 비중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던 제약조건이 어느 정도 극복되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주전의 주된 동기의 하나는 국가재정의 확보에 있었다. 당시 거란·여진과의 관계에서 위기가 증대하였으며, 이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국가적 경제력이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이에 義天의 절대적인 포부 및 경륜과 숙종의 확고한 결의가 결합되어 화폐주조가 이루어졌다.1454)秋浦秀雄, 앞의 글 下, 72∼73쪽.

그러나 화폐유통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숙종 7년(1102) 12월에야 비로소 해동통보를 주전하고 그 유통책을 마련하게 되어, 이를 太廟八陵에 고하고 錢貨 15,000관을 재추·문무양반·군인에게 나누어 주었다.1455)≪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貨幣 숙종 7년 12월. 숙종 2년에 시작된 주전사업은 화폐유통 반대론에 부딪혀 지연되다가 숙종 7년 12월에야 본격적으로 실시된 것이다. 화폐유통을 촉진시키기 위한 조치로 개경에 左右 酒務를 설치하였다.1456)위와 같음.
蔡雄錫, 앞의 글(1988), 91쪽.
그러나 화폐유통이 부진하자 숙종 9년 7월에 관료와 군사에게 官錢을 지급하고 酒食店을 주현에까지 확대 설치하여 화폐유통의 보급을 도모하였다.1457)≪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貨幣 숙종 9년 7월 및 권 12, 世家 12, 숙종 9년 7월 신축.
蔡雄錫, 위의 글(1988), 91쪽. 한편 井上和夫, 앞의 글, 207쪽에서는 설치를 통화에 신용을 부여하기 위한 지불 준비, 즉 최종적으로 술과 교환된다고 안심시킴으로써 명목 이상의 가치로서 유통에 편입되기를 지향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숙종 9년 7월의 화폐유통책은 南京 建都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남경 경영은 지리도참사상을 이용한 숙종의 왕권 강화의 한 방편이었으므로, 주전사업은 남경 경영에 필요한 재정적 기반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숙종의 측근이었던 대각국사 의천과 尹瓘이 남경 창설과정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1458)蔡雄錫, 위의 글(1988), 91∼92쪽.

주전정책을 옹호한 세력은 윤관 등 신흥관료와 의천 등 天台宗 계통 사원 세력이었다. 따라서 숙종 때의 주전사업은 기득권적인 문벌귀족과 法相宗 계통 사원세력의 경제력을 약화시켜, 왕권을 강화하고 사원세력의 재편성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하였다.1459)金光植, 앞의 글 141∼146쪽.

숙종 때는 여진정벌을 위해 별무반을 창설하고 왕권을 강화함에 따라 재정 수요가 증대하였으며, 이를 확보하기 위한 방책으로 官屯田을 설치하고 화폐 유통을 추진하였다. 국가는 화폐를 발행하여 이익을 취할 뿐 아니라, 실질가치가 명목가치와 일치하지 않는 주화를 제작하여 유통시킴으로써 쌀·베와 같은 실질가치를 지닌 재화를 비축할 수 있었다.1460)安秉佑,<高麗의 屯田에 관한 一考察>(≪韓國史論≫10, 서울大, 1984), 45쪽.

성종·숙종 때의 화폐정책은 시전과 장시를 매개로 한 상업발달을 기반으로 하여 발달하였으며, 화폐의 발달은 동시에 상업의 발달을 촉진시키는 상승작용을 하였다. 또한 상업발달의 기반 위에서 상품의 운송·유통과정과 관련있는 關稅·津稅와 상업세 징수를 통해 稅收의 확대를 추구하였다.1461)蔡雄錫, 앞의 글(1988), 97∼110쪽.

고려시기에 유통된 동전은 건원중보·동국통보·동국중보·해동원보·해동통보·해동중보·삼한통보·삼한중보 등이다. 이들 동전은 다시 對讀가 回讀, 해서·전서·행서·예서·八分書의 서체, 대형과 소형 등 여러가지 구분이 있어서 약 100여 종이나 되었다. 이처럼 다양한 형태로 주조된 것은 주조의 다원성과 장기간에 걸쳐 주조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물품화폐가 보편적인 교환의 척도이며 수단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1462)金柄夏, 앞의 글(1972), 39쪽.

고려시기에는 송의 동전도 유입되어 사용되었던 것 같다. 북송 말기부터 宋 동전의 해외 유출은 점차 증가하였다. 북송 神宗 熙寧 7년(1074, 문종 28) 전화의 해외유출 금지를 해제한 적이 있지만, 대체로 유출금지책으로 일관하였다. 北宋錢이 동아시아 무역에서 商貨로서 널리 유통된 것은 11세기가 최전성기였다. 송전이 유출된 범위는 동으로 일본·고려, 북으로 거란·금, 남으로 南海諸島, 서로 페르시아에서 아프리카 동해안의 마릴랜드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이었다.1463)三浦圭一, 앞의 글, 265∼266쪽. 송전의 유출이 증가하자, 남송 寧宗 慶元 5년(1199, 신종 2) 7월에는 일본·고려상인들이 동전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금지하는 조치가 내려졌다.1464)森克己, 앞의 책, 474쪽.
≪宋史≫권 487, 列傳 246, 外國 3, 高麗傳에도, 寧宗 慶元(1195∼1200) 연간에 조칙을 내려 상인들이 동전을 가지고 고려로 들어가는 것을 금지시켰다고 하였다.

12세기 무렵에 축조된 충주시 직동 廢古墓群에서도 많은 양은 아니지만, 10세기 후반∼12세기 초에 주조된 宋錢이 약간 출토되었다.1465)충주공전박물관·충주시,≪忠州山城 및 直洞古墓群 發掘調査 報告書≫(1986). 이러한 송전의 유입은 고려의 화폐유통을 촉진시키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1466)森克己,≪續日宋貿易の硏究≫(東京;國書刊行會, 1975), 148∼149·182∼183쪽에서는 12세기 후반부터 송전이 유입되어 비로소 고려는 화폐경제로 이행하였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井上正夫는 실제로 고려에서는 송전이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井上正夫, 앞의 글, 213쪽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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