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사회구조
  • 1. 신분제도
  • 1) 신분제도의 형성과 구조
  • (3) 신분계층의 편성 단위와 기준

(3) 신분계층의 편성 단위와 기준

 신분계층은 저마다 사회적 지위가 달랐다. 사회적 지위는 사회적 권리나 의무에 따라서 결정되었다. 신분계층은 서로 다른 사회적 권리와 의무를 갖고 있었다. 사회적 권리를 행사하고 그 의무를 이행하는 것은 사회적 기능을 발휘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사회적 기능은 국가의 체제 유지를 위하여 기대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사회적 기능을 고려에서는 役으로 표현하였다.003)李基白,<高麗時代 身分의 世襲과 變動 ― 韓國傳統社會에 있어서의 身分 ―>(≪民族과 歷史≫, 一潮閣, 1971), 94∼96쪽. 향리의 鄕役, 군인의 軍役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 그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004)役에 관한 더 자세한 설명은 李基白, 위의 책, 94∼95쪽 참조.

兩班奴婢는 그 주인의 役이 각별하여 예로부터 公役·雜歛을 지지 않았다. 이제 良民이 모두 세력있는 집안으로 들어가 官役을 지지 않게 되니 반대로 양반 노비들로 하여금 대신하여 양민의 역을 지게 하고 있으니 이후에는 모두 금하도록 하라(≪高麗史≫권 85, 志 39, 刑法 2, 奴婢 충렬왕 24년 정월 敎).

 私奴婢에게는 公役이 없었지만, 일반 양인들에게는 官役이 있었고, 양반에게도 각별한 역이 있었다. 사노비 정도를 예외로 하였을 뿐, 대부분의 신분계층은 역을 통하여 일정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도록 요구되었다.

 역을 담당하는 단위는 개인이 아니라 氏族이었다. 그 씨족의 범위는 그리 넓은 것은 아니었다.005)李基白, 위의 책, 95쪽. 씨족의 파악은 戶籍의 작성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호적을 통하여 씨족을 파악하는 일과 관련하여서는 아래의 기록들이 참고가 된다.

① 明經·製述의 두 大業으로 登科한 사람과 三韓功臣의 자손으로서 四祖 안에 工匠·商人·樂工에 이름이 있어서 계류되어 시행이 안되고 있는 사람들은 관할 관청에서 예에 준하여 신속하게 보고하여 결정해 주도록 하라(≪高麗史≫권 12, 世家 12, 예종 3년 2월 신묘).

② 우리 나라 法으로는, 그 八世戶籍에 賤類에 간여됨이 없는 연후에나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高麗史≫권 85, 志 39, 刑法 2, 奴婢 충렬왕 26년 10월 表).

 앞의 ① 은 四祖戶口式에 따른 호적의 시행을 말하여 주고 있고, ② 는 八祖戶口式에 입각한 호적이 있었음을 뒷받침하여 주고 있다. 이로써 적게는 부계로는 증조, 모계로는 외조의 범위까지가, 많게는 內外八世까지의 세계가 파악되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호적을 만드는 데 필요한 이 두 원칙은 모두 고려시대에 통용되었지만, 보다 일반적인 것은 4조호구식이었다.006)盧明鎬,<高麗時의 承蔭血族과 貴族層의 蔭敍機會>(≪金哲埈博士華甲紀念 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3), 262쪽. 이렇게 보면 씨족의 범위도 짐작이 간다. 씨족을 단위로 하여 지워진 役의 부담은 물론 세습되는 것이 원칙이었다.007)李基白, 앞의 책, 96쪽.

 역의 부담을 세습적으로 짊어지는 각기 다른 씨족들을 묶어서 신분계층을 편성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편성의 단위가 된 것이 班이었다. 문반·무반·남반·군반의 예가 그러한 것들이다. 이러한 사실에 주목하여 일찍이 고려의 신분체제를 班體制로 이해한 연구가 있다.008)李基白, 위의 책, 94쪽. 다만 반으로 구분된 신분계층이 대체로 지배계층이었다는 점이 불안감을 준다. 그러나 고려의 전반적인 신분제도의 시행에 있어서 중심이 된 것은 귀족제도였다는 점, 그리고 시행의 주체가 귀족들이었다는 점에서 신분체제를 반체제로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다고 본다.009)신라의 골품제도도 사실은 주로 지배계층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지만, 그것을 가지고 신라의 신분제도 전반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는 점도 참고가 된다.

 골품체제가 혈족의 유대를 더 중시하였다면 반체제는 사회적 기능을 더 내세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그러하다고 믿어지는데, 반을 내세우기 시작한 것은 신라말 지방의 豪族들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신라말 호족으로 등장한 村主들이 중앙의 관제를 모방하여 官班을 칭하였다는 점이다.010)金光洙,<羅末麗初의 豪族과 官班>(≪韓國史硏究≫23, 1979), 125∼132쪽. 그들은 재래의 骨品制를 부정하고 새로운 지배층으로서의 신분적 표징으로 관반을 내세웠다. 신분적 기능을 중시하는 반을 내세운 이유는 타도의 대상이 된 골품이 혈족의 유대를 토대로 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011)金光洙, 위의 글, 135쪽.

 호족들은 마침내 골품체제사회를 해체시켰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고려의 중앙귀족이 되었다. 중앙의 귀족이 된 사람들에게 이제「官」은 불필요한 것이 되었다. 독립적인 정부를 연상케 하는 이 표현을 지방의 세력가로 남아 있는 향리들에게 씌워줄 생각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의 중앙귀족은 신분편제의 단위로서「班」만은 여전히 존중하여 이에 토대를 두고 고려의 신분체제를 편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그들이 반으로 모든 신분계층을 전부 묶지는 않았다. 그 이유로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문반·무반·남반의 관인계층을 핵심으로 하는 귀족들이 다른 신분층에 대하여 우월하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혈족의 유대라고 하는 동일한 원리에 기초를 둔 것이 신라의 골품이지만, 骨은 品과 구별되었다는 점이 참고가 된다. 다른 하나는 지방에 대한 중앙의 우월(경계)의식이 작용하였다는 점이다. 향리와 군인은 사회적인 지위가 비슷하였다고 보이는데, 군인은 군반이라고 불리웠지만 향리는 그러하지 못하였다. 군반으로 칭하여진 군인은 경군 즉 중앙군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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