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려 시대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Ⅰ. 사회구조
  • 1. 신분제도
  • 2) 관인계층
  • (2) 음서제와 과거제

(2) 음서제와 과거제

 관인층은 대대로 관직에 나아가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 그 원칙이 늘 지켜지지는 않았다. 관인층의 자손이라고 해서 언제나 반드시 자동적으로 관직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관직을 가질 수 있는 방법으로 대표적인 것은 蔭補되거나 과거에 합격하는 일이었다.

 이 가운데 과거는 관인층의 독점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蔭敍는 5품 이상 관리의 자손에게 한하여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권리를 준 것이었다는 점에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음서에는 門蔭과 功蔭이 있었다. 전자는 문반·무반의 5품 이상 관리의 자손에게 항례적으로 베풀어진 혜택이었다. 후자는 공신 자손이나 특별한 공훈이 있는 관리의 자손을 대상으로 非定例的으로 시행된 것이다.015)고려시대 음서제에 관한 이해는 金龍善,<음서제>(≪한국사≫ 13, 국사편찬위원회, 1993), 441∼459쪽 참조. 이 가운데에서는 후자에 비하여 전자가 보편적이었다. 그런 만큼 전자가 지니는 중요성도 후자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면 5품 이상 관리의 자식은 누구나 이 문음을 통하여 자동적으로 관리의 길에 나아갈 수 있었을까. 그러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자식들의 범위에 관하여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종래에는 5품 이상의 관리의 경우에 그로 인해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자식은 전 생애를 통하여 한 명에 국한한다는 설이 일반적이었다.016)蔭敍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처음으로 한 金毅圭는 5품 이상 관리의 자손 1인에게 주어지는 혜택이 음서였다고 보았다(金毅圭,<高麗朝蔭職小考>,≪柳洪烈博士華甲紀念論叢≫, 1971;≪高麗社會의 貴族制說과 官僚制論≫, 知識産業社, 1985, 24∼33쪽 참조). 그런데 최근에는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자식의 수를 더 많게 보는 견해들이 보다 유력하게 대두되고 있다. 즉 한 명의 관리가 거듭되는 음서의 실시에 따라서 여러 자손에게 혜택을 줄 수 있다고 하거나,017)朴龍雲, 앞의 책, 37쪽.
―――,<高麗時代의 蔭敍制에 관한 몇가지 問題>(≪高麗史의 諸問題≫, 三英社, 1986), 134∼144쪽.
관리 한 명이 주는 혜택은 한 자식에 국한되지만, 托蔭者나 음서의 성격을 다르게 한다면 그 관리의 자손은 몇 명이라도 혜택을 입을 수 있다고 하였다.018)金龍善,≪高麗蔭敍制度硏究≫(一潮閣, 1991), 80쪽 참조. 전자의 설은「一人一子說」에 대립되는「一人多子說」이라고 할 수 있고, 후자는「1인1자설」을 인정하면서도, 탁음자를 바꾸면 여러 자손이 혜택을 볼 수 있다는 주장이므로「多人多子說」이라고 할 수 있다. 수혜자의 수만 놓고 보면 어느 견해도 여러 명의 자손이 혜택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같다.019)여러 자손이 혜택을 본다는 점에서는 盧明鎬(앞의 글, 263∼272쪽)도 견해가 같다.

 요컨대 5품 이상 관리가 되면 그 자손에게 門蔭의 혜택을 베풀어서 몇 명인가는 관직자가 될 수 있었다. 그 자손이면 누구나 할 것 없이 무조건 관리 가 된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 자손들의 많은 수가 현실적으로 그러한 혜택을 입게 되었다는 뜻이 된다. 이 점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이러한 사회적 특권 은 대단히 큰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5품 이상이라고 하는 조건은 있었지만, 문·무관이 5품에 오르는 데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이 점을 고려하면, 관인계층의 자손들은 - 남반은 예외라고 해야 하겠지만 - 많은 수가 대대로 관직 에 나아갈 수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음서가 혈연에 기초하였다면, 과거는 능력에 바탕을 둔 관리채용 방식이었다. 전자가 관인층의 귀족적 특권을 상징하였다면, 후자는 그들의 귀족적 특권을 파탄시킬 수 있는 소지를 안고 있었다. 음서가 관직자를 위로 좁혀서 5 품 이상의 관리로 한정하였다면, 과거는 관직자의 아래를 넓혀서 하급 관직자는 물론이고 향리의 자식도 과거에 응시하게 하였다. 과거에서는 일반 양인 농민에게조차도 그 길을 열어 놓았다.020)다만 일반 양인농민의 경우 가장 중요한 製述業에의 응시는 허락되지 않았다. 이 점에서 제술업으로도 진출할 수 있었던 향리에 비하여 일반 양인은 불리하였다(李基白, 앞의 책, 1990, 57쪽 및 朴龍雲,≪高麗時代 蔭敍制와 科擧制硏究≫, 一志社, 1990, 239∼243·571∼572쪽 참조). 그러나 아래로도 과거의 문을 열어 놓기는 했지만, 그 제도의 운용이 관인계층에 유리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가 없다. 광종대의 과거급제자가 모두 지배층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자제였다고 하며021)姜喜雄,<高麗初 科擧制度의 導入에 관한 小考>(≪韓國의 傳統과 變遷≫, 高麗大 亞細亞問題硏究所, 1973), 267·275쪽. 또 성종대의 과거급제자들로서 출신을 알 수 있는 한 모두가 중앙 관리거나 지방 향리의 자제였다고 한다.022)李基白, 앞의 책(1990), 59∼60쪽. 이렇게 보면 시험을 통하여 능력이 있고 없고를 따져서 급제·낙방을 결정하는 것이 과거라고 하지만, 그렇게 따지는 것이 대체로 관인층이나 이에 버금가는 향리와 같은 계층 사람들 사이에서의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023)李基白은 일찍이 과거가 여러 면에서 특권적인 지위에 있던 중앙관리와 지방 향리계층이 그들의 정치적 지위를 독점하는 방향에서 시행되었다고 언급하였다(李基白, 위의 책, 61쪽).

 현실에 있어서 과거제도의 시행은 특히 관인계층에 유리하게 이루어졌다. 이 점은 과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교육기관에의 입학자격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관학으로서 고려에는 國子監이 있었고, 여기에는 6학이 있었다. 그 가운데 律學·書學·算學의 3학은 雜學으로, 더 중요하였던 것은 그 나머지 3학 즉 國子學·太學·四門學이었다. 그런데 이 3학에는 관리 가운데에서도 문·무 7품 이상의 자제만이 입학할 수 있었다.024)≪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仁宗朝式目都監詳定學式. 이것은 그들로 대표되는 귀족들이 고급의 교육을 받은 수 있는 기회를 독점하였음을 말하여 준다. 이 3학을 거쳐야만 꼭 과거합격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과거응시에 있어서 교육이 지니는 중요성을 감안할 때, 관인계층이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리라는 점은 다투어 볼 일이 못된다. 중앙 귀족들에 의하여 사학도 크게 발전하였거니와 이 점에서도 과거가 그들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였으리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025)金光洙,<中間階層>(≪한국사≫5, 국사편찬위원회, 1975), 234쪽 참조. 과거제도는 신분제도의 규정 안에서 운용되었다. 그 시행은 귀족제도를 보완하는 방향에서 이루어진 것이 현실이었다. 따라서 과거제도가 귀족들의 신분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일정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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