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사회구조
  • 1. 신분제도
  • 1) 신분제도의 형성과 구조
  • (2) 신분구조의 구성

(2) 신분구조의 구성

 여러 신분계층들은 각기 다른 신분상 지위의 높낮이로 말미암아 위 아래로 서로 이어지면서 하나의 신분구조를 이루었다. 이 신분구조의 구성을 어떻게 파악하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먼저 제기된다. 신분구조를 이루는 여러 신분층들을 몇 개의 큰 단위로 이해하여 보는 일이 유용할 것이다. 여기서 이에 관한 상세한 논의를 벌일 여유는 없다. 다만 崔承老의 上書를 검토하여 당시 사람들이 고려의 신분조직의 구성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알아보겠다.

① 신라 때에는 公卿·百僚·庶人의 의복·신발·버선에 각기 品色이 있어서, 공경·백료는 朝會하면 公襴을 입고 穿執을 갖추고 조회에서 물러나오면 편리한 대로 옷을 입었으며, 서인·백성은 文彩를 입지 못했으니 귀천을 분별하고 존비를 가르기 위한 때문입니다. … 우리 조정에서는 太祖 이래로 귀천을 물론하고 마음대로 옷을 입어서 관직이 비록 높더라도 집이 가난하면 능히 公襴을 갖추지 못하고, 비록 관직이 없어도 집이 부유하면 綾羅와 錦繡를 사용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토산물은 좋은 것이 적고 거친 것이 많은데 문채있는 물건은 모두 토산물이 아닌데도 사람마다 입게 되면 다른 나라 사신을 영접할 때에 百官의 예복이 법과 같이 되지 않아 수치를 당할까 두렵습니다. 원하건대 백료로 하여금 조회에서는 … 공란과 천집을 갖추도록 하고…, 庶人은 문채·紗縠을 입지 못하게 하고 다만 紬絹만 쓰도록 하소서(≪高麗史≫권 93, 列傳 6, 崔承老).

② 佛法을 崇信하는 것이 비록 좋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帝王·士·庶가 공덕을 행차는 것은 사실이 같지 않습니다. 庶民과 같은 경우에는 수고롭게 하는 것은 자신의 힘이요, 허비하는 것은 자신의 재산이므로 피해가 남에게 미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왕의 경우에는 民의 힘을 수고롭게 하고 민의 재산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 제왕은 … 폐단이 臣民에게 미치지 않게 하였습니다(위와 같음).

③ 本朝의 良賤의 법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우리 聖祖께서 창업한 초기에 그 群臣들이 본래 노비를 가졌던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 나머지 본래 없던 자들은 혹은 종군하여 포로를 얻기도 하고 혹은 돈으로 사서 노비로 삼았던 것입니다. 성조께서는 일찍이 포로를 석방하여 良人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공신들의 뜻을 동요시킬까 염려하여 편의에 따르도록 허용하였는데 60여 년에 이르도록 控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광종에 이르러서 비로소 노비를 按驗하여 그 시비를 분별하니 이에 공신 등이 원망하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도 諫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 賤隷들이 뜻을 얻어 존귀한 이를 능멸하여 깔아뭉개고 거짓을 다투어 얽어서 본 주인을 모함하는 자를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었습니다. … 원컨대 성상께서는 … 賤한 자로서 貴한 이를 업신여기지 말게 하십시오 … 대개 관직이 높은 자는 이치를 알아서 非法 행위가 적으며, 관직이 낮은 자는 만일 지혜가 비행을 분식할 수 있는 자가 아니면 어찌 능히 良을 賤으로 만들겠습니까(위와 같음).

