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Ⅲ. 수공업과 상업
  • 2. 상업과 화폐
  • 3) 화폐 및 차대법
  • (2) 차대법

(2) 차대법

고려시기의 차대관계에1475)차대법을 개관한 것으로는 다음 글이 참조된다.
白南雲, 앞의 책.
崔慶洙,<高麗時代의 貸借種別의 考究>(≪建大學報≫12, 1962).
徐吉沫,<高麗時代의 貸借關係 및 利子에 관한 硏究>(≪國際大學論文集≫9, 1981).
따른 법정이자율이 정하여진 것은 경종 5년(980)이다. 公私의 차대에 쌀 15두에 5두, 베 15척에 5척의 이자로 1/3의 이식을 정하였다.1476)≪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借貸. 그 뒤 성종 원년(982)에는 ‘子母相侔’라 하여 원금과 이자가 같게 되었을 때는 그 이상의 이자를 받지 못하도록 하는 법제가 마련되었다. 이「子母相侔法」은 문종 원년(1047)에 정해진「子母停息法」과 같은 의미일 것으로 이해된다. 자모정식법은, 1∼3년은 1/3, 4년째는 무이자, 5년째는 4/10, 6년 째 이후는 이자 지급을 정지시키는 방식으로,1477)徐吉洙, 앞의 글, 214∼215쪽. 경종 때의 규정에 비해 이자 부담을 훨씬 줄인 것이다.1478)具山祐, 앞의 글, 124쪽. 그러나 이러한 법제에도 불구하고 법정이자율이 워낙 고율인데다가 불법적으로 많은 이식을 취하는 고리대가 성행하여 여러가지 사회문제를 일으켰다.1479)朴龍雲, 앞의 책, 248쪽.

貸錢層으로는 供辨都監·관고·신흥창·양현고 등 국가 자체가 식리를 하는 기관도 있었고, 이러한 공채의 폐단 또한 매우 컸다. 사채로는 최고 권력자인 왕을 비롯하여 왕실·권세가·부호·환관 등 지배층의 식리활동이 성행하였으며, 경주인의 식리활동도 적지 않았다. 차대관계에서 특이한 것은 사원의 식리활동이 성행하였다는 점이다. 사원은 국가가 지급하는 토지, 왕실·귀족이 기진하는 토지, 일반민이 투탁한 토지 등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사원의 식리활동은 보·장생고 등 기구를 통하여 행해지고 있었는데, 특히 보가 중요한 식리 기구였다.1480)徐吉洙, 앞의 글, 262∼263쪽.

寶는 전곡을 시납하여 그 본전은 보존하고 이식을 취해 영원히 이롭게 하는 것이라는 방언으로서,1481)≪高麗史節要≫권 1, 태조 13년 12월. 일정한 자금을 밑천으로 하여 얻어지는 이자를 가지고 불사나 공공사업 등을 행하는 비영리재단이다. 보에는 광학보·금종보·학보·제위보 등 여러 종류가 있었다.

崔承老의 시무책에서 여러 사원의 승려들이 주군에 사람을 파견하여 불보의 전곡을 관리하게 하고 매년 식리함으로써 백성을 괴롭히므로 불보 전곡은 오직 사원의 莊舍에 한하도록 하라고 한 것처럼,1482)≪高麗史≫권 93, 列傳 6, 崔承老. 보는 원래의 설립 취지와는 달리 고리대로 변질되었다. 사원 고리대의 주대상은 사원예속민 즉 隨院僧徒로 표현된 예속농이었다. 그러나 그 대상이 사원전의 경작민에게 한정되지 않고 일반 군현민에게까지 미치고 있었다. 이는 용문사중수기에 축성보의 명목으로 마련된 700석을 촌민에게 나누어 빌려 주고 그 이식을 취하여 도량의 비용으로 삼았다는 데서도 확인된다.1483)韓基汶,<高麗時代 寺院寶의 設置와 運營>(≪歷史敎育論集≫13·14 1990), 381쪽.

고려 후기로 갈수록 식리는 더욱 가혹해져서 공채나 부호의 사채의 경우 文契를 조작하거나 단리가 아닌 복리로 계산하는 경우도 있었다.1484)徐吉沫, 앞의 글, 216∼219쪽. 이러한 현상은 사원보의 식리에도 마찬가지였다. 무신난 후 수선사의 慧諶은 倍長 혹은 半長의 이익을 취하므로 부익부 빈익빈의 상황이 전개된다고 하면서 가혹한 식리행위를 비판하고 國式 즉 법정이자율에 따라 그 이식을 낮출 것을 주장하였다.1485)韓基汶, 앞의 글, 382쪽.

사원은 개인이나 국왕이 시납하는 布·穀을 본으로 하여 고리대를 행하였 다. 개인이 사찰에 물품을 시납할 때는 고리대 행위 즉 ‘存本取息’을 전제로 하였으며, 고리대의 규모는 적은 것이 아니었다. 명종 때 용문사·용암사·용수사는 각각 7백, 2천, 1천 석의 곡식을 이식하였으며, 고종 때 수선사는 1만 1백 석으로 이식행위를 하였다. 당시 이자율이 1/3이었기 때문에 농민들은 상당한 양의 잉여물을 고리대로 수탈당하였다. 고리대를 관리하는 자는 사원의 사정에 따라 각각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각 지방에 문도를 직접 보내거나 또는 말사를 통해 관리하기도 하였다. 고리대의 주대상은 농민이었다. 사원과 농민과의 관계는 상하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고리대는 불평등한 관계에서 행해지게 되었다. 따라서 사원의 차대 행위는 고율일 뿐만 아니라 강제성을 띤 것이었다. 필요하지도 않은 쌀이나 베 등을 민에게 강제로 빌려주는 행위가 널리 성행하였다. 즉 反同은 일종의 강제고리대였다. 그러므로 사원의 고리대는 농지경영이나 상업과 하나가 되어 농민의 잉여를 수탈하였다. 농지경영을 통한 지대·지세의 수취가 일차적인 것이라면, 상업·고리대를 통한 수취는 이차적이고 부차적인 것이었다. 이들 세 가지 것은 별개로 농민을 수탈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구조적으로 농민을 수탈하는 것이었다.1486)이상은 李炳熙, 앞의 글, 110∼119쪽을 요약 정리하였다.

한편 백성들에 대한 진휼기관으로 설치된 義倉도 고리대 기능을 하였다. 원래 의창곡은 이식없이 빈민에게 분급하고 가을에는 그 원본만 환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종 때에 썩은 관곡을 빈민에게 강제로 지급하여 그 이식을 취하였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점차 이식을 전제로 한 공적 고리대로 전환되어 갔다.1487)朴鍾進,<高麗前期 義倉制度의 構造와 性格>(≪高麗史의 諸問題≫, 三英社 1986), 434∼436쪽. 의창곡이 일종의 부가세로 징수되어 국가재정수입의 일부를 구성함으로써 고리대로 전환하였던 것이다.1488)白南雲, 앞의 책, 572∼573쪽.

<金東哲>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