 ① 에서는 의복의 착용에 관한 사람들의 권리와 의무를 말하고 있다. 사람들을 계층(신분)으로 일컫고 있거니와, 公卿·百僚·庶人·百姓 따위가 그것이다. 여러 계층을 다시 정리하여 ① 의 맨 끝부분에 보이는 대로 백료(百官)와 서인의 둘로 나누었다. 사회구성원 전부를 이 두 계층으로 양분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구성원은 누구나 의복을 입어야 하는 것이고, 또 그럴 경우에 누구라도 입을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을 가려야 했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어떤 옷을 입을 수 있는 사회적 권리거나 반대로 그것을 입어서는 안되는 사회적 의무 따위가 각기 다른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여 주는 것이고, 그 사회적 지위의 차이에 따라서 한쪽은 백관층으로, 다른 한쪽은 서인층으로 규정되었다는 이야기도 된다. 그런데 특정한 옷을 입을 수 있는가 없는가, 그러한 권리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관련계층이 관직이 있는가 없는가의 기준에 따라서 결정되었다. 그러니까 백관은 관직을 가진 계층인데 비하여 서인은 관직이 없는 계층이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① 에서 백관(僚)은 ② 에서의 士와 다름이 없다. 사는 帝王과 庶(民)와 나란히 있는데, 제왕은 당연히 예외로 돌려질 수 있는 것이고 보면, 여기 서도 사회구성원 전부를 사와 서의 두 계층으로 양분하고 있다. 사회구성원을 두 계층으로 양분하여서 파악하는 것으로는 ③ 에 보이는 良賤法이 또 있다. 士庶制이거나 良賤制이거나 모든 사람들이 사 아니면 서인, 또는 양인 아니면 천인의 계층에 속하였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 개념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원리나 원칙에 있어서 그러하였을 뿐이다. 그러한 제도의 실제 운용에서 나타난 현실은 제한된 의미를 가지는 데 지나지 않았다.

 ① 에서 서인은 文彩·紗縠을 입지 못하지만 紬絹 옷은 입을 수 있다고 하였다. 비단으로 만들어질 주견옷이 노비들에게 어울릴 리도 없거니와 최승로가 노비들까지 포함시켜 서인을 말하였을 까닭도 없다. ② 에서의 서민은 그의 노력과 재산이 자신이나 제왕이 공덕을 행하는 데 쓰일 수도 있는 신민으로 이해되고 있는데, 역시 노비와는 거리가 먼 존재였다. 서인이 사와 함께 사회구성원 모두를 두 계층으로 나누는 것인 한, 모든 계층이 둘 가운데 하나에 소속되어야 마땅한 이치이다. 노비는 응당 서인에 포함되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서인에 노비가 빠져 있었던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③ 에 보이는슷하였다. 양천은 양인과 천인을 뜻하는데 천인은 노비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③ 에서 양천법의 오래됨을 상기시킨 최승로는 천인과 관련하여서는 노비만을 되풀이하여 언급하고 있다. 양인이 아닌 자가 천인이듯이 천인이 아니면 양인이어야 이치에 맞다. 백관이나 사는 당연히 양인이었을 터이다. ③ 에서 언급된 群臣·功臣·官高者·官卑者는 모두 ① 에서의 백관이나 ② 에서의 사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③의 어디에도 그들이 양인과 동일하게 파악되어야 할 근거가 나타나 있지 않다. 오히려 실제는 그 반대였다. 그들은 노비를 소유한 자로 보이고 있거니와 실체는 양인으로서가 아니고 貴(族)로서 표현되었다 천예들이 뜻을 얻어 존귀한 이를 능멸하였다던가, 천한 자로서 귀한 이를 업신여기지 말게 하라던가 하는 것이 그러한 예이다.

 더욱이 관직이 낮은 자가 양인을 가지고 천인을 만들지는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는 관직자가 양인과 구분되고 있었다는 점을 크게 뒷받침한다. ③ 에서 최승로가 일컬은 양인은 전쟁 포로였거나 가난하여 몸을 팔 수도 있는 그러한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그는 이러한 양인에 관직자들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는 관직자들을 천인은 물론 양인과도 구별하여 귀한 사람, 존귀한 이들로 묘사하였는데, 그것은 그들이 신분적으로 귀족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서제의 실제에 있어서는 노비가 빠지고, 양천제의 경우에서는 관직자가 제외되어 있었다. 전자의 입장에서 고려의 신분구조를 재구성한다면 士―庶人―奴婢, 즉 귀족 ―서인―양인이 될 것이다. 한편 후자의 입장에 서면 관직자 ―양인―노비, 즉 귀족 ―양인―천인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서인과 양인은 서로 다른 표현으로 되어 있지만, 귀족과 천인의 중간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유일한 계층이었다는 점에서 같다. 이 둘은 동일한 계층을 일컫는 것으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원리나 원칙보다 실제와 현실을 더 중시하여야 한다는 점에서 고려의 신분구조의 구성을 귀족·양인(서인)·천인의 세 신분계층이 상하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자 한다.001)이러한 이해는 이미 학계에서 널리 알려져 온 바다. 그러나 고려의 모든 신분층을 양인 아니면 천인으로 보는 입장도 있다(許興植,<身分制와 職役>,≪韓國史硏究入門≫, 知識産業社, 1981, 215쪽 및<高麗時代의 身分構造>,≪高麗社會史硏究≫, 亞細亞文化社, 1981, 347∼355쪽 참조).

 그런데 이 세 계층은 그 구성 단위로서는 가장 큰 것이었다. 각 계층은 저마다 여러 작은 단위의 신분계층을 포함하고 있었다. 귀족은 가장 많은 사회적 특권과 가장 적은 사회적 제약을 지니고 있었는데, 특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누구보다도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컸다는 점이다. 관인층이 귀족의 대표적 계층이었다. 관인층은 士族으로 바꾸어 불러도 좋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나아갈 수 있는 仕路의 차이에 따라서 文班·武班·南班으로 나뉘어 상하로 연결되어 있었다. 천인은 곧 노비를 뜻하였다. 노비는 사족과는 반대로 가장 적은 사회적 특권과 가장 많은 사회적 제약을 안고 있었다. 그 제약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그들이 대대로 특정한 사람이나 기관에 소유되어 있어서 매매·증여·상속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그 소유주의 다름에 따라서 私奴婢·公奴婢·寺院奴婢의 세 계층으로 나누어진다.

 귀족도 못되고 그렇다고 천인도 아니면서 그 중간에 위치한 것이 양인이었다. 양인에는 많은 신분층이 포함되어 있었다. 양인의 압도적인 다수는 일반 郡縣에 살면서 대대로 농사를 짓고 사는 농민들이 차지하였다. 이들은 사회적인 지위에 있어서도 양인 안에서 중간 정도에 위치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은 양인의 표준이 될 수 있다. 양인농민이라는 점에서 같으면서도 군현인보다도 낮은 사회적인 지위에 있던 鄕·所·部曲人이 있었고, 이에 준하는 津尺·驛民이 있었다. 양인 가운데에는 쟁이일이나 장사일을 世業으로 삼는 工匠이나 商人도 있었는데 이들의 사회적인 지위는 부곡인과 비슷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양인으로서 가장 낮은 위치에는 禾尺과 才人이 있었다. 한편 같은 양인이라고 하더라도 지방의 관아에서 일반 양인들에 대한 국가의 지배에 참여하여 두드러진 역할을 수행하는 鄕吏가 있었다. 중앙의 관료기구의 말단에서 吏職을 세습하는 雜類도 양인으로서 일반 군현인보다는 높은 사회적 지위에 있었다. 軍人을 대표하는 것은 京軍이었는데 이들도 양인이지만 일반 농민보다는 사회적 지위가 높았다. 향리·잡류·군인은 上位良人層에 해당하였던 셈이다.002)종래에는 이 신분층들을 ―특히 향리와 군인, 그 가운데에서도 향리―중간계층으로 보아온 것이 일반적이었다. 군현의 양인농민과의 차이를 강조하고, 그들이 양인의 상위계층이었다고 보는 입장이라면 그러한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고려 신분구조의 구성에 관한 설명을 표로 만들어 정리해 보면 다음<표 1>과 같다.

貴 族
(士族·官人階層)
文 班
武 班
南 班
良 人
(庶 人)
鄕吏·軍人·雜類
郡縣의 農民
鄕·所·部曲人 및 津尺·驛民 그리고 工匠·商人
楊水尺 (禾尺·才人)
賤 人
(賤隷·奴婢)
私奴婢·公奴婢·寺院奴婢

<표 1>고려 신분구조의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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